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새 천년, 새 족보③
가끔씩 들려보는 민속생활전시공간도 언양의 상찬씨가 직접 땋은 등지게와 짚신, 퇴락한 어느 농가의 헛간에서 찾아낸 곰팡이가 피고 구멍이 뚫린 봉태기로 불리는 멱둥구리와 씨오쟁이, 볏섬들이 추가되고 화로 젓가락, 놋 주걱을 비롯한 부엌살림도 점점 늘어나 옛 정취를 더했다.
지난 한해를 돌이켜보면 무엇이든지 문화자만 붙이면 문화관광과의 업무 같이 느껴지는 묘한 시대적 패러다임과 끊임없이 찾아드는 문화예술계인사들을 늘 호의적으로 대하며 그 잡다한 분야에 한결같은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김모구청장의 취향에 따라 참으로 많은 일들을 추진한 것 같았다.
그 중 서구의 노래 <남항등대>, 국립대 음악교수와 두루마기를 입고 고깔을 쓴 적막하면서도 끈끈한 목소리의 가수 김태곤의 기묘한 조합이 몰고 온 대중적 전파와 인기몰이실패를 제외하고는 각종 축제를 비롯한 여러분야가 대체로 무난히 이루어진 셈이었다.
이제 가깝게는 보름후면 다가오는 정월대보름의 송도달집축제, 멀리는 <송도바다축제>와 <구덕골문화에술제>를 준비하고 구덕문화장터, 문화의집 민속생활공간 같은 이미 벌여 논 사업의 지속적, 발전적 추진, 그리고 어떻게 구체적인 모습을 갖출지 아직 명확하지가 않은 구덕수목원의 관련분야를 담당 또는 협조하는 일 정도였다.
“그래 바지선차용은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나요?”
“예, 암남동 김종태 동장이 송도어촌계장을 통하여 알아보고 있답니다.”
“어촌계장은 왜? 기껏 몇 톤 아니면 몇 십 톤 어선 갑판에 어떻게 달집을 짓는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 어촌계장이 그 쪽도 잘 알 뿐 아니라 행사당일 날 어선을 이용한 해상퍼레이드도 준비할 겸해서요.”
“해상퍼레이드라? 그 참 좋은 아이디어군.”
“예. 제 1회 송도해상달집놀이라는 커다란 플레카드도 걸고 폭죽도 터뜨리고 말입니다.”
“그래. 그런데 배 한 적에 커다란 플레카들 걸기보다는 여러 척의 배에 <제 1회 송도해상달집축제>를 아주 크게 쓴 글자 한 자씩 걸고 퍼레이드를 벌이면 어떨까?”
“그것도 좋겠네요. 어선 열한 척이 동원될지는 몰라도.”
설날연휴를 앞두고 그 큰 구청건물에는 찾아오는 민원인도 없고 관급공사와 생활보호비등 각종 예산지출 외는 특별히 챙길 일도 없었다.
남자직원들은 먼 길을 떠나 귀향할 도로사정을 우려하고 시집살이 여직원들은 차례상준비와 명절스트레스를 걱정하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이 느긋한 휴식을 즐기며 퇴근시간만 기다리는 판이었다.
같은 부산인 구포의 처갓집 가기보다도 시간이 덜 걸리는 열찬씨와 집도 부산인 데다 기독교인이라서 아예 제사도 지내지 않는 고명석계장이 연휴에 개장하는 문화장터를 둘러보기로 하고 장사가 좀 될지 걱정하다 어느새 관심사가 대보름 달집행사에 이르러 이야기가 길어지고 있었다. 이미 책상을 치우고 지독하게 체증이 심한 남해고속도로로 전남 고흥까지 차례를 지내러갈 태세인 담당 정병진씨까지 다시 주저앉아 한창 의논 중이었다.
“그래 달집 만들 자재, 화목이랑 새끼나 짚은 다 구했는가?”
“예. 송도번영회에서는 용왕제를 맡고 부녀회에서는 오곡밥을 맡고 통장연합회와 새마을지도자연합회에서 달집제작을 맡았는데 자재인 소나무기둥과 달집을 엮을 대나무와 솔가지, 집 등은 김종대전의원이 고향 고성에서 다 구해오기로 했답니다.”
