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416) 제5부 열찬씨의 전성시대 - 제15장 말의 성찬, 지방의회③
대하소설 「신불산」(416) 제5부 열찬씨의 전성시대 - 제15장 말의 성찬, 지방의회③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3.03.18 05:45
  • 업데이트 2023.03.16 11: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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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말의 성찬, 지방의회③

하루의 일정이 마무리된 저녁에는 계장과 실무자들이 그날의 답변요지와 후속조치, 내일의 예상 질문과 답변을 작성하는 동안 주요한 지적사항이 예상되는 간부들은 무슨 과 무슨 과장, 무슨 업무를 단단히 벼르고 있다고 알려진 <의원님>을 찾아가 손을 비비고 술대접을 하면서 이튿날의 의회를 준비하곤 했다.

 

행정사무감사가 끝나기는 했지만 아직도 출근만 하면 의회에 출석해서, 아니 출석보다는 잡혀가서 하루 종일을 허비하는 날이 많아졌다.

잇따라 진행되는 2001년 세입세출예산안 심의가 있는 것이었다. 행정사무감사가 공무원입장에서 보면 비록 이름은 거창하고 으스스해도 특별한 부정이나 비리가 없는 한 충분히 예측이 가능한 질문으로 대충 찔러보면 해당부서장인 과장들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의원님의 예리한 질문에 다시 한 번 제 소관업무를 돌아보게 되고 혹시 소홀한 점이 없나 반성하게 됩니다. 훌륭한 질문 감사합니다.”

엄청난 충격이라도 받은 듯이 죽는 시늉을 하며 정작 답변은 미리 담당자가 적어준 예상답변을 줄줄 읽어나가다가

의원님의 예리한 질문과 구민들의 열망을 십분 참작하여 앞으로의 행정집행에 적극 반영토록 하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이면

과장님, 성의 있는 답변 감사합니다. 기대해보겠습니다.”

<앞으로의 행정에 적극반영>이라는 상투적 답변이 정작은 이 시간만 지나면 바로 잊어버리거나 무시하고 두 번 다시 생각도 않겠다는 뜻임을 답변자도 답변을 듣는 질문자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서로 흡족한 표정을 짓는 이 질의문답, 역시 그냥 <화려한 말의 성찬>일 뿐인 이 요식행위에서 인구 만 명이 채 안 되는 좁은 골목에서 선출된 일개 지방의원이 마치 국회에서 국무위원을 질타하는 장관이라도 된 착각에 빠져 스스로의 질문에 심취하는 갑()질을 하고 집행부의 과장들은 속에서 금방 무엇이 치밀어 오르는 분통을 참으며 겉으로는 예, 예 그야말로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비굴한 을()질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었다.

 

열찬씨가 알기로 일찍이 인류사에 근대적 민주주의의 싹을 틔운 영국의회의 발달과정은 권력이 하늘이 왕에게 주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하늘로 부터 이 땅에 살아가며 존중받아야 된다는 천부인권설(天賦人權說),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을 다스리고 나라를 통치하는 모든 권력은 오로지 모든 인간, 권력자인 왕이나 귀족이 아닌 농민이나 노동자 같은 평민으로 부터 나온다는 주권재민(主權在民)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처음으로 왕의 폭거와 전횡, 전쟁이나 자신의 사치를 위한 가혹한 세금징수를 막기 위한 시민운동의 3단계의 대변혁이자 왕정에서 민권으로 시대의 흐름을 바꾼 영국의 1215년의 마그나 칼타, 대헌장(大憲章), 1628년의 권리청원(權利請願), 1689년의 권리장전(權利章典)이 모두 견제와 균형에 초점을 맞춘 3권 분립, 의회민주주의를 불러오기 위한 전조 혹은 초석이라고 열찬씨는 배워서 알고 그렇게 신봉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말단공무원이 되어 지방정부의 한 부속, 작은 부분을 집행하는 집행관이 되면서 또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지방의회의 터무니없이 엄숙하고 복잡한 의전절차, 형식적인 개회사와 법안통과의 절차, 선거구민을 의식한 알맹이 없는 질의와 국회의원의 행태를 본뜬 자화자찬의 의정보고회, 부서장인 실과장을 비롯한 실무자에 대한 위압적인 태도를 보면서 대단한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초 오로지 의회를 통해서만 법이 제정되고, 의회에 의해서만 새로운 세목이 신설되고 그 부과와 징수가 의회의 감독과 승인에 의해서만 인정된다는 이 의회민주주의의 실현이 이제는 국가의 모든 통치기능, 집행기능에 관여하고 감독하다 못 해 지방행정의 골목골목까지 파고드는 풀뿌리민주주의의 결정판이라고 불리지만 이 풀뿌리민주주의의 엄청난 수혜자이자 주인공인 지방의원들에 반해 갑자기 호랑이보다도 더 무서운 감독, 아니 여우나 승냥이보다도 더 교활한 시어머니가 생긴 자신들이야말로 마른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피해자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제 행정사무감사가 끝났으니 예산안심의는 해당 분과위원회에서 담당과장과 실무자들만 불러 조용조용 예산의 사용처와 수치를 따져 계수조정만 하면 되련만 현실은 그렇지 못 했다. 심의장소에 되도록 많은 간부들을 붙잡아두는 것이 의회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고 의미 없이 시달리는 그 자리를 빠지는 것이 바로 의회를 무시하는, 즉 풀뿌리민주주의의 실현에 어긋나는 처사가 되는 것이었다.

