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문중과 선산과 족보와②
아, 문중벌초라! 순간 열찬씨는 흠칫 놀라며 이번 벌초 때는 새천년을 맞아 그간 대중없이 치러오던 문중행사, 벌초와 묘사도 체계를 세우고 모든 문중 원들이 알아보기 쉽도록 한글중심의 새 족보를 만들어 보자고 지난 가을 묘사 때에 자신이 제의한 일, 그래서 그 기본계획을 마련해가기로 한 일이 떠올랐던 것이었다.
그날 저녁 열찬씨는 아버지 기출씨에게 들은 이야기와 집안행사 때 만나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우선 현재 같은 할아버지의 산소에 묘사를 지내는 사람들의 가계도를 작성하기로 하고
종손 39세손 수남의 성암씨
다음 39세손 구늪의 상기, 상열, 상식형제
또 38세손 언양의 동궁여인숙 일수씨, 보신탕집 석대씨, 순금당 수부씨, 미성당 상문씨
마지막 38세손 버든의 큰집 동찬씨의 아들 철우, 37세손 정찬씨, 언양의 상찬씨, 진장의 종찬씨
또 영주의 38세손 현우, 37세손 열찬씨 자신과 울산의 백찬씨를 도표로 작성했는데
종손 성암씨는 입향조(入鄕祖)로서 7대조인 향청 별감을 지낸 반동선생 이택씨가 무슨 일론가 패가망신하여 풍비박산이 난후 할머니와 어머니를 비롯한 식솔을 솔가하고 남부여대(男負女戴), 족보와 제기를 이고지고 양산의 대석으로 떠난 장남의 후손이었다.
좀체 뿌리를 내리지 못 하고 여기저기를 떠돌다 해방 후에 옛 덕천역이 있던 작천정 입구 수남마을로 정착한 상도씨의 외아들로 현재 집안전체의 종손이 되었다.
다음 구늪의 상기, 상열, 상식 3형제는 집안이 파문(破門)되던 해 우선 급한 대로 사촌에서 하잠을 거쳐 윤동골을 넘으면 되는 가까운 구늪으로 옮겨간 둘째아들의 계통이었다.
전대에 장손 방우씨가 태어나 모처럼 할아버지 반동선생의 뒤를 이을만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수재로 태어나 힘들게 일본유학까지 갔지만 학생운동에 관련되어 일제의 모진 전기고문으로 정신 이상이 되어 돌아와 결혼을 했으나 아이를 낳지 못했다.
고향에 남아 농사를 짓는 둘째 방개씨의 셋째아들을 양자로 들여 대를 이어 족보상 서열은 오히려 동생인 상식씨사 형 상기씨보다 앞서는 형편이었다.
또 언양의 4형제는 열찬씨의 증조부 때까지 아재비조카로 같이 버든에 살다 언양장터로 이사가 진작 장사 길로 나서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소캐집 건영씨의 아들들이었다.
일찍이 장사머리에 눈을 뜬 네 형제가 첫째는 장터의 요지에 자리한 솜 집터를 여인숙으로 개조해 영업하고 둘째는 보신탕집으로 셋째는 순금당이라는 금방으로, 넷째는 미성당이라는 금방으로 형제가 언양바닥의 돈을 싹쓸이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밥술께나 뜨는 축이었다.
단지 4형제 중 가장 키가 크고 인물이 멀쩡한 둘째 석대씨만 아내의 식당에 얹혀살며 가끔 시골노름방에서 두각을 나타낸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그 역시 먹고살 걱정은 없어 언양에서 한 가닥 하는 재산가들로 알려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큰집의 4촌 형님들과 자기형제들의 가계를 살피던 열찬씨는 희한하게도 큰집에도 장남 동찬씨가 일찍 죽고 장손 철우가 올바른 직업도 없이 여기저기 떠돌며 자신의 형 일찬씨 또한 장수하지 못 하고 죽은 뒤 조카 우현씨가 잘 다니던 직장마저 팽개치고 주식으로 거덜이 난 모습을 보고 언젠가 아버지 기출씨가
“야야, 우리 집안은 희한하게도 장손이 잘 안 풀리는 모양이더라. 우리가 소나무만 봐도 모종가지, 그 뭐라더라 충청도나 서울사람이 우듬지라고 하는 가운데 가지가 똑 바로 올라가며 잘 자라야 반듯한 나무가 되는데 아무리 3, 4형제씩을 낳아도 하필이면 판판이 맏이가 병이 들어 일찍 죽거나 사람구실을 못 하니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아무튼 열찬이 니는 머리 좋은 니 새이 일찬이를 잘 도와서 우리 집안만이라도 장자, 장손이 잘 되는 새로운 내리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신신당부하는 것도 모자라 공부 잘하는 장남을 뒷받침하기 위해 차남인 열찬씨를 아예 농사꾼, 나무꾼을 만들려고 국민학교입학조차 시키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과는 역시 장자도 장손도 다 신통찮은 결과인 것이었다.
그렇게 수남1, 구늪3, 언양4, 버든7가호의 모두 15가호의 명단을 작성한 그는 새 족보를 만들고 집안의 골격을 바로 세우려면 우선은 그 동안 장손중심, 연장자 또는 촌수 위주로 대충 이끌어오다 해마다 묘사의 제수비용이 없어 쩔쩔매는 집안을 이끌 종친회를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장단을 뽑고 일정한 규모의 종친회기금을 모아 그 이자만으로 묘사를 지낼 정도의 기금을 모아야 된다는 생각에 차분하게 몇 가지를 메모하기 시작했다.
