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앵두꽃이 피면 홍진을 앓다 죽은 네 살짜리 소꿉친구 옆집의 학이를, 살구꽃이나 찔레꽃이 바람에 날리면 시집간 큰 누님을, 백일홍이나 코스모스의 처연하고 안타까운 빛깔에선 돌아가신 아버님을 떠올리며 늘 연연한 슬픔에 젖었다. 특히 채송화, 달개비꽃, 나락냉이 같은 키 작은 꽃들을 좋아한 것 같았는데 아, 또 하나 자주 빛 제비꽃이 생각나며 문득 큰 누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올해 일흔둘의 큰 누님은 왜정 때 태어나 해방 전후의 혹독한 가난을 겪고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초혼에 실패했으니 한글도 모르는 문맹자이면서 민족사의 아픔만은 빠짐없이 겪은 셈이다.
스무 살 가까이 차이나는 여섯 번째 동생인 내 어릴 적에는 통도사 앞 옹기점이라는 유독 황토색이 붉은 메마른 고개마을에 재혼해서 살았다. 내가 성장하여 객지를 전전하는 동안 늙은 포구나무 성황당과 그 아래로 향나무가 둘러 산 우물밖에는 모든 것이 척박하고 황량한 그 황토마을에서 감자밭, 콩밭을 매고 물을 길면서 누님의 손발과 얼굴은 두레박 끈처럼 낡고 늙어 어느 새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할미의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물려받듯 언양 장터에 전을 펴고 채소 씨앗과 미꾸라지를 팔던 누님은 부지런하기는 하지만 씀씀이가 무섭도록 인색하던 자형을 먼저 보냈다. 힘들여 길러준 전처자식(사실 동생인 나보다 나이가 많다)들에게 논밭의 대부분을 내어준 누님은 도로가 나는 바람에 향나무 우물이 있던 옛집이 철거되자 아랫마을 황토밭에 새집을 지어 이사했다.
혼자 사는 누님 집을 찾아가면 황토마당 가득히 어디서 날아왔는지 늘 민들레와 제비꽃이 가득히 피어있고 쇠죽을 끓이던 조선 솥과 정지 칼이 여기저기 흩어져 녹 쓸어가고 버려진 쟁기와 지게는 삭아가며 버섯이 돋아나기도 했다.
그렇게 맥없이 늙어 가는 큰 누님이 내게는 자꾸만 어머니를 연상시켜 마침내 어머니로 착각할 때가 많았다. 교통사고로 수술실에 들어가던 날 나는 사십이 넘은 사람이 어린애처럼 큰 누님이 오면 마취를 받겠다고 버티기도 했고 회복실에서 눈을 떴을 때 맨 먼저 내게 웃어 보인 사람도 큰 누님이었다. 사실 누님들의 엄청난 민간 조약 덕분에 내 다리가 나았는지도 모른다.
그 후 조카들의 혼사나 가정사로 내가 누님을 도와 준 일도 있었지만 엄나무, 산초나무 잎, 고들빼기와 취나물을 절여 밑반찬으로 보내거나 미나리, 머위 잎, 미꾸라지, 기름종개, 다슬기에 이르기까지 내가 좋아하는 먹을거리를 보는 족족 보내주는 바람에 아내가 새로운 조리법을 배우느라고 고생 깨나 하기도 했다.
그렇게 착한 누님이건만 왜 그리도 복이 없는지 아이. 엠. 에프 때 자식들의 사업이 고전하는 바람에 남은 농토도 거의 없어지고 이제 당뇨와 혈압을 앓아 기동하기도 어렵다.
이젠 명절에 산소를 둘러 본 뒤 꼭 큰 누님을 찾아본다. 언양 장에도 못 나가는 누님이 안타까워 몇 만원 용돈을 건네면 괜찮다며 손을 내젓는 누님의 합죽하게 웃는 모습이 영락없이 어머니를 닮아 내 가슴이 무너진다. 그럴 때 두세 장의 지폐는 동기간 만 주고받는 두세 방울의 눈물이다. 그 눈물방울이 누님의 낡은 주머니에 담겨 다음 만날 때까지 달랑거리는 셈이다.
