
10. 바다축제, 사라진 마이크⑥
8월 5일. 송도바다축제 개막일 다행히 날씨가 좋아 아침부터 불볕이 내려쬐였지만 열찬씨를 비롯한 서구청관계자와 김두열회장과 손상주총무를 비롯한 송도번영회측을 포함한 주최 측은 볕이 뜨겁고 불쾌지수가 높을수록 더 많은 피서객이 해수욕장을 찾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정병진 주무와 동쪽 끝 송림공원에서 거북섬을 거쳐 임해행정센터까지 도보로 현장을 점검하는 열찬씨의 눈에 2사장의 백사장너머 바다 한가운데 덩그렇게 짓고 7,8m거리를 계단식 다리로 연결한 무대가 눈에 들어오자
“과장님, 무대가 멋있지요?”
“그렇긴 한데 물에 빠지거나 안전사고가 없이 무사히 끝나야 될 텐데.”
“잘 되겠지요, 뭘.”
송도명물 다이빙대가 파손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준 태풍 <셀마>가 지나간 후 근 10년이 되도록 해마다 유실된 모래사장이 이제는 행사무대를 짓고는 도무지 관객이 앉을 자리조차 없어 고심 끝에 무대설치와 노래자랑을 비롯한 각종 행사를 맡은 이벤트사의 30대 젊은 사장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인 것인데 처음 바닷가에 말뚝을 밖을 때의 우려와 달리 무대설치가 끝나고 조명을 넣어 시험가동을 해볼 때 V자형의 밤바다에 불야성처럼 번쩍이는 덩그런 무대가 너무나 멋있다고 이 역시 젊고 의욕적이며 문화를 좀 아는 과장 덕분이라는 번영회 손상주 총무의 치사에 김두열 번영회장과 주변의 상인들도 고개를 끄덕이고 여간해서 만족을 모르는 구청장도
“사람이 바뀌니까 뭔가 변하긴 변하는 구나!”
하는 것이 열찬씨와 동갑인 손상주총무가 괜한 공치사로 말하는 것만은 아니구나 싶기도 했다.
“아이구, 과장님 나오십니까?”
아직도 원래의 해안선과 절벽이 남은 암벽 앞에 진을 친 문화장터 사람들이 열찬씨일행이 다가오는 걸 보고 재빨리 일어나 주섬주섬 풍물과 고깔을 챙기고 해안도로를 한 바퀴 돌기시작하자 권영칠 회장이
“과장님, 우리 문화장터풍물패는 아무 걱정 마이소. 행사분위기에 맞춰서 알아서 하루에 너덧 번 1,2 사장을 돌 겁니다.”
허리를 깊이 숙이며 악수를 청하는 품이 연말 최종 추경 때 예산을 올려 문화장터 옆 구덕야구장의 높은 담벼락의 일부를 헐어 공중화장실을 설치하고 지금의 무질서한 난전들을 구획선을 긋고 가게 당 하나씩의 천막도 설치해주겠다는 담당과장 열찬씨의 약속이자 사실은 다음 선거의 표를 의식한 김형호 구청장의 선심에 목을 매고 충심을 다하는 모양이었다.
이제 너무 좁아져 무대설치마저 2사장에 뺏긴 임해행정센터 앞의 1사장에는 마치 무슨 대사 속에 나오는 희미한 옛 사랑의 추억처럼 좁고 긴, 마치 뜯다만 갈비뼈처럼 보이는 바나나보트가 줄지어 누워있고 이제 단 두 척 남은 포장유선의 선장들이 손님을 기다리는 한적한 모습이었는데 비해 덕성관을 넘어 2사장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일신했다.
우선 무대 앞을 중심으로 서구부녀회에서 설치한 풍물장터를 본뜬 포장마차에 새마을지도자가 운영하는 해수욕복과 튜브대여점에 개막식을 진행하기 위한 메인 텐트와 15개 동 별 텐트가 백사장을 가득 매우고 벌써 성급한 아이들과 중년사내들이 바닷물에 들어가 한창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백사장 여기저기에 설치한 바다그림그리기대회장, 모래조각 만들기 대회장의 플래카드 앞에 벌써 많은 참가자들이 와서 미리 바다풍경을 그리거나 모래조각을 하고 있었는데 주로 아이들이었지만 드문드문 학부모나 교사, 어린이집원장들의 모습도 보였고 아예 소속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의 작은 플래카드를 들고 온 경우도 있어 한껏 백사장이 아롱다롱 했다.
아직 개막식도 시작하지 않았지만 2사장 끝의 황토풀장에도 아이들과 사내들이 바글바글 끓으며 온몸에 황토를 뒤집어 쓴 채 씨름을 하거나 레슬링 흉내를 내며 서로 밀어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가과장님, 개막식 날 분위기가 대단합니다. 평소에 모이던 인원 다섯 배는 될 겁니다. 태풍 셀마, 아니 80년대 이후 이만한 인원은 처음입니다. 수고했습니다.”
