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2호-특집 : 의령 회향기】 병막病幕의 주인들 - 황인
【장소시학 2호-특집 : 의령 회향기】 병막病幕의 주인들 - 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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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3.17 07:50
  • 업데이트 2023.03.21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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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향기

 

병막病幕의 주인들

황 인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의령 읍내다. 읍내는 북쪽의 봉무산과 남쪽의 남산 사이에 놓여 있다. 읍내에는 동서로 길게 신작로가 벋어 있다. 동쪽으로 가면 무전, 정암이다. 무전 방향의 길은 신반을 거쳐 대구로 향한다. 정암으로 가는 길은 남강을 건너 함안을 지나 마산에 닿는다. 남산의 서쪽 골짜기를 따라 난 길은 화정을 거쳐 진주로 향한다. 서쪽으로 뻗은 신작로는 가례를 거쳐 칠곡에서 곧장 합천으로 향하거나 왼쪽으로 돌아 진주로 간다.

무전과 정암에서 읍내로 들어오는 동쪽 입구는 삼거리다. 동네 이름은 소입所入이다. 우리말로는 ‘바들’이라 했다. ‘바’에 들어선다는 뜻이다. ‘바’라고 함은 사람이 살아가는 곳, 사건과 현상이 발생하는 곳을 뜻하는 소所, 즉 장소場所의 순우리말이다. 바들은 없음에서 있음으로 변환되는 경계지점이다. 옛날 의령 사람들은 바들을 기준으로 하여 바들의 바깥은 성 밖 혹은 야생野生, 바들의 안쪽은 성 안 혹은 인공人工이라는 인식을 가졌던 듯하다.

바들에서 정암, 함안을 거쳐 마산으로 가는 신작로의 동쪽 들판은 마들이다. 신작로의 서쪽, 읍내에 가까운 들판은 새들이다. 마른 들판이란 뜻의 마들은 큰물이 들지 않아 농사가 잘되었다. 의령 읍내 안쪽을 흐르는 ‘큰 도랑’이 원래는 의령천이었는데 조선시대에 물길을 남산 쪽으로 돌렸다. 물길 안쪽으로 새로이 들이 생겨 새들이라 했다. 그래서인지 새들은 물기가 많고 물이 고이는 소沼도 많았다. 소 근처에는 풀이 많이 자랐다. 풀 사이로 자주 뱀이 나타났다.

바들 안으로 좀 더 들어가면 의령성宜寧城이 있다. 의령성의 동서 길이는 반 마장 정도 된다. 동서로 길게 벋은 신작로는 성의 남쪽 끝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 예전에 성문이 문방구점 일육상회 근처에 있었다는데 내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성벽의 흔적은 아직도 여기저기 많이 남아 있다. 해자垓子 역할을 했던 개애골에서 옥골로 흐르는 개울은 지금도 물길이 마르지 않았다. 나의 집은 옥골에서 동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성 밖의 신작로에 있었다.

의령 읍내를 가까이 흐르는 도랑이 있다. 의령천의 샛강 역할을 하는데 이름은 그냥 ‘큰도랑’이다. 큰도랑에서 아침에는 낯을 씻고 낮에는 빨래를 했다. 가을이 되면 아이들은 미꾸라지를 잡았다. 큰도랑의 상류는 시장터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고 술집이 많았다. 큰도랑에다 가두리를 넣어 그 속에 잉어를 산 채로 가두어 놓았다가 손님이 오면 곧바로 회를 떠서 술안주로 내놓았다. 큰도랑의 맑고 시원한 물속의 가두리가 냉장고나 수족관 역할을 했다.

읍내 중심의 신작로 동쪽 끝에 있었던 중동파출소를 지나면 큰도랑과 둑길이 나타난다. 큰도랑의 다리를 건너면 동쪽 넓은 들, 새들이 시작된다. 새들을 동서로 관통하는, 트럭이 한 대 정도 다닐만한 제법 큰 농로農路가 있었다. 벌판에는 집이 두 채 있었다. 농로의 남쪽은 도살장이다. 대대손손 도살의 업을 맡은 가문이 따로 있었다. 농로의 길가 북쪽에 병막病幕이 있었다. 여기서 읍내의 중심까지는 불과 한 마장이다. 그러나 이곳은 이미 감각적으로 읍내와 너무나 떨어진 바들 바깥 야생의 세계다. 읍내가 삶과 생활의 장소라면 여기서부터는 삶과 죽음이 뒤엉킨 정체불명의 공간이다.

나는 주로 친구들과 읍내에서 놀았지만 가끔은 새들을 지나는 농로를 걷기도 했다. 봄의 ‘가정 실습’에는 보리 이삭을 줍기 위해서, 가을의 ‘가정 실습’에는 가을걷이를 하는 논을 찾아다니며 수확의 특식인 팥밥과 소고기국을 얻어먹으러 동네친구들과 함께 이 길을 따라 걸었다. 논 사이로 좁은 수로들이 있어 밤에 횃불을 들고 송애(붕어새끼)를 잡으러 다니기도 했다.

