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새해는 밝았지만③

“그거 소주가?”
김 계장이 든 비닐봉지를 보더니 비로소 표정이 누그러졌다. 이어 공항식당에 들어가 먼저 강소주 한잔을 마시고 이어 맥주를 섞어 폭탄주를 제조해 건배를 하여 분위기가 상당히 누그러진 뒤
“청장님!”
아주 간단하게 여남은 줄로 압축된 부재중 업무보고서를 올리니
“뭐라 판정보류라?”
열찬씨를 바라보는 눈빛이 많이 부드러워지며
]“이 실장, 그냥 놀지는 않았군. 고생한 김에 기어이 이 싸움을 이기도록 하게.”
모처럼 얼굴을 펴며 술을 한 잔 부어주었다.
그렇게 잔뜩 고무되어 특별한 갈등도 없이 보름이 흘러 행정심판이 재개 되었는데
“실장님,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법리적으로 대항요건이 성립되지 않아 피청구자의 청구가 인용되었답니다.”
“에이, 좋다 말았군.”
“그래도 엄청 선전했다는 본청 실무진의 이야기가 있었답니다.”
곽 계장의 전화를 받고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싶어 바로 구청장실로 들어가 보고를 하니
“쳇! 내 그럴 줄 알았지. 도대체 무엇 하나 시원하게 하는 게 없단 말이야.”
다시 잔뜩 찌푸린 얼굴이 되었다. 모처럼의 쾌청상태가 다시 살얼음판으로 접어든 것이었다.
그렇게 갑갑한 세월을 보내면서 어느 듯 출근을 하지 않은 휴일, 그러니까 김모구청장과 마주칠 일이 없는 토, 일요일을 기다리는 형편이 되었다. 시간단위 육체노동을 하는 산업체의 근로자도 아니고 승진이나 출세의 대한 욕심도 심각하지 않은 8,9급 하위직공무원도 아닌 한 구청의 기획감사실장으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적어도 6급 주사이상의 기초지방자치단체인 구.시.군의 공무원들이라면 주말에 개최되는 축제나 걷기대회 등 행사, 또는 나와도 되고 안 나와도 되는 어중간한 비상근무에 빠짐없이 참석해 어떻게든 자신이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이면서 절대적 권력을 가진 구청장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 심복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괜히 얼씬거리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식사를 같이하거나 차라도 마실 기회가 있으면 가능한 공손한 자세로 임하고 자리를 파할 때 서둘러 계산을 하는 것이었다. 아주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저녁시간에 술자리라도 가지게 되는 경우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면서도 다시 놓칠 수 없는 절호의 찬스, 어쩌면 절체절명의 찬스였다. 술잔이 오가며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고 조금씩 긴장이 풀리면 평소 호랑이보다 무섭던 절대자 구청장에게 아부가 가득한 멘트와 함께 공손하게 술잔을 건네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입장을 부각시키면서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었다.
역시 기분이 풀린 절대자도
‘아니 이 사람이 이렇게 성실하고 유능하고 친절하며 조직을 위해 제 몸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던가?’
싶어 덩달아 호감을 표시하며 은근히 무슨 언질 비슷한 덕담이라도 던지면
“감사합니다. 청장님!”
금방 자지러질 듯 몸 둘 바를 모르다가 술값, 밥값을 결재하는 것이었다.
