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414) 제5부 열찬씨의 전성시대 - 제14장 축제와 길놀이⑬
대하소설 「신불산」(414) 제5부 열찬씨의 전성시대 - 제14장 축제와 길놀이⑬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3.03.14 17:23
  • 업데이트 2023.03.16 10: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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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축제와 길놀이⑬

설명하는데

, 상평통보다!”

아까 열찬씨가 설명한 헝겊조각 몇 개와 엽전 몇 푼이 나왔다.

 

이렇게 한 바퀴를 빙 돌아 종류대로 물건을 정리하고 숫자를 파악하고 사진을 찍어나가다 마지막에

이런 산데미도 있네. 언양 방천묵산데미가 어째 함안까지 다 갔는가?”

열찬씨가 중얼거리자

과장님, 산데미는 또 뭡니까?”

경북 성주 가야산 해인사 뒤편에서 자란 박기도 주임이 또 묻는데

, 그 광주리란 이야기 들어봤지? 입이 광주리만 해도 할 말이 없다고 말이야. 광주리란 보통 싸리나무나 대나무로 짠 둥근 바닥에 한 뼘 정도의 테두리가 있어 감이나 고구마 같은 제법 큰 물건들을 담거나 이고 나르는 도구지. 언양에서는 주로 서부리 방천묵이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신불산 너머 신불평원에서 자생하는 싸리나무 군락지에서 곧게 뻗은 놈만 베어와 물에 불려 껍질을 벗기고 말려서 만들어 보부상을 통해 전국일원에 팔아 생계를 유지해 대동아전쟁, 그러니까 세계 제 2차 전쟁말기에 일본에 마을마다 놋그릇과 송진, 쌀을 비롯한 온갖 군수품을 공출(供出)하는데 아까 말한 언양장을 중심으로 한 반농, 반상의 가난한 세 마을 방천묵과 우리 고향 버든과 어음리는 쌀이나 송진 같은 알맞은 공출감이 없어 방천묵은 광주리를, 버든은 가마니를, 어음은 새끼를 공출했단 말이지.”

아니, 과장님, 산데미, 산데미 하면서 말은 산더미처럼 왜 자꾸 광주리 이야기만 하는 겁니까?”

, , 그랬구나! 그러니까 광주리가 한 뼘 정도의 물건도 담고 머리에 일 손잡이 겸의 테두리가 있는 것이라면 산데미는 손잡이 없이 그냥 둥글고 편편한 바닥에 고사리나 산나물이나 홍시, 약초를 말리는 것, 그리니까 표준말로 채반이라 하는 것이지.”

그럼 소쿠리는 뭡니까?”

그건 대나무나 싸리로 만든 주둥이가 뚫린 바구니를 말하는 거지. 보통 거름소쿠리라고 많이들 하지. 벌어진 아가리에 쇠스랑이나 호미로 거름을 담아 뿌리기도 하고 아주 좁은 도랑에 대고 물고기를 잡기도 하지.”

참 많이도 아십니다. 그럼 바구니는 요?”

그건 아가리가 없는 둥근 소쿠리지. 시골에서는 보리쌀을 삶아 말리는 보리쌀소쿠리가 대종이지만 도시인은 그보다도 <아리랑 낭랑>에 나오는 꽃바구니를 많이 알지. 왜 그 응원가로 많이 쓰이는 노래 말이야?”

하면서 열찬씨가 콧노래를 흥얼거리자 박주임이 바로

야야, 야야야야

꽃바구니 옆에 끼고 나물캐는 아가씨야

아주까리 동백꽃이 제 아무리 좋아도...”

어깨를 우쭐대는데

밥 묵고 합시다!‘

카메라를 둘러매며 김종현씨가 소리쳐

모처럼 콩나물비빔밥이나 먹으러갈까? 토속적 기분도 나고 말이야?”

일행이 후문을 나서는데

계장님, 점심 먹고 두 시경에 계장님이나 과장님 중 한 분이 부구청장실로 오시랍니다.”

?‘

아마 강희숙씨 결재서류, 문화의 집 홍보의 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알았어요. 밥 묵고 생각합시다.”

아침부터 민속품과 꽃마을로 웃다 울다, 다시 웃다 또 얼굴이 찌푸려지는 기분을 애써 추스르며 그는 모처럼의 콩나물국밥의 그 구수하고 푸근한 맛과 쪽파향이 가득한 양념간장의 맛으로 빠져들었다.

 

, 과장님 같이 가실랍니까? 아니면 저 혼자 갔다 와도 되는데 혹시 부구청장이나 청장실에서 과장님 찾을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사무실에 들어와 차 한 잔을 마시자 말자 고명석계장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열찬씨가 가는 것이 설명도 쉽고 결재도 쉽겠지만 차마 상관을 보내기가 그렇다는 눈치였다.

내가 갔다 오지 뭐. 그 까짓 거.”

열찬씨가 수첩을 들고 일어서는데

과장님, 저도 가지요.”

하고 고 계장이 일어서더니

아니, 과장님은 그냥 계십시오. 저 혼자 갔다 오지요. 그깟 닭 잡는 일에 소 잡는 칼을 쓸 이유가 있나요?”

제법 비장한 표정을 짓는 걸

그럼, 잠깐만!”

고 계장의 귀에 대고 몇 마디를 소곤거린 열찬씨가

그럼 성공을 빕니다.”