며칠 뒤 문중 벌초 날. 옛날 입향조 반동선생이 서당을 열던 하잠마을 뒤 롯데별장 앞의 도로변에 모인 문중원들은 그동안 묘사를 지내왔던 반동선생의 할머니 묘와 구늪사람들의 묘가 있는 선산 다래등을 비롯해 출강, 윤동골, 작동등 네 곳의 산소에 조를 짜서 낫과 장갑과 음료수, 제주로 쓸 소주를 배부 받아 각자 맡은 산소로 출발했다.
일부러 상찬씨와 같은 조가 되기로 하고 울산공단이 들어서면서 급수원인 대하댐 건설로 하잠마을이 수몰되어 이제 밧줄배로 댐을 건너야하는 인동골산소를 택해 오랜만에 4촌 형제가 오붓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야야, 니캉 내캉 둘이 속닥하게 어데 가는 기 이기 얼매만이고?”
새삼 반갑고도 살가운 얼굴로 중년이 된 동생을 바라보는 상찬씨에게
“긇케 말입니다, 형님. 그라고 보니 제가 중학교 댕길 때 형님이 모처럼 버든 집에 와서 같이 지개 지고 진장 밭에 올라가서 형님이 강냉이 꾸버주던 생각이 납니더. 그 때 그 불에 끄실린 따끈따끈한 강냉이가 얼매나 맛있던지. 형님도 생각나능교?”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한창 커던 니는 벌써 중년이 되고 나는 벌써 환갑이 다 된 노인이 되었구나.”
그렇게 논두렁도 잘 베지 않은 들길을 한 참 걸어 이제 온갖 넝쿨이 밀림처럼 뒤엉킨 길을 낫으로 뚫으며 작은 산등성이 하나를 넘어 비로소 몇 년째 벌초를 못해 쑥대밭이 된 묘 두 기를 발견하자
“아매도 여겐갑다. 잔아부지가 돌아가실 때 제대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아 버든 형님하고 내하고 수남에 방개씨가 안 잊어뿌고 찾을라 캐도 산소를 많이 잃어뿌고 묵묘가 되뿠다.”
“그람 여게가 누구 산손지는 아능교?”
“잔아부지 말로는 자기가 알라 때 이미 있던 묜데 후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일제시대보다도 더 전에 못 묵어서 만주(滿洲)인가 연해주로 이사 간 집안사람인가 싶다 카더라.”
“아아, 그래서 우리 족보에 이름만 있고 후손도 없이 대가 끊긴 집이 둘, 아니 형제가 있었구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낫질깨나 하는 장정 둘이 한 시간 너머 풀을 베고 그늘을 지우는 나뭇가지를 찍고 비로소 햇살이 스며드는 무덤 앞에 소주를 붓고 절을 올리고나자
“형님.”
비로소 열찬씨가 집안의 대소사를 정리하고 새 족보를 만들고 종친회를 결성하는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래. 듣고 보니 그렇구나. 그런데 내가 뭐를 아나? 그저 많이 배우고 객지 물 많이 묵은 동생 니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이 모든 문중 일을 처리할 중심 종친회장이 필요한데 나이로 보나, 7형제나 되는 버든사람의 숫자로 보나 인품으로 보나 형님이 맡아달라는 열찬씨의 말에 나이 많기로는 버든에 정찬이형님이 계시고 돈 많기로는 순금당, 미성당형제가 있다고 사양했다.
단지 돈이 많다는 것 말고 두루두루 문중을 살피고 대소사에 성의 있게 임할 사람은 형님밖에 없다고 해도 내 환갑이 지나도록 남의 앞에 한 번도 나서본 일이 없다고 또 사양하는 것을 그러니까 형님도 이제 문중회장도 장이니 장짜리 하나 맡아보아야 된다면서 억지로 반승낙을 받아냈다. 둘은 다시 밧줄 배를 타고 댐을 건너 흩어졌던 문중원들을 만나 가까운 매운탕 집으로 향했다.
대암댐 수문 바로 옆 매운탕집에서 흩어졌던 문중원들이 속속 모여들어 빙어튀김을 안주로 소주잔을 나누다 언양의 특산 중태기 매운탕으로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식사가 거의 끝나고 종찬씨를 비롯한 주당 몇이 냄비바닥의 국물과 술병바닥의 소주를 악착같이 청소하고 젊은 문중원이 종이컵 커피를 돌릴 때쯤
“잠깐 주목해주십시오. 전에도 몇 번 이야기가 있었지만 지금 서기 2,000년 새로운 밀레니엄이라고 해서 세상이 엄청나게 변하는 시점에 우리 문중은 여전히 옛날에 내려오던 관습대로 주먹구구식, 아니 임시방편으로 겨우겨우 각종 행사를 치러오고 있는데 이제 우리도 뭔가 좀 바꿔보아야겠습니다.”
이렇게 운을 뗀 열찬씨가 먼저 그간 문중에서 해오던 음력 7월 보름 전에 치르는 선산의 벌초와 음력 10월 보름 전에 지내는 묘사(墓祀), 그러니까 주로 8월 하순경에 롯데별장 앞에 모여서 조를 짜서 벌초를 하고 점심을 먹는 과정과 경비, 또 주로 11월 말에 대암댐 옆 둔터리의 다래등에서 지내는 문중묘사와 그 경비에 에 대해서 복습을 하듯 그간의 경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연장자인 상찬씨와 동궁여인숙 일수씨에게 확인을 겸한 동의를 구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