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새 천년, 새 족보①
신정으로 불리는 연초와 구정으로 불리는 음력설날 사이의 한 달 정도가 공무원세계에서는 가장 여유롭고 포근한 시절이기 마련이었다. 결빙 때문에 토목, 건축을 비롯한 모든 옥외공사가 중단되는 이 기간 동안 비록 날씨는 춥지만 모든 공무원들은 난방이 잘 된 사무실에서 단지 새해의 업무계획을 세우는 정도로 시간을 때우면 되는 것이었다. 일 년 농사의 절반이라는 연초의 업무보고마저 구청장의 신임이 두터운 편이라
“알았어요. 우리 이과장을 중심으로 계장과 직원들이 꽁꽁 뭉쳐 지난 한 해처럼 올해도 각종 축제는 물론 전통과 민속을 살리는 문화사업, 구정홍보와 보도관리, 광고물관리까지 추호의 빈틈도 없이 잘 처리해주기 바랍니다. 물론 코앞에 다가온 전국노래자랑도 차질 없이 수행하고요. 수고했어요.”
일 욕심 많기로, 철두철미하고 까다롭기로 부산시바닥에 소문난 김모구청장이 단 한마디의 티끌을 잡거나 까탈을 부리지 않고 단번에 업무보고를 마치는 바람에 일거에 직원들의 표정이 밝아지고 태도들이 느긋해졌다.
마치 교사나 학생이라도 된 듯 그렇게 주어진 방학 아닌 방학기간 동안 열찬씨는 모처럼 행정업무가 아닌 개인 업무에 몰두할 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새 족보의 각종자료를 정리하고 도표를 만들고 해설을 곁들인 전체적 윤곽을 완성하는 일이었다.
먼저 발간 250년이 넘은 영조24년의 무진보와 80년이 가까운 1924 갑자보는 물론 25년이 된 1976년 대동보상에 수록된 같은 문중원들의 기록들을 복사하고 최초의 경주가씨 시조에서 여러 갈래의 가씨들이 갈라져나간 분적도(分籍圖)와 남은 경주가씨에서 다시 여러 갈래로 파(派)가 갈린 분파(分派)도를 작성하여 큰 흐름을 잡았다.
다음 일반평민에게도 성씨가 통용되기 시작한 고려중엽 이후 중시조를 시작으로 각 대를 이어온 세계(世系)를 작성하고 5대조인 입향조 반동선생 이택할아버지부터는 남자들을 중심으로 씨족도를 작성하는데 그게 보통일이 아니었다.
먼저 33대 이택할아버지를 정점으로 그 아래 두 아들 복성,복벽을 옆줄을 그어 나란히 기재하고 둘째 복벽은 반곡계로 기록하여 언양계와 구분하고 다시 언양계의 복성할아버지의 세 아들 식석, 정석, 무석 세아들과 그 아래로 33대 건영, 배영, 제영, 경영등 4형제와 그 아래로 자신의 할아버지가 되는 또 하나의 복성할아버지와 큰아버지 선출, 아버지 기출씨는 물론 이미 8가족이 된 36대가 10가족이 되는 37대 자신의 세대까지 대물림이 빠른 장손계열의 40대의 9명에 이르기까지 총 8대에 걸친 근 100명을 가로세로로 연결된 도표를 만드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라 돋보기를 끼고 종일을 끙끙거리는 것을 보고
“아이구, 우리 과장님, 글 잘 쓰고 컴퓨터 잘 하는 신세대과장으로 소문이 자자하더니만 그 쉬운 파워포인트 하나를 못 배워서 이 고생을 하시는구나.”
혀를 끌끌 차던 서무 진미덕씨가
“과장님, 이리 나와 보이소!”
하고 자리에 않아 자판을 바로하고 마우스를 쥐더니
“아따 회전의자가 편하기는 편하군. 나도 어서 출세해서 사무관이 되긴 되어야겠군.”
농담을 던지더니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자, 끝났습니다. 혹시 빠진 사람 있는지 확인해보세요.”
하고 물러났다.
