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의한 권력은 바로 내 자신의 삶을 파괴할 수 있다.
5월 22일 서울서부지법 형사11부(재판장 배성중) 이태원 참사 관련 재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용산경찰서 정보관 ㄱ씨는 증언을 하는 동안 여러 번 울먹였고, 한 차례는 오열했다. 오열하는 ㄱ씨는 우리 모두의 모습일 수 있다. 누구라도 ㄱ씨의 위치에 있었더라면, 울먹이고 오열하는 ㄱ씨의 운명이었을 것이다. 다만 용케도 지극히 우연히 ㄱ씨의 위치가 아니어서 ‘남의 일’인 것일 뿐이다. 그러나 과연 남의 일일 뿐일까?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용산경찰서 정보관들은 “지역정보는 필요 없다. 집회 관리에 매진하라”는 지시를 받아왔다고 증언했다. 정보관 ㄱ씨는 ‘이태원 위험 보고서’를 작성하고도 집회관리에 매진하는 분위기 때문에 핼러윈 축제 현장을 챙기지 못했다. 이태원 지역을 담당했던 정보관 ㄱ씨는 참사 당일 용산구 전쟁기념관 주변 대규모 집회관리를 하느라 핼러윈 축제 현장에 배치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ㄱ씨는 “과거엔 정보관이 (핼러윈 축제 기간) 한두 명 나갔다고 알고 있다”며, “(정보관이 배치되면)현장에서 긴급 사건이 발생했을 때 무전을 할 수 있다. 눈으로 보고 얘기하는 거라 ‘도와주세요’하면 즉시 대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태원 참사는 천재(天災)나 사고가 아니라, 막을 수 있었던 인재(人災)였다. 그 인재의 한복판에 정보관 ㄱ씨가 있다. ㄱ씨는 보고서를 쓰는 등 직무에 충실했다. 그러나 상부에 의해 거절당하고 참사를 지켜봐야만 했다. 이 참사의 트라우마는 평생 그를 괴롭힐 것이다. ㄱ씨가 무슨 잘못을 했는가? 누구의 책임인가?
정보관 ㄱ씨는 평범한 경찰공무원일 것이다. 대통령의 간호법에 대한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로 배신감을 느끼는 간호사들도 정치와는 거리가 먼 의료 인력일 것이다. 양곡관리법 개정안 재투표 끝에 부결로 벼농사 짓는 농부의 주름살은 더 깊어질 것이다. 아마 후쿠시마 오염수가 방류되면 연안 어민들 또한 시름이 적지 않을 것이다.
경찰공무원과 간호사와 농민과 어민의 직역이 서로 이해가 충돌할 접점은 없다. 경찰들은 간호법과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부결되어도, 후쿠시마 오염수가 방류되어도 개인적으로 피해를 볼 일은 없을 것이다. 간호사들이 이태원 참사에도, 남는 쌀을 정부가 매입하지 않아도, 오염수가 방류되어도 개인적으로 직접 피해를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농민과 어민도 자신들이 직접 피해를 볼 양곡관리법 개정안과 오염수 방류 외 이태원 참사가 일어나든 말든, 간호법이 부결되는 말든 개인적으로 직접 피해를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직접 개인적으로 피해를 보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의 부정의한 피해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한가? 시차를 두고 모두 손해를 입지 않는가. ‘어느 한 곳에 부당함이 있으면, 다른 모든 곳에서의 정의를 위태롭게 한다’는 마르틴 루터 킹의 말이 그렇게 적실할 수가 없다.
헨리 키신저에 의하면, 정치인들은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조종하고, 경계심으로 비전을 조절하며, 기존 제도가 저항에 부딪혀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까지는 사회의 풍조(the grain of society)대로 정치행위를 한다.
지금 우리나라가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누구나 피부로 절감한다. 그런데도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관성에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다. 그 관성의 힘은 바로 ‘우리 사회 풍조’가 아닐까?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아무리 부정의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개인적으로 직접 피해를 입지 않으면 ‘남의 일’로 치부해 버리는 습속 말이다.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네 가지 마음씨인 사단(四端)에 대해 우리는 알고 있다. 인(仁)에서 우러나오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의(義)에서 우러나오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예(禮)에서 우러나오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지(智)에서 우러나오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다. 의(義)는 곧 정의심이라고 넓게 해석해도 대과는 없을 것이다. 사회 풍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이 의를 풀이하여 ‘수오지심’이라 했다.
‘수’(羞)는 ‘부끄러워함’이다. ‘오’(惡)는 ‘미워함’이다.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목적어는 뭘까? 자신의 불의와 타인의 불의이다. 곧, 자신의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타인의 불의를 미워하는 게 수오지심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성인 수오지심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소극적 개념에 그치지 않고, 타인의 불의를 미워함으로써 사회의 불의를 막아야 한다는 적극적 개념이다.
개인적으로 직접적 피해를 입지 않는다고 해서 사회의 불의에 눈 감으면, 언젠가 그 불의의 칼날이 나를 겨눈다. 그때는 후회한들 이미 늦었고, 타인들 또한 내 고통에 무관심해 할 것이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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