만약 2차로 좀 은근한 술집이나 노래방에라도 가는 날이면 평소에 귀동냥으로 아는 청장의 18번을 시킨다든지 도우미를 붙여주고 만 원권 배추이파리를 찔러주는데 서슴지 않았고 자신의 차례가 오면 평소에 이런 데를 잘 다니지 않아 노래를 잘 못 한다면서도 젖 먹은 힘을 다 짜내어 열창을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부르는 노래가 구청장의 맘에 들어 따라 부르자 바로 마이크를 넘겨주며 박수를 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한두 번 사석을 같이하면 그게 무슨 큰 자랑이나 되는 것처럼 경쟁상대인 동료들에게 은근히 과시하고 자기가 무슨 측근이나 된 것처럼 뻐기고 다른 사람들은 부러워하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공무원30년이면 화류계30년>이라는 자조어린 농담이 다 있을까? 또 일과 후에 공적이든 사적이든 높은 사람의 식사나 술자리에 가방을 들고 따라다니며 온갖 잔심부름을 하고 둘이 호젓이 있을 때는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따라 말 상대가 되거나 술친구가 되거나 노래파트너가 되면서 신임을 얻어야 고속승진이나 출세를 한 사람을 <가방모찌>출신이라고 빗대면서 자신에게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하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보통의 공무원이었다면, 또 그 정도의 직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세 불리를 느끼고 모두가 떠나버린 선거판에 인간적 믿음을 저버리지 못 해 불리한 선거에 끝까지 줄을 바꾸지 않은 탓으로 이웃 구로 귀양살이까지 하고 온 자신, 누가 봐도 심복이고 측근이라고 할 만한 열찬씨라면 아예 주말이나 휴일을 반납하고서라도 김모구청장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흔쾌히 <가방모찌>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열찬씨 자신의 성격이 그렇게 윗사람에게 굽실거릴 만큼 그다지 곰 살 맞지도 않았고 설령 그런 맹목적인 충성을 보이려 해도 이미 순순히 받아줄 입장도 아니었다.
그렇게 갑갑한 세월, 사무실에 있어도, 집에 있어도 답답하기만 한 세월에 유일한 탈출구가 바로 등산이었다. 농부의 후예로서 누구보다 굵은 종아리를 타고난 열찬씨는 이제 엔간한 산을 오르거나 한두 시간 내처 걷는 것은 겁도 내지 않을 만큼 제법 산 꾼의 티가 나고 있었다. 주로 여보산악회회원들과 어울려 가끔은 봉고버스로 밀양, 창녕, 의령을 거쳐 합천, 하동, 함양산청에 이르기까지 1박2일의 산행을 하기도 했지만 가까운 금정산이나 천성산을 타고 하산 길에 고기집이나 횟집에서 회식을 하며 여성회원들의 끝없는 수다를 건성으로 듣는 척 했다.
그러나 직장인이 아닌 일반인들은 산행을 나서지 않는 토요일의 경우 주로 혼자 나서야 했는데 영순씨는 마지 못 해 여보산악회의 등산에 안간힘을 다해 따라나설 뿐 아직 힘에도 부치고 취미도 붙지 않은 상태였다. 한 시간이 걸리는 집 앞의 2백 미터 대의 배산, 두세 시간이 걸리는 4백고지의 황령산, 세 시간이 넘어 걸리는 6백고지의 백양산, 장산을 거쳐 마침내 네 시간이 더 걸리는 8백고지의 금정산도 거뜬히 돌파했다.
혼자 호젓이 걷다 숨이 차면 전망이 좋은 바위에서 시가지를 내려다보거나 풀 섶의 나비를 한참이나 바라보거나 활엽수의 그늘에서 가는 바람에 조용히 나부끼는 나뭇잎을 보며 이어령의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우주의 숨소리를 보았다.>를 떠올리기도 하고 힘들게 오른 정상에서 비록 혼자이기는 하지만 “야호!”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오르막길에 잠시 숨을 고르며 마시는 냉수 한 모금, 전망바위에서 먹는 토마토나 단감 하나의 달고 시원한 맛이며 영순씨의 특기인 맛깔난 열무김치에 몇 점의 고기나 멸치를 곁들인 반찬으로 밥을 먹거나 소주 몇 잔을 마시는 누구와도 걸림 없이 마치
남아난 산과 바위 그나마 풀만 뜯어
뉘와도 걸림 없는 차라리 외로움을
솔바람 잎 지는 소리에 귀를 세워 삶인가.