일단 아침 10시에 심의 시작할 때 굳이 구청의 전 간부를 불러 심의개시를 선언하고 해당부서인 총무국소관 과장이 참석한 가운데 선임과인 총무과부터 심의를 하는데 총무과 한 과가 12시 점심시간을 넘어 오후 서너 시까지 거의 하루 종일이 걸리더라도 같은 국소관인 문화관광과, 재무과, 세무과, 민원봉사과의 과장들도 언제 자기 과의 심의가 시작될지 몰라 꼼짝을 못 하고 자리를 지켜야했다. 과장이 자리를 못 뜨니 계장이 보조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계장이 기다리니 구체적 자료를 가진 담당도 의자도 없이 서서 종일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공복이라는 이름의 공무원도 자신의 봉급에서 꼬박꼬박 세금을 내는, 아니 원천징수라는 이름으로 미리 떼어가는 납세자요, 국민인 이상 풀뿌리든 시락뿌리든 민주주의의 혜택을 꼭 같이 받아야 함에도 지방의원이라는 빛에 권리도 인격도 묻혀버린 그림자신세로 변해버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해의 총무과 예산심의가 한층 더 첨예하게 대립하고 지지부진 길어진 것은 바로 15개동에 균등하게 책정하는 포괄사업비때문이었다.

구 관할의 모든 도로나 하천, 산지 등이 각각 정부나 광역단체인 부산직할시 또는 산림청이나 해양수산부, 심지어 교육위원회등 관리부서가 있어 각 부서의 예산으로 설치, 유지관리를 하는 반면 지방도로나 소방도로개설이나 그에 따른 하수구나 축대 설치 등의 공사는 건설과에서, 또 임도나 산림관리는 지역경제과에서 하도록 엄격히 업무분장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골목단위의 아주 작은 소규모 공사 즉 한쪽 모서리가 부서진 측구나 파손된 측구뚜껑, 우둘투둘 걸레가 되어버린 골목길의 시멘트포장, 작은 언덕이나 절개지의 정비와 식수(植樹)같은 공사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직접 주민들을 상대하는 관할 동장이 알아서 집행하는 것이 훨씬 손쉬운 일이었다. 그 포괄사업비를 일률적으로 1천만 원씩 책정한 데 대하여 관할이 넓고 인구가 많은 암남동과 서대신4동의 구의원이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었다.

관할이 넓고 인구가 많으면 재산세나 주민세도 많이 걷고 도로나 측구도 연장이 길어 훼손이나 복구수요도 많으니 동별도 차별을 두어야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산술적 평균으로 나누는 이 공평한 방법을 인구가 적고 면적이 좁은 동의 구의원들이 아무 이의도 없이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공사할 데나 예산수요를 떠나 다른 동의 구의원은 몇 천만 원의 예산을 따 가는데 자신은 겨우 몇 백을 따간다면 동장이나 동민들의 낯을 볼 면목도 없지만 상대방의 공격을 받아 다음 선거의 당선이 보장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도무지 양보나 타협, 조정이 될 수 없는 사안하나를 가지고 점심시간을 넘어 오후까지 끝없는 논란이 이어진 것은 공사시작 5년이 넘도록 지지부진 끝이 나지 않은 아미동 대학병원 앞의 도로확장사업을 비롯한 각종 건설사업 때문이었다.

연간 10억이 조금 넘는 건설공사비로 재난우려나 심각한 교통체증 등을 감안해서 건설과에서 다음년도 시행계획을 세우고 기획감사실에서 투자심사를 해서 투자순위를 정하고 구체적 설계에 들어가면서 의회에 예산승인을 올리면 지금껏 실무자들이 밤새워 그린 설계가 몽땅 나무아미타불이 되기가 일쑤였다.