평소 말수가 적은 점잖은 김두열회장의 얼굴도 상기가 되고 “완전히 대박입니다, 대박!”
손상주 총무의 기분도 한껏 고조되었다.
오후 4시에 개막식을 치를 행사장에서 마이크랑 식장을 점검하는데 어디서 우와, 하는 함성이 일어 바라보니 가설무대 앞 백사장으로 아이어른 할 것 없이 우르르 인파가 몰려 웅성거리는 앞쪽에 노란 금발여자 둘이 수영을 하고 역시 러시아인으로 보이는 사내 둘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과장님이 참 명도시네요. 우째 과장님 기대하고 똑 같이 러시아미인이 헤엄을 다 치는지, 혹시 과장님 하고 미리 짠 거 아입니까?”
준비물을 챙기던 고 계장이 눈을 찡끗하는데
“와아. 또 2사장 쪽에서 함성이 터져 유심히 바라보던 정병진 주무가
“이야, 마침내 한국여성도 물에 들어갔군요. 중년이 넘은 할머니가 아닌 젊은 여성은 아마 십 년도 더 지나서 처음일겁니다.”
하는데 과연 20대로 보이는 남녀 7, 8명이 해수욕복차림으로 바닷물에 들어가자 앞서의 러시아인들과 함께 해수욕장의 풍경을 한층 업그레이드하는 것만 같았다.
“고 계장님, 참석자명단은 더 이상 변경이 없는가요? 당사에서는 연락이 없고?”
개막식 20분전 사회 석 연단에 명단을 놓고
다음은 서구 의회 이아무개 의장님이십니다.
다음은 서구의회 아무개 부의장님이십니다.
아무개 총무위원장님이십니다.
아무개 산업건설위원장님이십니다.
동대신1동 아무개 의원님이십니다.
동대신 2동 아무개 의원님이십니다.
...
...
그리 대단한 직책도 아닌 것 같아보여도 명색 풀뿌리 민주주의의 상징 민선의원, 주민들의 투표를 걸렸다며 아무리 높은 관직의 공무원보다도 우대받아야 된다며 기어이 국회의원, 시의원, 구의원순으로 참석자 소개를 요구하는 의원들을 무시할 수가 없어 아니 사무감사와 예산안심의 때 시달리지 않기 위해 수용하고서도 괜히 짜증이 나는 열찬씨에게
“예, 구단위단체장들은 약속대로 다들 참석할 것이고 단지 구의원님들은 한둘 빠지거나 못 온다고 하고서도 슬며시 오는 경우가 있어 나중에 제가 정 주사를 통하여 쪽지를 넣겠습니다. 그리고 당사에서는 별 연락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정문화 국회의원께서는 아무래도 못 오시는 것 같습니다.”
서부경찰서 아무개 서장님이십니다.
서부세무서 아무개 서장님이십니다.
서구교육구청 아무개 청장님이십니다.
향토예비군...
...
밑도 끝도 없이 긴 내빈소개를 읽어가다
서구 목욕업지회 아무개 회장님이십니다.
서구 요식업지회 아무개 회장님이십니다.
서구 미용사협회 아무개 회장님이십니다.
서구 재래시장연합회 아무개회장님이십니다.
서구 유압, 유, 유압이라?
연습을 멈추는 열찬씨에게
“그건 시장골목에서 참기름 짜는 사람들의 친목회장이랍니다.”
“이런, 젠장!”
짜증을 내던 열찬씨의 입가에 허탈한 웃음이 번졌다. 단 한표가 아쉬운 민선에서 그 단체나 조합이 숫자가 많든 적든, 구정에 협조를 하든 않든 무조건 귀를 기울려야 하고 요구조건을 들어주다 보니 이 희한한 꼴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처음에 개막행사장에 둘러서 애국가제창도 열심히 한 아이들이나 일반 내방객들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내빈소개의 절반이 끝나기도 전에 다들 흩어지고 구청과 번영회의 관계자, 소위 내빈이라는 이런저런 장들만 남아도 기어이 마지막 내빈소개까지 마쳐야 하는 것이 민선시대의 새로운 병폐가 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튼 4시 10분전에 구청장이 현장에 나타나 개막식장 외부를 한 바퀴 비잉 돌며 반색을 하는 새마을부녀회나 지역유지들은 물론 데면데면한 일반시민들까지 혹시 서구에 사는 유권자일지도 몰라 한 명도 빠짐없이 악수를 나누고 마지막으로 행사장에 들어와 구의장, 경찰서장, 세무서장, 향토부대대대장을 비롯해서 역시 목욕업에서 이미용에서 유압회장까지 악수를 나눈 후 자리에 앉았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