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교수의 머릿속 전시회 : 서울-부산 도보 生覺記 19 - 힘들게 걷기만 했다고?
박기철 교수의 머릿속 전시회 : 서울-부산 도보 生覺記 19 - 힘들게 걷기만 했다고?
  • 박기철 박기철
  • 승인 2023.06.27 06:40
  • 업데이트 2023.06.26 17: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힘들게 걷기만 했다고?

제가 지금 밟고 있는 땅은 아직도 경기도 안성(安城)입니다. 서울 양반들이 안성에서 놋그릇을 맞추면 주문자의 취향과 요구에 딱 맞아 안성맞춤이라는 말까지 생겼다지요. 우리 실생활에서도 안성맞춤이라는 말을 자주 쓰지요. 그러나 저는 안성을 지나면서 안성이 그처럼 놋그릇을 잘 만들었는지 보고 살필 틈이 전혀 없습니다. 저는 이것저것 여기저기 체험하며 즐기는 여유있는 여행자가 아니라 그냥 앞만 보고 걷는 삭막하고 각박한 행진자이기 때문입니다. 행진하면서 가장 기다려지는 것은 사진 속의 저런 표지판입니다. 이제 진천까지 가려면 18km를 더 걸어야 합니다. 서너 시간 더 걸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저는 이렇게 하염없이 걸으면서 무엇을 했을까요? 멍청히 걷기만 했을까요? 아니지요. 저는 걷기와 함께 더 중요한 무엇을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각입니다. 저는 걸으면서 생각을 하였지요. 이는 책상머리에서 골똘히 낑낑대며 억지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각이 술술 나오는 것이겠지요. 8월초 땡볕에 쌩쌩 달려오는 차를 피하며 땀을 뻘뻘 흘리며 걷는데 과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느꼈습니다. 생각이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앞을 바라보며 다리를 내딛고 팔을 흔들며 육체의 오감을 작동시키며 걸을 때 이런저런 생각이 생기더군요. 의학적으로 설명할 때, 걸으면 뇌에 혈액순환이 잘 이루어져 머리가 잘 돌아 간다네요.

진천까지 18km라는 표지판

그렇게 걷기와 생각하기는 연관이 큽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들과 걸으면서 철학을 하였고, 칸트도 매일 정기적으로 걸으면서 철학을 하였고, 김삿갓도 걸으면서 철학이 담긴 시를 썼겠지요. 저 역시도 걸으면서 철학을 하였습니다. 철학이란 머릿속이 어둠에서 밝아지는(哲) 배움(學)이라고 할 때 저는 걸으면서 철학자가 되었습니다. 걷는 철학자! 설령 그 철학이 개똥철학이라고 하더라도 하염없이 걸으면서 하염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일인 걷기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등한 일인 생각하기와 연관되다니… 참 아이러니하지요. 이제 경기도 땅을 지나 충청북도의 땅으로 들어가 걸으면 또 어떤 생각들이 떠오를까요? 행진의 길과 철학의 길이 이어집니다.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kaci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