도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오늘 같은 날 도저히 참을 수 없으니 딱 한 잔만 하자며 점심반주로 돌린 소주의 아릿한 향과 함께 한참이나 나른한 반 수면상태에 빠졌을 때였다.

과장님! 성공입니다. 성공!”

허리디스크가 심해서인지 평소 잘 웃지 않던 고 계장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과장님, 참 대단하십니다. 과장님 작전대로 했더니 청장님까지 단숨에 결재가 났습니다.”

, 소리가 나게 책상위에 결재 판을 놓고 구청장사인을 가리켜보였다.

음 그렇구나. 별 말씀은 없으시고?”

. 작전대로 첫 머리만 윗분들 의견대로 싹싹하게 양보하니 역시 다들 싹싹하게 결재를 해주셨습니다. 선견지명이 대단하십니다.”

선견지명은 좀 과한 말이고 우리 고향에 이런 말이 있지. 어림이 짐작이고 서울이 북쪽이라고 말이야.”

, 그런 말이 다 있었군요. 언양엔.”

고 계장의 설명으로는 당초

 

서구문화의 집 운영안내

 

0.서구문화의 집에 오면 각종 도서를 무료로 대여 받을 수 있습니다.

0.무료로 영화나 V. T. R도 볼 수 있고 테이프를 대여 받을 수도 있습니다.

0.혼자 조용히 책을 일거나 독서실처럼 공부도 할 수 있습니다.

 

0.주소 : 부산시 서구 아미동 100번지

찾아오는 길

 

약도

 

 

이렇게 된 강희숙씨의 원안을

 

아미동 대학병원뒤에 있는 서구문화의 집에서는

 

0. 각종 책을 공짜로 볼 수 있고 빌릴 수도 있습니다.

0. 영화나 V. T. R도 공짜, 태이프대여도 공짜입니다.

0. 혼자 조용히 공부도 하는 것도 공짜입니다.

 

특히 내년 11일부터는 독서실을 대폭 확대 밤 10시까지 공짜로 개방하니 절대로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하고 중간중간 책, 영화필름, 비디오테이프와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는 모습을 컷으로 배치한 열찬씨가 고친 안을 새로 부임한 행정고시 출신 엘리트 이용오 부구청장부터

어이, 고 계장님, 이게 눈에 확 뜨이기는 하지만 공짜공짜가 너무 속된 표현이 아닌가? 무슨 상업광고도 아니고. 또 서두부터 아미동 대학병원 뒤에서도 그렇고?”

딱 열찬씨가 예상하고 일러둔 데로 나오는 지라 고계장이 만년필로 고친 수정안을 자세히 보니 희한하게도 당초 강희숙씨의 초안과 거의 같게 원점으로 회귀했지만

, 저도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만 우리 가과장님의 말을 듣고 보면 우리 행정공무원의 시각이 아닌 요즘 젊은이, 특히 학생이나 청소년의 시각에는 그렇게 단순하고 친근한 표현이 더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 말입니다.”

,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한 것 같기도 하고. 우리 가과장이 공무원문인회장이라 언어감각이나 표현력이 뛰어난 것도 사실이고...”

둘이 다 표정이 누그러지자

그럼 부구청장님. 이렇게 조금만 손을 보면 안 되겠습니까? 우선 앞머리는 <서구문화의 집 운영안내>로 하되 아래의 아미동 대학병원 뒤도 살리고 맨 아래 주소와 약도도 싣고 중심부분의 세 번 반복되는 <공짜>도 맨 위에는 무료로 고치고 밑에 두 곳은 공짜로 고치고 말입니다.”

글쎄. 그렇게 하면 한결 부드럽겠지.”

몇 번 망설이다 일부를 고쳐 결재를 하면서

글쎄, 청장실에서 별말은 없어야겠는데.”

하고는

그나저나 고생하는 문화관광과직원들 하고 직원간담회나 한번 하자고 과장님한테 전달하이소. 총무계와 협의해서 기자간담회일정도 잡고.”

딱 열찬씨의 예상대로 결정되어 청장실로 들어가 결재 판을 펴자 김규형 전총무국장의 당부도 있고 해서 유심히 살피던 구청장이 <공짜>부분에 사인펜으로 점을 콕콕 찍다가

부구청장이 이래 고쳐서 결재했단 말이제?”

한 마디를 던지고는 사인을 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웃다 울다 다시 웃는 헤피 엔딩의 하루가 되었군. 오늘 같이 좋은 날 아니 먹고 어쩌리? 고 계장은 총무계와 협의해서 부구청장 일정 없으면 당장 직원간담회 하자 카고 식당예약 하이소. 그라고 진미덕씨는 같은 정부미인 신랑 조용씨도 부르소. 기술직이라 타 구청 사람이나 간부들을 많이 알면 알수록 좋지.”

열찬씨가 기분을 내는데

아니 되옵니다, 과장님. 오늘은 함안 조씨 종갓집 제삿날입니다. 이 종부는 부득이 정시에 퇴근을 해야 됩니다.”

하는데

과장님, 부구청장 일정이 두 개나 있어 오늘은 안 된답니다.”

고명석계장의 전화가 오자

에이, 역시 <울다>로 끝이 나는군. 그래도 별로 섭섭하지는 않네.”

열찬씨가 허허 웃고 말았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