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94) 한 번의 여름이 지나가고
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94) 한 번의 여름이 지나가고
  • 손현숙 손현숙
  • 승인 2023.05.20 08:10
  • 업데이트 2023.05.23 10: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 번의 여름이 지나가고                             

                              손현숙

    
         
비 오는 날 빨간 구두를 신는다
골목을 기웃거리는데 
창문마다 작은 쇠종을 매달았다
소리 속에서 소리가 이어졌다, 끊어졌다,

세상에서 이름을 찾다가 
세상 밖으로 미끄러진 아이는 
어디 가서 저를 찾아와야 하나     
굽이 닳아서 발목까지 사라지는 꿈, 
따뜻하고 말랑한 구름을 입에 물고 
이 없는 잇몸으로 오물거리는, 
여기를 어떻게 빠져나갈까

뱃바닥으로 기어서 달빛까지 
닿으면 길이 끝나는 걸까  
누가 나를 부르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팔목을 저으면서 따라오는 
빨간 구두는 언젠가 만났던 얼굴이다 
오늘은 종일 비가 오고 
그 비를 다 걷고 나서야

쇠종처럼 흔들리는 내가 보인다

- 가히, 2023, 여름호

시작메모:  

비가 오는 날, 빗속에 갇히는 환영을 본다.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고. 발이 젖어서 슬프기도 하다. 젖은 몸 더 젖어서 망가지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런 날, 신발장에서 빨간 구두를 꺼내 신는다. 빨강에 집착을 한다. “여기를 어떻게 빠져나갈까”, 나 아닌 내가 나를 보면서 까무룩 사라지는 어느, 한 번의 여름이 있었다.   

 

손현숙 시인

◇ 손현숙 시인 :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sonhyunsuk@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