자주 가 봐야지 하면서 누님을 한 번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귀도 밝지 못해 한참이나 대문을 두드리며 마당을 들여다보면 갈 때마다 마당에 잡초는 짙어지고 민들레와 제비꽃은 처연하게 피어있다. 저 보라색 제비꽃을 오랑캐꽃이라고도 부르고 앉은뱅이 꽃이라고도 부른다는데 늙고 병들어 기동이 불편한 누님 마당 가득히 핀 앉은뱅이 꽃은 이제 같이 늙어 가는 중년의 사내동생에게 너무나 애잔한 다가오는 꽃 이름이다.
키 작은 꽃을 좋아하는 내가 앉은뱅이 꽃이 된 누님을 자주 찾아봐야겠지만 좀체 실행하지 못한다. 그저 누님이 들풀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아 오래오래 버텨주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어느 듯 슬비가 결혼한 지도 반년 가까이 되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갓난애를 업은 새댁과 나란히 앉아오면서 말갛게 눈을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모습을 보고
“까꿍!”
혀를 입속에 말아 굴리면서
“똑!”
소리를 내던 열찬씨가
“아들입니까? 딸입니까? 그놈 참 밉상이네.”
하다가 문득 신혼중인 슬비내외가 생각나 새댁이 무어라고 대답하는 것도 건성을 듣고
“봐라!”
집에 들어서자말자 영순씨를 보며
“가들은 혹시 소식 없다 카더나?”
묻자
“소식이 없다니?”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아아! 알라 말이가? 요새 젊은 사람들이야 우리 때 하고 다르지. 마 이자뿌소.”
별 뜬금없는 소리도 다 한다는 표정이었다.
“다르기는 뭐가 다르노? 결혼을 했으면 아를 낳아야지. 아아 안 낳을 거면 결혼은 뭐 하러 하노?”
“아이구 이 골 아픈 양반아, 아아가 자연스레 생기면 놓지만 억지로 낳을라고 애쓰지는 않는단 말이지. 아예 신혼생활을 즐기려고 미리 방침을 하는 사람도 있고.”
“젠장.”
“그라고 가 나이가 몇 살잉교? 인자 스물일곱이면 뭐 바쁜 것도 아이고.”
“그래 지하철에서 깐얼라 엎은 새댁을 보니 어띠 부럽든지 말이다.”
“마 잊어뿌소. 저거 일 저거 알아 하도록.”
이렇게 끝을 내고 주말에 아이들이랑 외식을 하면서
“지하철에서 갓난애를 엎은 새댁을 보니 아이도 어미도 얼마나 귀엽고 대견하던지...”
들으라는 듯 이야기를 해도 반응이 없자 그 다음 주에도 고기 집으로 불러
“내 친구 아무개는 요새 나한테 외손자자랑이 늘어졌다. 휴대폰에 올려놓고 자랑이 장난이 아이더라.”
나올 때 자신들이 계산하려는 것을 말리고 다음 주에 또 불러내어
“옛날 같으면 우리 나이에 손자손녀가 대여섯 명은 주렁주렁했을 낀데.”
해도 돌아온 것이라고는 영순씨의 눈총뿐 역시 당사자들은 무반응이었다.
한번은 청우회라는 사무관동기모임에서 영덕강구로 대게를 먹으러 간 일이 있었는데 생선회와 대게를 곁들여 거룩하게 점심을 잘 마치고 나오는데
“보소. 당신 한 삼만 원만 주면 안 되겠능교?”
“와?”
“우리만 맛있게 대게를 먹고 나니 아아들이 눈에 밟히네. 당신은 아아들 생각도 안 나덩교?”
하는지라
“대게 한 마리가 얼마라 카더노?”
“큰 거는 사 만원.”
“아따, 억수로 비싸네.”
“우리 2:2로 협상할까?”
“아이구 이 좁쌀영감아, 아아들 공부시킨다고 밥묵기도 상그랍을 때 말이지. 이 나이에 우리가 협상할 일이가?”
밀고 당기다 기어이 3만원을 뺏기고
“당신은 돈 들어갈 연구는 잘만하더라. 말은 그럴 듯해도 돈은 꼭 내 돈이 들어가는.”
“그만 하이소. 남들 들을까 부끄럽다.”
하면서도 둘이 맛있게 먹을 모습을 상상하며 흐뭇한 표정으로 학장동에 가서
“쨘! 여게 뭐가 들었을까?”
하며 아직 따뜻한 대게를 꺼내 쟁반에 닮고
“요새 제 철이란다. 어서 묵어라.”
“엄마아빠도 같이 듭시다.”
“아이다. 우리는 모임에서 많이 묵었다.”