다음 가전족보인 무진보, 갑자보, 1976년 대동보의 시조에서 중시조를 거쳐 입향조와 현 문중원에 이르는 조상들의 이름이 수록된 모든 페이지를 복사해 붙이고 마지막으로 열찬씨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구체적인 직업과 사망원인이 기록되고 양자나 후처로 들어오거나 남편이 죽어 재가(再嫁)를 한 별로 떳떳하지 못한 기록은 물론 묘지가 있으면 그 정확한 위치, 묘지가 명시되지 않은 경우는 선장(仙葬)이라 미화된 화장(火葬)임까지 밝힌 새 족보를 붙이니 약 60페이지로 대망의 2000년 새 족보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 정작 족보의 중심이 되는 주로 한문으로 이루어진 세보부분은 젊은이를 비롯한 현생의 문중원들이 도무지 잘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 해설서에 해당하는 부록을 작성하였다. 하다 보니 배보다 배꼽이 크다고 무려 140페이지나 되었는데
먼저 족보에 대한 개관으로 씨족과 족보에 대한 그 개념과 남의 족보를 연구하는 보학(譜學)이 있을 정도로 혈통, 문중, 족보에 대한 조상들의 집착과 족보의 역할을 설명하고 다음 우리 집안의 유래로 신라 이후의 상고시대, 고려 말에서 조선개국과 임진왜란을 거쳐 입향조가 언양으로 들어온 중간시대, 그리고는 현재에 이르는 근대사에 이르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부침을 같이 한 문중의 생활상을 대충 설명하고
다시 우리 집안의 족보란 제목으로 분파과정과 족보편찬사, 현행족보의 미비점과 문제, 신 족보의 이의와 발전방향을 설명했는데 이 부분이 열찬씨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곳이었다. 예를 들어 북간도로 이주하고 대가 끊어진 부분에 단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자손으로 등장하여 수많은 아들과 손자들을 등재하고 난데없는 지서방, 어서방등 사위들까지 실린 것으로 보아 1976년 대동보발간당시 살림은 풍족하나 족보가 없어 근본 없는 어느 가씨가 대전의 종무(宗務)소로 가서 편집하는 사람에게 향응을 베풀고 슬쩍 끼어 넣은, 말하자면 족보를 산 부분이 다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원칙대로라면 당장 대전의 종무소로 가서 사실을 구명하고 남의 족보에 끼어든 가짜 종씨를 찾아 파문(破門), 그러니까 기록을 삭제하고 종무소관련자를 파직은 물론 형사고발까지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자신의 집안마저도 중간 중간 주거기록이나 묘지기록이 명확하지 않고 심지어 공백상태도 발견될 뿐 아니라 둔터에서 서당을 열면서 향청의 별감을 지냈다는 입향조 이택할아버지의 사망원인마저도 규명이 안 되는 상태에서 반만년 긴 역사를 외침과 흉년, 기근과 질병에 시달리면서 때로 풍비박산 집안이 흩어져 유리걸식을 하다 좋은 시절을 만나면 또 어디선가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을 것으로 짐작한 자신의 핏줄인들 뭐 그렇게 장할 것이 있으라는 생각에 쓴웃음을 지으며 그만두기로 하고 새 족보는 구 족보에서 도출된 무자(無子), 유아사망, 절손으로 대를 잇기 위한 세계(世系) 즉 양자들이기, 가세의 쇠락으로 고향을 등지거나 국외이주로 기록이 끊기거나 상식적으로 한 세대가 대강 2,30년의 간격이련만 100년에 7,8세대가 또 2,3백년에 5,6세대가 기록된 경우 등 기록의 부실은 물론 임진왜란이후 실제로 벼슬을 하지 않고 납속(納粟)이란 미명으로 재정이 피폐한 관아에 곡식을 바치고 벼슬을 한 경우도 마치 실제로 벼슬을 한 것으로 표시하거나 먹고사는 것 마저 넉넉잖은 시골선비 또는 농민이었음에도 저 먼 전라도에 사는 당시의 이름난 거유와 교우한 것처럼 기록한 기록의 미화, 비현실성과 착오, 오기를 시정하기 위한 발전방향으로
0. 알기 쉬운 한글로 표기한 사실적 생활기록
0. 호적, 지적공부와 일치되는 공인된 기록
0. 현대인이 독서습관에 맞는 가로쓰기와 좌철편집
0. 컴퓨터디스켓의 보관과 인계인수
를 염두에 두고 새 족보를 만든 의의를 천명한 것이었다.
이렇게 며칠이나 걸려 씨족현왕이라는 타이틀 아래
0. 혈족현황과 촌수조견표
0. 주거분포도와 주소 및 전화번호 일람표
0. 묘지현황과 분포도
0. 직업과 생활상등을 서술하는데
마침 새해인사차 들렀던 부산일보사의 정월식 기자가
“과장님께서는 직원들 다 놔두고 뭐 하신다고 새해부터 컴퓨터에 매달리십니까? 혹시 시상(詩想)이라도 떠오른 겁니까?”
하며 컴퓨터를 들여다보다
“어라? 주거분포도에 묘지분포도라? 어라! 촌수조견표가 다 있네. 과장님 대체 이게 다 무엇 하는데 쓰는 것입니까?”
눈이 똥그래져서 묻는지라
“이거 참 부끄러운 이야긴데 서기 2000년 새 밀레니엄을 맞아 집안의 족보를 신세대들이 알기 쉬운 한글이 병기된 가로쓰기의 새 족보를 만들려고 하는데 지난 해 중학교국어교사이던 손위의 형님이 돌아가시고 아무도 한문을 하는 사람이 없어 부득이 제가 비교적 업무가 한산한 신정과 구정사이에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족보에 주거분표도 묘지분포도와 일람표가 들어가는 경우는 아마도 전무후무할 것입니다. 그리고 천하장사 돌려붙기 대진표처럼 이렇게 모눈종이처럼 가로세로로 촌수를 찾아볼 수 있는 조견표는 참 과장님다운, 아니 시인다운 기발한 착상입니다. 과히 특종감입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