아마 사슴이나 노루로 제목이 기억되는 이호우의 시조를 떠올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식사에도 점점 재미가 붙었다.
푸른 숲, 넓은 풀밭, 둥근 봉우리와 아득한 바위, 포근한 햇살과 서늘한 그늘, 시원한 바람과 새소리, 갈대처럼 키 큰 풀잎이 서걱대는 소리와 계곡물이 부서지는 청아한 파열음...
모든 것이 아름답고 평화로웠고 무엇 하나 구애받지 않았었지만 그렇다고 매순간이 꼭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저 아래로 펼쳐진 인간의 마을, 빼곡히 아파트가 들어선 도심이나 그 도심을 적시는 젖줄인 온천천을 덮어씌운 복개천위로 달리는 전동차를 보면서, 어느 로터리의 6개 방향으로 멈추거나 달리거나 정체된 차량의 행렬을 바라보다 문득 인간세상의 갈등, 저 멀리 전동차의 노선으로 이어진 충무동의 서구청과 거기에 얽힌 인간의 굴레, 갈등과 반목과 질시의 복마전에 내일이면 자신이 또 끼어든다는 생각, 웃어도 속마음은 웃는 것이 아닌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같이 밥을 먹고 더더욱 좀체 얼굴을 펴지 않은 금테안경의 절대자를 만나야한다는 생각에 부르르 몸을 떨며 한숨을 몰아쉬기도 했다.
옛날 연산조기축구회의 멤버이다가 <98>회라는 친목계의 계원으로 이어진 설비업자 김몽룡씨가 이제 나이 들어 공을 차지 않고 주말엔 주로 등산을 다니는 걸 알고 같이 합세하게 되었는데 금방 다섯 명의 멤버로 등산 팀이 구성되었다. 열찬씨보다 두 살 연장인 김몽룡씨가 자연스레 리더가 되고 그 아래로 열찬씨, 다음은 로구로라는 목형기술자 박춘식씨, 시골의 슈퍼와 점방에 화장지와 생리대 같은 일회용품을 판매하는 박봉록씨, 토목회사에 다니는 유동식이사가 나이에 따라 형님동생으로 순서가 매겨졌다. 그 중 열찬씨와 <화장지박사장>을 제외한 셋은 이미 <연산로터리 산우회>회에 소속되어 있었고 나머지 둘은 자연스레 예비회원이 되어 가끔 산우회사무실에 들려 이제 나이가 들어 산은 별로 타지 않고 주로 사무실에서 고스톱을 치거나 술추렴을 하는 다른 회원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재미가 있는 것은 로터리산악회에선 정기산행날인 1,3주 일요일엔 산행경비 5만원이 지급되는데 매번 참석자가 이제 다섯 명의 잡동서니 <5잡>이라고 불리는 김몽룡팀이 거의 전부라 회원도 아닌 열찬씨와 <화장지박사장>도 남의 산악회경비로 삼겹살에 소주를 늘 얻어 마시는 폭이었다.
리더 김몽룡씨는 몇 가지 아주 고집스런 방침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얼음이 꽁꽁 어는 한겨울이 아닌 이상 반드시 산행 중에 인적이 드문 계곡에서 목욕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음 삼겹살은 반드시 프라이팬이 아닌 납작한 자연석 돌멩이를 주워 돌 판에 구워야한다는 것이었다. 나머지 하나가 아주 고약한 조건으로 어느 산에 가서 언제 어디쯤서 점심을 먹을지 다른 사람의 말을 절대로 듣지 않고 제 맘대로 일방통행을 하는 것이었다.
주로 천성산이나 대운산엘 자주 같는데
“형님, 오늘은 미타암방향으로 갑시다.”
하고 <화장지박사장>이 말하면
“씰데없는 소리. 무지개폭포로 가자!”