“그 양반 독실한 크리스천이 아닌가?”
“신앙을 떠나서 마을 일, 특히 건설업자답게 무엇을 만드는 일에 관심이 많지요. 또 친형인 김수성 새마을금고 이사장이 해마다 축관(祝官)을 맡았고요.”
“그 양반 손끝이 야물어 걱정이 없겠구먼.”
그러고서 그 옛날 대보름이 되어 아침 일찍 쌀, 보리, 팥, 조, 수수를 넣은 오곡밥과 오곡보다도 더 숫자가 많은 나물취, 미역취, 삿갓대가리, 까막발, 다래 순이 들어간 묵나물에 아주까리이파리와 물미역, 톳나물, 지게꼬리, 모자반에 민물 몰까지 열 가지가 넘는 나물과 두부를 곁들인 생선찌게로 한가득 차린 대보름 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머니 명촌댁이 문종이를 가족 수 만큼 잘라 촛불에 붙여 손으로 받쳐 태우면서 불꽃이 사그라질 때까지 <아아들 아부지의 병환이 낫고>, <우리 집안 원질인 큰 아들 백찬이도 몸 성히 돈을 잘 벌고>, <작은 아들 열찬이도 공부 잘 하고 아부지 심부름 잘 하고 농사는 물론 나무도 잘 하고> 또 막내 백찬이도 운운 7남매의 자식을 하나하나 빌 때까지 장대회충이 꼬르륵거리는 배를 주무르며 시장기를 참다가 황급히 아침을 먹고
“달집에 불이야! 짚이나 새끼를 좀 주소!”
“달집에 불이야! 짚이나 새끼를 좀 주소!”
되도록 많은 집의 오곡밥을 얻어 측간에서 먹으면 한 해 동안 병을 않고 재수가 좋다는 말에 따라 아주 어린 아이들이 바가지를 들고 집집이 도는 동안 어른들이 키에 밥을 담아 소에게 먹이며 저만 대보름 별식이 없어 <개 보름 쇠듯 하며> 흘낏대는 개를 쫓았다.
마을의 청년들이 봉꼴산이나 멀리 간월까지 가서 달집에 쓸 솔가지를 베어오는 동안 달집을 엮을 새끼와 지붕을 덮을 이엉을 만들 짚을 구하는 것을 맡은 열 살 전후의 아이들이 집집이 돌아가며 짚과 새끼를 구해 오면 이제 어른들이 나설 차례였다. 오전 내내 신명나게 풍물을 벌이며 마을을 한 바퀴 돌며 마신 막걸리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술 냄새를 푹푹 풍기는 중장년들이 새끼를 꼬고 이엉을 엮는 동안 젊은 장정들이 나뭇가지를 날라 와 뼈대를 세우는 사이 어서 해가 지고 달이 떠 달집에 불을 붙일 시간을 기다리며 아이들은 오후 내내 다이꽁, 깡통차기, 가이리를 하면서 놀았다.
겨울방학 내내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는커녕 매일 아침에 밥을 사서 동산이나 간월산에 가서 나무를 한 짐 하고 시간이 많이 남으면 진장이나 각골에 가서 진달래뿌리인 꽃대를 또 한 바지게 캐 와야 하고 날씨가 매우 흐리고 추운 <샌날진> 날에도 가마니를 칠 짚을 찧거나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의 귀를 베고 꿰매느라 하루도 놀 틈이 없던 열찬이도 대보름 날 만은 또래들과 어울려
“달집에 불이야! 짚이나 새끼 좀 주소!”
소리 지르며 돌아다니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점심 먹고 벌어지는 각종 놀이에는 좀체 끼어들기도 어려웠지만 어쩌다 끼어들어도 영 어울리지가 않았다.
