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말의 성찬, 지방의회①
꽃마을의 구유지는 결국 수목원을 조성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각 부서에서 여러 가지 의견이 제출되었지만 이미 거의 모든 구청이 갖춘 <문화회관> 또는 <문화예술회관>이 없어 그 쪽으로 가자는 의견도 많았지만 대신공원 안에 주로 국악을 전수하는 민속예술관이 있는데다 작으나마 아미동에 <서구문화의 집>이 있어 한번 개관하면 계속 돈만 들어가는 시설은 서구의 재정형편상 어렵다는 결론이었고 노인복지회관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마지막으로 숲속 음악실이나 도서관도 거론되었지만 부지자체가 상당한 고도의 등산로에 위치해 아무래도 갑자기 시대적 화두로 떠오른 참살이, 웰빙이라는 생소한 단어에 걸맞은 수목원으로 조성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덧붙여 약간의 수입을 올릴 수 있는 휴게시설인 은은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전통찻집을 곁들이기로 했다.
가칭 구덕수목원이라고 이름붙인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착수하며 우선 제법 가파른 산비탈에 옛 산길을 따라 비뚜름하게 생긴 구유지에 인접한 국유림을 재무과에서 양도받고 건설과에서 반듯하게 구획하고 지역경제과에서 산림법상의 절차를 밟으며 수억을 넘어 수십억이 들지도 모르는 이 사업을 어떤 방식으로 추진할 것이냐를 두고 부구청장과 국장단, 예산업무를 맡고 있는 기획감사실장을 간부들이 수차례 구청장실에서 의논할 결과 민간투자사업으로 추진하기로 결론이 났다.
구청에서 부지를 제공하면 민간업자가 사재를 들여 부지를 정리하고 나무를 심고 그 사이에 전통찻집을 지어 수목원입장료와 찻집의 수입으로 투자비용을 회수한 20년 후쯤에 구청으로 기부체납을 하는 공영개발식으로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가친 <구덕수목원>조성의 민간투자자, 즉 사업시행자를 공모한다는 공고가 나간 지 한 일 주일쯤 지난 뒤였다.
“아이구, 선배님!”
키가 작고 몸매가 통통하며 이마가 반질반질한 40대의 사내와 역시 키가 작고 몸매가 통통하며 이마가 반질반질하지만 단지 피부가 새까만 40대의 여인이 문화관광과로 들어서며 열찬씨와 아주 절친한 듯, 엄청 반가운 표정으로 소리치는지라
“누구시더라?”
엉겁결에 악수를 하고 둘을 찬찬이 살피던 열찬씨가
“아아, 지점토, 아니 하영혜씨 공방에서...”
비로소 낙동강의 지류인 서강을 건너 넓디넓은 갈대밭과 논길을 지나 땅강아지처럼 나지막하게 엎드린 강서구 가락동인가 어디의 시골마을의 허경혜지점토공방에서 인사를 하다 동아대선후배가 되는 것을 알게 되어 파전과 동동주를 마시며 한나절을 보낸 사람, 구팔칠과 사향아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둘이 함께 미술학과를 나온 동창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아이구, 인자 보니 우리 후배님들이네. 그래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 예까지 왔소?”
하고 원탁에 앉히고 눈치 빠른 진미덕씨가 재빠르게 차려온 커피를 권하는데
“우리 같은 무명화가들에게 이런 높은 자리에 계신 선배님이 다 계신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사무실에서 뵈니 가락에서 뵐 때 보다 훨씬 멋지고 위엄이 넘칩니다!”
둘이 손이라도 비빌 듯 공치사를 늘어놓는데
“아니, 이 후배님들이 갑자기 왜 이러시나? 공연한 칭찬을 우리 고향 언양에서는 소쿠리뱅기 태운다고 하는데 너무 어지러워 현기증이 나니 내 좀 내라주소.”
정색을 하면서
“무슨 일? 내 금방 어디 좀 가야되는데.”
다그치자
“아따, 선배님 모처럼 새까만 후배들 왔는데 차근차근 이야기할 시간 좀 내주소. 누가 사던 점심도 같이 먹고.”
쉽사리 일어날 눈치가 아니라
“그라면 천천히 차 마시고 가시소. 꼭 할 이야기가 있으면 다음에 시간약속해서 만나고.”
아무래도 뭔가 난처한 부탁, 하다 못 해 하영혜씨의 지점토 공예품을 사듯 구팔칠의 동양화나 사향아의 고서라도 팔아달라는 것만 같아 고명석 계장에게 눈을 찡긋해 보이며 수첩을 들고 일어나는데
“선배님 잠깐만! 그럼 이야기는 나중에 하더라도 선배님 시화를 가져왔으니 차에 가서 시화나 받아 가이소.”
자동차 키를 꺼내 보이며 황급히 따라나서서 주차시킨 차에서 <들길에서>라는 시화를 꺼내주며
“하영혜공방의 찻집하고 분위기가 딱 맞는 시화지만 작가 본인이 원하면 드리기는 드려야 된다면서 허 작가님도 참으로 안타까워합디다.”
