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425) 제5부 열찬씨의 전성시대 - 제17장 새 천년, 새 족보④
대하소설 「신불산」(425) 제5부 열찬씨의 전성시대 - 제17장 새 천년, 새 족보④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3.03.28 16:49
  • 업데이트 2023.03.27 16: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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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새 천년, 새 족보④

 

좀 짓궂기는 해도 모든 놀이에 소질이 있는 이까리장사 수동댁 아들 영호가 홈런격인 다이꽁을 치면 그동안 죽었던 아이들이 모두 다시 살아나곤 했다.

 

둘째 순찬씨가 김해로 이사하기 전 모처럼 아이 둘을 업고 친정에 와서 아직 어린 금찬이, 덕찬이에 막내 백찬이까지 데리고 앞세메에 나와 구경을 하다

아이구, 우리 열찬이는 뭐 하나 잘 하는 기 없구나! 아가 저래 어둔해서 뭐해 묵고 살겠노?”

혀를 끌끌 차는데

그래도 공부는 잘 한다 아이가? 군소리 없이 나무도 잘 해오고.”

바로 손위 누나 덕찬이가 애가 닳아 말하는데

아이다. 저래 봐도 아부지 닮아서 기억력이 좋다. 마실사람들이 풍물을 놀면 축담에 앉아서 장갱이를 까딱까딱 하면서 여류화산에 지신아, 이 집 지은 대목아 하는 지신 밟는 소리를 하나도 안 빼묵고 다 한다 아이가?”

그래? 우짜면 밥은 안 굶겠구나. 안 그래도 우리 아부지는 아아가 다부지지 못 하고 독하지도 못 해서 군에 가면 맞아죽는다고 걱정이 태산인데.”

 

세 누나가 걱정하는 줄도 모르고 인중에 시커먼 코를 문 열찬이는 이제 집집이 지신을 밟고 동사 앞 복걸을 지나 들 한가운데의 당수나무에서 마을의 연장자인 일촌댁 노부부가 동제를 지내고 나온 것을 신호로 달집을 태우는 앞세메 앞으로 오는 것을 기다리며 그 가락에 맞춰 무릎을 까딱까딱 떨고 있었다.

! 올라온다!”

그래! 보름달이 뜬다!”

아이들이 문수산 꼭대기의 커다란 소나무들이 늘어선 거뭇한 음영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며 환호성을 지르는 동안 풍물을 놀던 어른들은 물론 멀찍이 떨어진 담 너머나 복걸에서 삼삼오오 모여 구경을 하던 부인네와 처녀들이 동시에

달님, 올 해에는...”

어쩌구 저쩌구 저마다 머리를 조아리고 손을 비는데

, 불붙입니다!”

완전히 둥근 보름달이 되기를 기다려 달집에 성냥불을 갖다 대어 금방 너훌너훌 불꽃이 타오르면

야야! 달집에 불이 붙었다!”

올해도 풍년이 들면 좋겠다!”

아이어른 할 것 없이 저마다 한마디를 하며 타닥타닥 튀는 불꽃이 뜨거워 조금씩 물러서고

달집에 불이야! 짚이나 새끼 좀 주소!”

달집에 불이야! 짚이나 새끼 좀 주소!”

잔뜩 신명이 난 아이들이 빙빙 돌며 다시 소리를 질러댔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난 것이 남의 집에 불난 것 구경하는 것이라는 말처럼 이 그지없이 재미있는 달집놀이는 아무리 시퍼런 생솔가지를 넣고 심지어 얼음이 둥둥 뜨는 논바닥의 물을 퍼부어도 바짝 마른 짚과 새끼가 삽시간에 타올라 금방 사위거나 바람이 심하게 불어 달집 지붕이 날아가 불꽃이 사방으로 튀며 불시에 끝이 나기가 일쑤였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여전히 무어라고 중얼중얼 비는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재빨리 미리 준비해둔 깡통에다 달집이 타고남은 자리에서 아직 불이 붙어 연기가 남은 숯을 담고 깡통에 맨 줄을 빙빙 돌리는 쥐불놀이를 하며 앞새메와 대밭을 지나 넓디넓은 마구뜰의 논두렁을 태우며 신명을 내었다.

 

그렇게 달집놀이가 대강 끝날 때쯤 마을의 젊은 처녀총각들은 동갑내기들끼리 조를 짜서 남천내공굴로 다리밟기를 하러 갔다.

자기 나이만큼 약 100미터가 되는 다리를 왕복하면 한 해 동안 몸이 아프지 않고 운수가 대통하며 처녀총각은 시집장가를 간다는 소문에 주로 처녀총각들이 다리를 밟았다.