맨 먼저 시작하는 <가이리>란 놀이는 열찬이의 아래채 뒤이자 영관이네 삽짝 앞인 반농댁에서 배추를 심는 작은 밭에서 벌어졌다. 밭고랑을 경계로 하여 마주보고 선 둘이 서로 상대가 넘어오는 것을 막으며 상대방의 진영으로 넘어가면 이기는 게임인데 단순히 힘이 없거나 동작이 느리기보다도 워낙 운동신경이 무딘 열찬이는 상대가 이리저리 모션을 쓸 때마다 제풀에 넘어지는 바람에 거의 이기는 법이 없었다.
또 구멍뚫인 깡통에 자갈을 넣고 쭈그려 마당가운데에 놓고 숨바꼭질을 하다 누가 술래 몰래 깡통을 차 소리가 나면 이미 잡혔던 아이들까지 살아나 다시 게임이 벌어지는 깡통차기에 열찬이가 한번 술래가 되면 도대체 벗어나지를 못 해 싱거워서 그만두기도 했다.
그 다음 벌어지는 놀이로는 나무로 만든 앉은뱅이 스케이트를 타는 일이었는데 굵은 소나무를 잘라 굽을 대고 판자로 발판을 덮은 다음 굽에 철사로 날을 붙이는 스케이트를 만들 솜씨가 없는 열찬이는 자주 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쩌다 구경사마 한 번씩 얼음판에 나가면 스케이트를 탈 때 쓰는 긴 송곳으로 꽁꽁 언 빙판의 한 구석을 열심히 쪼아 마침내 구멍이 나고 그렇게 부서져서 동동 뜨는 얼음조각이 다시 얼어 얇고 잘 부서지는 <고무얼음>이 되게 하고 모르고 지나가던 아이들이 빠져 젖은 발을 녹이느라고 쩔쩔 매는 것을 보고 하하 웃으며 놀리는 악취미를 가진 악동 영호와 사촌 영관이가
“오늘은 열찬이 니가 웬 일이고? 해가 서쪽에 뜨겠다.”
하면서 스케이트를 빌려주어 발판에 올라앉은 열찬이
“여차!”
송곳으로 빙판을 찍으며 나아가려는 순간 바로 중심을 잃고 나뒹구는 것을 보며.
“열찬이 임마가 오는 날은 고무얼음 만들 일도 없다. 덩덕꾼이 열찬이 야가 바로 김희갑이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사촌끼리 히히 웃으며 하나는 끌고 하나는 밀면서 열찬이를 한참이나 태워주면서
“열찬이 니가 와 천 날 만 날 나무나 하고 책이나 보는지 알겠다. 우리 맨시로 날마다 수께또 타다가는 무르팍이 어데 남아나겠나?”
하며 웃었다.
이제 해가 설핏해 오래잖아 달집에 불일 붙일 두어 시간 전쯤에는 마을아이들이 다 모여 베이스가 셋 밖에 없는 야구 <다이꽁>경기를 시작했다.
투수가 따로 없이 스스로가 눈앞에 공을 던져 올리고 대나무로 만든 배트로 공을 치는데 홈과 1루, 2루를 연결해 3각으로 베이스를 지키고 바깥쪽에는 아이들이 모이는 수대로 편을 갈라 다섯이든 아홉이든 넓게 퍼져 수비를 하는데 타자가 친 공이 그 수비수들을 모두 넘어가면 홈런인 다이꽁이 되는 경기였다. 어쩌다 또래들과 어울려 멤버에 들어가기는 해도 수비수로서 뜬공을 잘 잡기는커녕 자신의 공격차례에도 배트에 공을 잘 맞히지 못 해 땅바닥에 공이 떨어지면
“한 찜!”
또 떨어지면
“두 찜!”
마침내 세 번째 떨어지면
“세 찜! 죽었다!”
이렇게 아웃이 되어 싸늘한 감촉의 고무신에 구멍이 뚫린 양말을 신은 언 발로 논두렁에 서서 한참이나 벌벌 떨다가
“야, 다이꽁이다! 다이꽁!”
좀 짓궂기는 해도 모든 놀이에 소질이 있는 이까리장사 수동댁 아들 영호가 홈런격인 다이꽁을 치면 그동안 죽었던 아이들이 모두 다시 살아나곤 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