병막은 예전에 읍내에 호열자(콜레라) 같은 돌림병이 돌면 감염된 환자를 격리하는 곳이었다. 아무런 처방을 받지 못하는 환자는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병막은 삶에서 점점 더 죽음으로 기울어 가는 안타까운 시간을 담아내는 장소였다. 내가 자랄 때에는 병막의 쓰임새는 이미 사라졌지만, 병막이라는 이름과 집은 남아 있었다. 자신이 살던 집에서 불과 한 마장 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영영 가족을 만날 길 없이 쓸쓸하게 죽음을 기다렸던 사람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팠다. 도살장도 병막도 모두가 죽음과 관련된 곳이라 이곳을 지날 때마다 어린 내 마음이 어두워졌다.

병막은 자그마한 초가 토담집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본 병막은 거지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병막에 들어간 적은 없으나 그 안을 훔쳐보기는 했다. 방이 하나 있었을 게다. 부엌으로 보이는 공간이 있었으나 인기척은 드물었다.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걸 본 적도 없다. 창문이 없어 내부는 언제나 컴컴했다. 물론 전기 따위의 문명은 있을 리가 없다. 지독한 어둠 속에서 도무지 한 가족으로는 보이지 않는 아이들과 어른들이 혼거를 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가족 단위의 삶의 방식이 아닌 닥치는 대로 뒤엉켜 사는 원시적인 형태의 잡거였다. 병막의 주인은 수시로 바뀌는 듯했다. 그들은 대를 이어온 의령 토박이들이 아니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유랑민들이었다.

1967년, 내가 우리 나이로 열 살 때다. 우리 집에는 거의 매일 저녁 저녁상을 물리고 난 시간에 병막의 아이들이 찾아왔다. 우리 동네와 우리 집을 찾는 아이는 두 명이었다. 칠팔 세로 보이는 아이의 이름은 모택동이었다. 그보다 두 살 밑으로 보이는 동생은 이름이 부자였다. 모택동과 부자, 행색은 초라하나 이름은 거창했다. 한 아이는 중국의 최고 권력자 모택동, 한 아이는 삼성의 창업자 이병철을 연상케 하는 부자라는 이름이다. 진짜 이름은 뭔지 모르겠다. 아예 이름이란 게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둘 다 성격이 밝았다. 동생은 형의 말을 잘 따랐다.

아이들은 군인들이 쓰던 반합을 들고 나타났다. 아이마다 반합을 2개 이상 들었다. 반합에는 반찬통과 밥통이 있었다. 얻어가는 반찬은 매일 달랐다. 김치일 때도 생선일 때도 있었다. 밥은 찬밥이었다. 얻은 밥과 반찬을 병막으로 들고 가서 어른들과 함께 먹는 모양이었다. 병막 사람들의 생존과 영양은 이 아이들의 활약상에 달렸다. 비가 올 때는 우리 집 처마 밑에서 둘이서 옹색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두 아이가 나누는 대화가 방 안에서 다 들렸다. 그러면 나는 나가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래를 부르라 하면 주로 동생인 부자가 노래를 불렀다. 도무지 내용을 알 수 없는,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다. 각설이 타령은 아니었다.

이 해에 나는 의령초등학교 3학년생이었다. 병막의 아이가 우리 반으로 전학을 왔다. 이름은 이종열이다. 가냘픈 몸매에 중키보다 살짝 작았다. 눈동자는 좀 노랬다. 머리카락 역시 조금 노랗고 약간 곱슬했다. 얼굴도 몸매도 마네의 그림 ‘피리 부는 소년’을 닮았다. 종열이는 모택동, 부자와는 전혀 다른 행색이었다. 종열이는 단정했다. 비록 낡았지만 까만 교복을 입고 있었다. 병막의 아이가 제대로 된 이름이 있다는 것도, 학교에 다닌다는 것도 신기했다. 종열이는 도무지 말이 없었다. 웃지도 않았다. 우리와 어울리거나 장난을 치지도 않았다. 학교 말고 읍내의 시장터나 길 등 다른 데서 마주친 적도 없다. 심지어 병막에서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여름이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친구들과 함께 물놀이하러 가던 의령천에서 만난 일도 없다. 함께 소풍을 간 기억도 없다. 물론 종열이는 밥을 얻으러 다니지도 않았다. 종열이 아버지가 담임 선생님을 만나러 학교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거지라 하기에는 너무나 정돈된 행색이었다. 어쩌다 그들이 병막에 살게 되었는지 모른다. 우리 반 아이들은 가끔 단체로 돈을 모아 연필, 공책 등 학용품을 사서는 종열이에게 전했다.