“그래요? 별로 좋은 시도 아닌데.”
하며 열찬씨가 후배 구팔칠씨가 그린 커다란 수양버들의 가지 아래로
<비오는 날>
글 가열찬
림 구팔칠
비 개이자 일제히
...
달맞이꽃 발돋움한 긴 못둑 길을
나 혼자 걸어갔다 와도 좋겠다.-

새삼 읽어보아도 별 감흥이 없는데
“선배님, 실은.”
구팔칠씨가 눈을 반짝이며
“구덕수목원사업 시행자를 찾는다면서요?”
“그렇지.”.
“웬만하면 제가 맡아서 하고 싶어요. 나중에 향아씨랑 전통찻집도 하고.”
“그래요? 돈이 엄청 들 건데.”
“돈 걱정은 마이소. 우리 팔칠씨가 부잣집 외동아들 아입니까? 얼마 전에 부친이 돌아가셨는데 유산이 만만찮다 아입니까?”
“그래요? 그래도 사업자선정심사가 꽤 까다로울 건데?”
“그래서 선배님 찾아온 것 아입니까? 그래서 선후배 동창이 좋다는 것 아입니까? 선배님 한 번 밀어 주이소.”
“밀다니, 내가 무슨 힘이 있나?”
“아이구, 선배님도 주무부서가 어디로 지정될지 아니면 전담부서를 신설할지는 몰라도 심사에는 문화관광과장, 즉 선배님이 반드시 들어간다는 것쯤은 삼척동자라도 다 안다 아입니까?”
“글쎄. 별문제만 없다면 같은 값에 다홍치마라고 내가 후배님 안 밀어주고 누구 밀겠소. 그리 알고 가서 사업계획서서류나 잘 갖추소.”
“알겠습니다. 선배님만 믿습니다. 조만간 연락 드릴테니 시간 한 번 내주이소. 선후배끼리 코가 비뚤어지도록 한 잔 하입시다.”
싹싹하게 손을 들어 보이며 둘이 떠나는 것을 본 열찬씨가 시화를 들고 돌아서려는데
“과장님!‘
누가 옆에 차를 대며 소리치는데 사진기사 김종현씨였다.
“종현씨, 어데 갔다 오는데? 엔간하면 오늘은 자동차 세차 좀 하지? 아마도 대한민국 무 세차기록은 이미 갱신되고도 남았을 텐데? 꼭 기네스북에 올라야 되겠나?”
아직 단 한 번도 세차한 모습을 본 일이 없는 먼지투성이의 낡은 프라이드를 훑어보는데
“짠! 과장님, 제가 지난 주말에 집에 가서 과장님이 좋아할 엄청난 보물을 갖고 왔지요. 무엇이 들었는지 함 맞춰보이소.”
스스로 대견한 듯 아주 흡족하게 웃는데
“선물이라? 고향이 남해니까 유자청 아니면 마늘장아찌? 아, 참 혹시 물메기 아닌지 모르겠네. 그렇지만 물메기라면 내 사양하지.”
언젠가 종현씨가 남해특산품 제철 물메기를 연산동이 아파트까지 들고 와 차 한 잔을 하고 돌아간 뒤에 싱크대 위에 놓아둔 신문지에 둘둘 산 선물을 풀어보던 영순씨가
“아아구야!”
펄쩍 뛰면서 손에 든 것을 떨어뜨리는데 열찬씨가 보아도 섬뜩하도록 징그러운 모습, 까맣고 뭉뚝한 머리에 하얀 이빨을 드러낸 채로 눈을 커다랗게 뜬 물메기였다. 주로 전날 과음을 했을 때 복국이나 아귀탕보다도 더 속을 잘 풀어준다고 가끔 점심메뉴로 먹기도 하고 간혹 수족관바닥에 널브러져 눈만 끔뻑거리거나 느리게 헤엄치는 것은 보아도 그 시원한 국물을 내는 물메기가 그렇게도 무섭게 생긴 것을 새삼 느낀 열찬씨가
“당신 나이가 몇인데 그까짓 물메기를 보고 그래 놀래노? 무나 쑹덩쑹덩 썰어 넣고 어서 시원하게 국이나 끓이소.”
“나는 못 하요. 겁이 나서 쳐다보지도 못 하는데 칼질을 우째 하요? 그마 갖다 내삐소.”
“씰 데 없는 소리! 묵는 음식을 버리면 죄 받는다 안 카나? 그라고 남해에서 여까지 갖다 준 성의를 봐서도 그렇고.”
할 수 없이 열찬씨가 그 미끌미끌한 검은 껍데기를 씻고 토막을 내어 냄비에 담고
“자, 인자 간을 해서 끓여보소.”
해도
“앞으로 절대로 물메기는 사절한다 카이소.”
영순씨가 고개를 반쯤 돌리고 겨우겨우 국을 끓이던 생각이 난 것이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