아마도 나이든 사람들은 나이만큼 밟기에 너무 힘이 들어서 가지 않고 아직 시집장가 갈 나이가 먼 아이들은 설령 간다 해도 몇 바퀴 돌지 않으면 금방 끝나는 것이 싱거워 안 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누부야, 금찬이 누부야!”

끝까지 달집자리를 얼멍거리며 빨갛게 사위는 재를 바라보던 열찬씨가 황급히 누나를 찾아

집에 가자! 아부지가 달집 끝나자말자 바로 누부야 둘이 데꼬 집에 오라카더라!”

?”

금찬이누나 대신 날마다 같이 붙어 다니는 동갑내기 삼총사 군자, 광자 중에 키가 훌쩍한 광자가 묻는데

가시나, 알면서 묻기는 말라꼬 묻노? 명촌이손도 그렇고 우리 하부지 하잠짐손도 마찬가지로 다 큰 가시나가 대보름날 다리 밟으러는 와 가겠노, 다 읍내 머시마들 만내서 연애 걸라꼬 가는 거 아이가? 하는 거 나는 안 봐도 척이다.”

이번엔 군자가 나서는데

아니 읍내 부잣집총각 만내서 연애만 건다면 얼매나 좋노? 보름달 덕분에 팔자 고치는 일인데.”

그 기 아이다. 옛 성현의 말씀에 그릇하고 여자는 함부로 내돌리면 흠이 나는데 자고로 가시나들이 엄발나서 함부로 나돌아댕기면 그만 신세 조진다 안 카더나? 봉당골에 석주아부지 서구장 직동서손이 말이다.”

딸 넷을 키우면서 엄하기 이를 데가 없어 위에 둘을 스무 살을 넘기기 전에 출가시킨 아버지가 벌써 열여덟이 된 자신을 엄청 챙긴다는 것을 알고 혼쭐이 나기 전에 돌아가려는 금찬이를 잡고

설마 우짜겠노? 집에 갈 때 우리 셋이 같이 너거 집에 가서 아무 일도 없이 잘 갔다 왔다고 이바구하고 가면 될 거 아이가?”

대범한 광자가 기어이 금찬이누나의 손목을 끌고

봐라. 덕찬아, 니가 열찬이하고 집에 가서 아부지한테 이바구 잘 해라. 내가 내일 비과나 유과, 아니면 나마가시라도 사주께.”

덕찬이를 떠밀며 셋이 웃각단으로 사라지는 지라 하는 수 없이 둘이 돌아와 이야기를 하자

에라이, 시근머리 없는 것들! 덕찬이 니는 아직 어려서 다리 밟으러 가도 되고 니 새이 금찬이는 가면 안 된다 말이다.”

숨이 가빠 헐떡거리며 간신히 말한 아버지가 요란하게 기침을 터뜨리며 한참이나 몸을 떨자 열찬이가 황급히 아버지의 어깨를 감싸고 덕찬이가 가래를 뱉은 가래단지를 씻어올 때까지 불만이 가득한 눈빛의 명촌이손은 너무나 숨이 찬지 마침내 조용히 눈을 감고 말았다.

 

저어, 과장님!”

지그시 눈을 감고 회상에 빠졌던 열찬씨가 눈을 뜨자

저어, 부산일보 정월식 기자가 말입니다...”

장수환 공보계장이 무슨 큰 죄라도 지은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과장님한테 죄송하게 되었다고 전하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죄송하게 되었다고, 뭐가?”

애써 대보름달집을 지우며 골똘히 더듬어 보는데

아무래도 특종보도가 어려운 모양입니다. 그 새 족보이야기 말입니다.”

뒤에 섰던 박기도씨가 말했다.

새롭고 특이한 기사이기는 하지만 명절특집은 좀 그렇다고 말입니다.”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며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열찬씨의 마음을 대변하듯 하는지라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

무심한 척 받아 넘기며 속으로

(어라, 좋다 말았네. 괜히 헛물만 켰네.)

허망한 마음을 애써 달래며

너무 신경 쓰지 마이소. 우리 설 잘 쇠고 대보름날 해상달집축제나 잘 치릅시다!”

열찬씨가 벽시계를 보며 책상 위를 치우기 시작했다.

 

마침내 대보름날이 왔다. 들쭉날쭉한 해안선과 산구비의 커다란 바위마다 용왕을 먹이고 산신을 모시는 비손과 굿이 시도 때도 없이 벌어져 과히 미신과 무당의 메카라 할 수 있는 부산서구의 송도일대는 해마다 다가오는 대보름이 산불방지의 가장 큰 고비였다. 동사무소는 물론 구청의 전 직원이 새벽 다섯 시부터 각자가 맡은 지역에서 입산자를 통제하고 무당을 저지하느라 북새통을 떨었지만 문화관광과 직원들은 산불감시에서 제외되어 아침부터 송도해수욕장으로 모였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