병막의 아이들로는 종열이와 그 밑의 동생 격인 모택동과 부자 그리고 종열이 형이 있었다. 종열이를 뺀 나머지 세 사람은 읍내에서 자주 마주쳤다. 그들은 서로 친동생, 친형이 아니다. 모두가 다 다른 체형에 다른 얼굴이었다. 종열이 형의 이름은 모른다. 제대로 학교를 다녔으면 중학교 일 학년생쯤 되었으리라. 그는 이미 아이가 아니었다. 키가 컸다. 시커먼 얼굴은 기름을 칠한 듯 번들번들했다. 서양인처럼 윤곽이 뚜렷했다. 근동에서는 보기 힘든 매우 낯선 골상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사람은 몇 없다. 두툼한 버킷햇이 얼굴을 거의 다 덮고 있었다. 모자 사이로 살짝 보이는 눈은 무서웠다. 어른처럼 세상을 제법 오래 살아 이미 모든 걸 다 아는 듯한 눈빛이었다. 한여름에도 온몸을 가리는 낡은 망토를 걸치고 장화를 신고 다녔다. 모자도 망토도 많이 찢어진 것이었다. 어깨에 커다란 포대를 매고 다녔다. 포대 속에는 살아 꿈틀거리는 뱀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땅꾼이었다. 들로 산으로 다니며 뱀을 잡아서 팔았다. 수렵경제인이자 시장경제인이었다. 병막에서는 유일하게 분명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해 여름날이다. 우리 집 앞 신작로 백조다방 앞 사거리에 그가 뱀 포대를 들고 나타났다. 사람들이 제법 오가는 길이다. 그가 나를 보고는 아는 체를 했다. 그는 내가 종열이와 같은 반임을 알고 있었다. 그가 망토를 벗었다. 소년답지 않은 근육이 드러났다. 몸이 검었다. 땀이 났는지 번들거렸다. 나를 향해 서서는 포대에서 커다란 뱀을 한 마리 꺼내었다. 나는 무서웠지만 놀라지 않은 척했다. 뱀은 그의 말을 다 알아듣는 듯했다. 큰 뱀을 몸에 감았다. 허리에도 감고 팔목에도 감았다. 큰 뱀의 목을 붙잡고는 뱀에게 물릴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춤을 추었다. 태양은 그날따라 더 뜨거웠다. 흐르는 땀 때문인지 뱀이 자꾸 미끄러졌다.

그 춤은 뱀과 사람이 함께 추는 희한한 듀엣이었다. 무섭고도 강렬한 춤이었다. 압도적인 퍼포먼스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종열이의 형이 추는 춤은 단 한 사람의 관객, 나를 향해 있었다. 그의 춤에는 동생 종열이를 잘 부탁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나도 그쯤은 눈치를 챘기에 무서움을 참고 끝까지 춤을 지켜보았다. 춤이 끝났다. 작대기로 툭 치니 뱀은 도로 포대 안으로 얌전하게 쑥 들어갔다. 그는 다시 망토를 걸치고 포대를 챙긴 다음 나를 향해 씨익 웃고는 사라졌다.

그해 여름방학 때 우리 반 아이 중에 두 명이 죽었다. 무전에 살던 이용득은 장티푸스로 죽었다. 검은 얼굴에 입이 앞으로 나오고 입술이 두툼한 아이였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나서 그의 할아버지가 우리 반 담임을 찾아와서 복도에서 용득이의 죽음을 전했다. 용득의 할아버지는 반장인 나를 불러내어 슬픈 눈빛으로 자기 손자의 손을 잡듯 내 손을 꼭 잡았다. 외시의 우물가 집에 살던 여자아이는 정암 남강에서 빨래하다 물에 빠져 죽었다. 나도 잘 아는 집안의 여자아이였다. 얼굴이 하얀 도시풍의 얼굴이었다. 우리 집 앞으로 등하교를 했기에 보면 아는 체도 했다. 그의 고모가 아이가 죽었다고 우리 집으로 달려와서 울었다. 읍내의 시발택시가 그 아이의 부모를 싣고 시신을 찾으러 급히 정암으로 갔다. 멀쩡한 집안의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이 예사로 가끔 죽던 시절이었다. 그해 여름, 그 소란 속에서도 병막의 종열이는 의연했다.

종열이와 내가 함께 한 시간은 일 년이 채 안 된다. 4학년이 되었을 때 종열이도 그의 아버지도 이미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없었다. 반합을 들고 나타난 모택동에게 물어보니 종열이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했다. 모택동과 부자도, 뱀 잡는 형도 몇 해 지나지 않아 병막을 다 떠나버렸다. 나중에는 병막의 주인들 모두가 다 사라져버렸다. 그들이 떠나간 주인 없는 병막 안에는 언제부터인가 상여가 놓여 있었다. 병막은 어느새 상엿집이 되어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삶으로 건너왔다가 다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장소로 돌아간 병막이었다. 읍내 바깥 새들의 병막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 일대에는 남산초등학교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더 큰 읍내가 되었다.

나와 동갑인 종열이, 나보다 서너 살 아래인 모택동과 또 그보다 두 살 더 아래인 부자, 그리고 나보다는 네 살쯤 위인 종열이의 형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아가고 있을까. 생명감이 넘치는 어느 읍내에서 건강하게 잘 살아가고 있기를 빈다.

 

황인

황 인

의령 출신. 미술평론가. 전시기획,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남. 문학·무용·음악 들 다른 갈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김. 현재, 중앙일보에 ‘예술가의 한끼’ 연재 중. inhwang@hanmail.net

<jiook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