또 로구로가 자주 먹는 횟감 마구로로 변질된 <마구로박사장>이 대운산 출발점인 서창시장 앞에서
“형님, 오늘은 대추만디 방향으로 갈까요?”
하면
“씰데 없는 소리. 시명사골짝으로 가자!”
무조건 반대였고
“형님, 목마른데 막걸리 한 잔!”
]막내 유이사가 통사정을 해도
“떽! 인자 몇 발짝이나 왔다고?”
하며 악착같이 경사가 급한 산정까지 오르게 했고 열두 시가 넘어 배가 고파
“새이야, 배고푸다. 여게 물도 좋네. 그만 자리 펴자.”
열찬씨가 점심을 먹자고 조르며 벌써 한 시간 이상 그 먼 길로 들고 온 납작한 돌 판을 내려놓아도
“떽!”
들은 척도 않고 내처 걸었고
“아이구, 배고파라! 저 놈의 영감탱이는 배도 안 꺼지나?”
뒤 따라가며 수군거려도 들은 척도 안하다가 마침내 어느새 눈앞에 마을이 보이는 산 아래에 도착하면
“자, 여기서 전을 펴자!”
인심이나 쓰듯 걸음을 멈추지만 물도 숲도 형편없고 자리도 좁아
“야, 멋지다! 우리 대장 자리 보는 눈이 밝아 백두산도 가겠다.”
“백두산이 뭐꼬? 히말랴야도 끄떡없다!”
“산행대장하나는 허영호보다 낫다. 엄홍길도 울고 간다.”
열찬씨까지 나서도
“떽!”
한마디와 함께 부지런히 삼겹살을 굽는데 돌 판을 엎을 때까지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는 집게를 넘기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 요리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벌어진 점심 술판이 오후 세시가 넘도록 이어지면 벌써 하산 길에 접어든 사람들이
“허허 제사보다 젯밥에 마음이 있다더니 이 양반들은 산보다 삼겹살에 더 마음이 있는 모양이군. 보소, 이래 산 입수에서 마실 참이면 굳이 요까지 올라올 기 뭐 있소? 아예 거실에서 마시지.”
하며 웃기도 하고 느지막이 목욕을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의 본격적인 하산 때라
“허허, 저 대가리 허연 노인데들이 귀때기 새파란 젊은 사람들 댕기는 길가에서 체면 없이 무슨 추탠가,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그러나 그 소문난 <5잡>의 특징은 그 무엇보다 다섯 명 모두가 엄청난 술꾼. 초뺑이라는 점이었다. 2홉 들이로서는 양이 안 차 다섯이 다 모이는 날엔 됫병을 두 개 사고 또 막걸리를 서너 통 사니 말이 등산이지 보통 하루에 소주 너덧 병씩은 마시는 술추렴을 하는 셈이었다. 그나마 그렇게 안주라도 있을 때 마시면 다행이련만 한참이나 하산 길을 내려오다 널찍한 자리에서 쉬기라도 하면 서로가
“형님, 있제?”
“아이다, 혹시 화장지한테 물어봐라.”
“아니요. 나는 없고 로구로형님 가방에 보소.”
“아이다. 가만있는 열찬이형님이 수상하다.”
저마다 남의 배낭을 힐끗거리면 어김없이 또 한 두 병의 플라스틱 병에 담긴 소주나 복분자주, 샘플용의 작은 양주병이 나와서 한참이나 떠들며 마시다 들판을 가로질러 버스정류소에 이르며
“야, 좋다. 우리 술꾼이 시골장터나 버스정류소 술맛을 그냥 지나가면 안 되지.”
다시 횟집이나 돼지국밥집으로 향했고 아침 일찍 운전을 해야 하는 <화장지박사장>이 사정사정해서 술판을 끝내고 지하철 노포동역이나 동해남부선 부전역에 내려 먼저 떠나면
“어때? 딱 한 잔씩!”
누구랄 것도 없이 남은 넷이 서로 쳐다보며 눈을 반짝이는 것이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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