하는 새 둘이 다리 하나씩을 뜯어 맛있게 먹다 어느 새 몸통만 남았다. 하나뿐인 몸통을 어떻게 하나 둘이 유심히 바라보는데 슬비가 등딱지를 떼어내고 배 부분을 쪼개어 하나씩 먹어치우고는 아무생각 없이
“도연씨!”
하면서 게살 중에서 제일 맛이 있는, 그걸 먹으면 게 한 마리를 다 먹은 거나 같은 고소한 국물이 고인 등딱지를 건네주자
“야, 맛있다! 아주 죽이는구나?”
왼손으로 등딱지를 단단히 움켜쥐고 열심히 숟가락질을 하는 것이었다.
“슬비야, 밥 한 술 갖다조라! 밥을 비벼 먹어야 더 맛있지.”
영순씨가 말해 가져온 밥을 딱지 속에 비비면서 도연씨는 먹어보란 말을, 슬비는 먹어볼 염도 않고 금방 게딱지가 빈 통이 되어 접시 위에 나뒹굴자
“가자!”
기분이 상할 때마다 튀어나오는 가문의 전통을 재현하는 열찬씨의 말에
“와 벌씨로?”
영순씨가 사태가 심상찮은 것을 감지하는데
“당신은 안 되나? 나는 피로한데.”
하며 일어서는데
“아버지, 어머니 잘 먹었습니다!”
김 서방이 소리치자 슬비도 고개를 까딱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면서
“다음부터는 두 마리를 사야겠더라. 하니 하나씩 묵도록.”
열찬씨의 말에
“당신도 섭섭하덩교? 그렇지만 게딱지가 하나뿐인 걸 우짜요?”
“암만 그래도 등딱지 비빈 밥을 지 마누라보고는 묵어보라는 소리도 안 하고.”
“아이구, 당신은 뭐 젊을 때 마누라 챙깄는 줄 아능교?”
눈을 흘기는 영순씨도 뭔가 아쉽고 섭섭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7월 초로 예정된 정기인사가 무슨 일인가로 조금씩 늦어지더니 마침내 하기휴가 뒤로 지연되고 이어 을지연습도 넘겨 목전에 닥친 추석마저 넘기느냐 마느냐 소문이 무성했다. 44년생인 의회사무국장이 후진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명예퇴직을 한다, 안 한다는 이야기가 퍼지기도 했다. 그렇게 서기관이 한 자리 나면 승진과 전보가 이어져 공직에 새로운 활기가 넘치게 된다고도 했고 암만 그렇지만 평생을 바친 직장을 아무 잘못도 없이 법에 보장된 연수(年數)를 다 못 채우고 나간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44년생 서기관이 명예퇴직을 하면 45년생 총무과장이 서기관으로 승진하고 48년생 기획감사실장이 총무과장으로 가고 다음은 세무과장인 열찬씨가 기획감사실장으로 가는 것이 직원들이 예상하는 자연스러운 흐름, 인사방향이었다. 문화관광과장, 세무과장 등을 거친 보직경로나 김형호구청장의 신임, 특히 민선과정에서 중로의 귀양살이까지 갔다 왔으니 보답 차원에서도 반드시 그럴 것이라고 했다.
하루하루를 조마조마 하게 기다리며 귀향차량에 대한 자동차번호판 영치계획을 들여다보는데
“보소!”
영순씨의 전화가 와서
“와? 같이 저녁 묵자꼬? 아아들은 시간 되는가?”
“그기 아이고 아아들 소식 있답니더.”
“소식이라니?”
“아이구, 이 양반아! 당신이 날수금 아아, 아아 노래를 부르던 그 소식이 있단 말입니더.”
“뭐라꼬!”
“낮에 병원에 갔다 왔는데 벌써 3개월 째랍니더.”
“옳지러. 잘 됐네. 저녁에 가볼 끼가?”
“당연하지요. 당신도 나와서 저녁이나 사지요.”
“그라지.”
하고 송수화기를 놓는데
“서기 2013년 하반기 4급 승진 및 5급 인사이동을 발표하겠습니다.”
실내방송이 터지자 직원들이 모두 숨을 죽이는데 마침내
“세무과 지방행정사무관 이열찬 기획감사실 근무를 명함. 기획감사실장에 보함.”
동시에 박수소리가 터지면서
“축하합니다. 실장님!”
직원들이 우르르 밀려오며 악수를 청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