집행부의 계획대로 얼마 안 되는 예산을 <선택과 집중>의 원리에 따라 승인해주어 내년 여름 장마철에 무너질 우려가 있는 언덕이나 절개지를 보수하고 교통정체로 하루 종일 주차장신세를 못 면하는 병목도로의 병목을 넓혀, 아니 뚫어주면 좋으련만 그렇게 하다 보면 자기의 지지자와 다음선거의 표가 걸린 자기 출신지동에 단 한건의 건설공사를 따지 못한 무능한 구의원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결국 얼마 안 되는 건설예산은 각동의 하수구정비나 골목길포장으로 몇 천만 원씩이 뜯겨나간 반쪽짜리 공사가 되고 마는데 그나마 조금 규모가 큰 아미동 대학병원 앞 도로확장공사는 아미동과 토성동, 충무동등 공사구간이 물린 3개동의 의원들이 서로 자기 동 구간부터 해달라는 성화에 못 이겨 한 쪽에서 순서대로 뚫어가는 것이 아니라 동별로 공사를 쪼개니 가뜩이나 한 평에 몇 백만 원이 드는 보상비를 지출하고 보면 공사비용이 거의 남지 않아 한 동에 단 한 집이나 두 집을 헐고 불과 10미터 15미터에 그치고 마니 수백 미터에 이르는 공사구간이 언제 다 끝날지 기약조차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런 저런 묵은 감정과 지역이기주의에 사로잡힌 포괄사업예산안심의는 오후 세 시가 넘어 결국은 구청의 원안대로 1천만 원씩 균등하게 책정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소변도 볼 겸 10분간의 정회시간을 거쳐 총무과의 일반예산안은 건성으로 대충대충 넘어가 오후 4시 반이 넘어서 끝이 나고 다시 정회를 하고 회의장을 정리하여 다섯 시 10분전에 속개가 되었다.

 

이제 한 시간이면 퇴근 시간이라 올해는 어쩌면 아주 간단히 예산안 심의가 간단히 끝나겠구나 싶어 열찬씨와 계장들이 기대에 가득 찬 표정으로 속개를 기다리는데

좌석을 정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문화관광과 소관의 예산안심의를 속개하겠습니다.”

서수양 위원장이 열찬씨에게 눈을 끔뻑하며 시작을 알리는데 열찬씨는

옳지! 빨리 마치게 간단간단 답변하면 시간 내에 마무리시켜주겠구나.’

반색하며 자신도 눈을 끔뻑여 보이는데

위원장, 위원장님! 의사진행발언 있습니다.”

심한 당뇨와 천식으로 오전부터 의자에 깊이 파묻혀 눈을 감거나 고개를 푹 숙이고 잠이 들어 거의 심의에 참여하지 않고 찬반여부를 가릴 때 마지 못 해 손만 들던 서대신2동 임종열 의원이

벌써 오후 다섯 시가 넘었는데 시간이 너무 깁니다. 문화관광과소관 예산안은 내일 심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위원장을 뺀 다섯 명의 위원을 비잉 둘러보자 평소에 나이도 많을 뿐 아니라 거침없는 발언과 직선적인 성격에 주눅이 든 다른 위원들은 아예 눈빛조차 맞추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지라

그럼 정밀하고 효율적인 예산안심의를 위하여 오늘의 총무국예산안심의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임종열 의원의 발언 중에 의사담당직원이 황급히 사인펜으로 갈겨쓴 메모를 보며 서수양 위원장이 선언하자

“우-”

저도 모르게 지금껏 뒤에서 기다리던 직원들의 탄식이 터져 나오는데

여러 위원님과 집행부 과장님들 수고가 많았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위원장이 만면에 웃음을 띠자

수고했습니다.”

위원들이 악수하고 퇴장하고

수고했습니다.”

과장들과도 악수를 하고 다들 복도로 몰려나오는데

에이, 좋다 말았네. 그만 시작한 김에 해치우면 좋았을 텐데.”

열찬씨의 탄식에

문화관광과는 다음순서라 기대라도 하고 기다리고 마지막에 이름이라도 거론되었지만 우리 재무과는 뭐고 완전히 멘 땅에 박치기 아이가?”

예순에 가까운 재무과 윤상원과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재무과야 그 다음순서라 우리 보다 낫지요. 맨 마지막 우리 민원봉사과는 내일 종일 기다려도 못 할 것이 뻔하고 우짜면 모래까지 입도 달싹 못 하고 기다릴 판인 걸요.”

황지연 민원봉사과장도 혀를 끌끌 찼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