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좋은’ 사람, 곧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는 개인적 성공에 유리한 입장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개인의 이익을 넘어 사회에 얼마나 기여를 할까? 혹 기여보다 해악이 더 많지 않을까? ‘검찰 독재’란 하 수상한 시운(時運)에 누구에게나 듦직한 의념이다.
세상 만물은 각기 이유가 있어 존재하기에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적이다. 맥락에 따라 선과 악이 결정될 뿐이다. 칼은 같은 칼이되, 주방에서 엄마가 쥔 칼과 으슥한 골목에서 복면 쓴 자가 쥔 칼은 의미를 달리한다. 지적 구성물도 마찬가지이다. 법은 같은 법이되, 누구에겐 사치스런 목걸이가 되고, 또 누구에겐 옭아매는 밧줄이 된다. 천재(타고난 재능)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조선시대 유생의 필독서인 『소학』 〈가언〉편에 송나라 유학자 정이(1033~1107)의 ‘인삼불행’(人三不幸), 곧 ‘사람의 세 가지 불행’이 실려 있다. 소년 시절에 높은 과거에 오르는 것이 첫째 불행이고, 부형(父兄)의 권세에 힘입어서 좋은 벼슬을 하는 것이 둘째 불행이며, 뛰어난 재주가 있고 문장에 능한 것이 셋째 불행이다.
이 세 가지는 우리가 ‘세 가지 행운’이라 부를 만한 것이다. 한데 불행의 씨앗이라고 지적한다. 왜 그랬을까?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마음가짐’이다. 이에 대해서는 깊고 긴 철학적 논의가 필요하다. 언급만으로 접어둔다.
구체적으로는 ‘뛰어남’이나 ‘권세’의 정체이다. 개인적 천재성이나 집안의 권능은 무한한 신적 능력이 아니다. 남과 비교해서 조금 나은 것에 불과하다. 조금 나은 비교우위의 능력을 갖고 절대우위의 마음가짐으로 처신하게 되면, 현실과 유리된다. 아무리 뛰어난 개인도, 아무리 권세 높은 집안도 인간 한계 내의 존재일 뿐이다.
어쨌건 이 세 가지 모두를 가진 역사적 인물이 실학 시대를 연 지봉 이수광(1563~1628)이다. 그는 태종의 6대손으로 5세부터 글을 읽은 신동이었다. 19세에 진사가 되고 22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부정자를 시작으로 도승지, 대사간, 병조 참판, 대사헌, 대사성을 역임했다.
이수광이 벼슬길에 있던 시대상황은 왜란과 호란이란 미증유의 변란으로 조선 500년 역사에서 내우외환이 가장 극심한 시대였다. 왜란 전의 농지는 80만~90만 결이었으나 1611년에는 54만 결로 줄었고, 800만 명이 넘던 인구는 왜란과 호란이 끝나고 78년이 지난 1676년 470만 명으로 줄었다. 농토와 인구가 절반으로 쪼그라든 것이다.
지배 세력의 무능함이 폭로되었고, 지배 이념인 성리학의 효용성이 의심받게 되었다. 그러나 지배 세력은 일말의 반성도 없었다. 시대적 요구는 개혁이었다. 그러나 집권 사대부들은 당쟁에 여념이 없었고, 성리학은 청담 공론에 빠져 당쟁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수광이 몸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물처럼 맑은 성품과 파당에 앞장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권력가들과는 소원했고, 한평생 향기를 내지 않았고, 연회를 베푼 적이 없으며, 항시 포의만 걸쳤으며, 한 벌의 갖옷을 15년이나 입은 수도사 같은 군자였다.(묵점 기세춘/실학 사상)
이 시대적 반성으로 성리학의 공리공담을 배격하고, 실사구시 학문을 제창한 것이 실학이다. 이 실학의 선구 중 하나가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인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이다. 이 책은 거론된 항목이 총 3,435개조이며, 거론한 인물이 2,265명에 이른다. 안남(베트남), 섬라(시암=태국), 석란(실론) 등 동양 각국을 소개할 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등을 소개하고 그들의 군함 무기 등 기술과 생활양식까지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실용적 글쓰기는 성리학 일변도의 봉건성을 벗어나, 새로운 근대적 학문의 길을 제시한 이정표가 되었다. 이후 뜻있는 젊은 선비들 사이에서 시문, 경전 등 과거 시험 위주의 학문을 버리고, 예전에는 비천하게 여겼던 실생활에 밀접한 이용학(利用學)을 전문적으로 하는 기풍이 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와 영향은 참으로 중대한 것이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1982년도 제1회 대입학력고사에서 전국 수석을 했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수석 입학했고, 제34회 사법시험에도 수석 합격했다. 가히 ‘제주가 낳은 천재’란 이름에 값한다. 몇 년의 검사 생활 후 정치에 입문하여 세 번의 국회의원과 두 번의 제주특별자치도지사를 지냈다. 개인적으로 출세한 사람은 맞다.
원 장관이 처한 시대상황이 ‘위기’라는 점에서 이수광과 비슷하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수광은 지배이념인 성리학을 지양하고, 새로운 실학을 열었다. 반면 지배 세력의 중추인 원 장관은 기득권에 안주, 차라리 위기 상황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현재 정국을 시끄럽게 하고, 국민을 분열시키는 ‘고속도로 게이트’를 생각하면, 사법연수원 시절의 노상방뇨 사건까지 소환하게 된다. 원 장관이 사법연수원 시절 노상방뇨를 하다가 이를 나무라는 아버지뻘 어르신을 집단 폭행, 파출소에 연행되자 ‘우리 사법연수생들을 우습게 보느냐’면서 기물을 파손했다고 당시 언론이 보도했다.
‘고속도로 게이트’에 대한 원 장관의 해명이나 변명, 한마디로 구차하다. 2017년 이래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으로 결정돼 있던 서울-양평 고속도로 종점이 지난 5월 8일 갑자기 양평군 강상면으로 바뀌었다. 문제는 지난 7년 동안 종점은 늘 양서면이었고, 예비타당성(예타) 조사까지 다 거친 상황이었다. 사실상 확정됐던 양서면 종점이 왜 갑자기 강상면으로 바뀌었느냐는 의문이 제기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원 장관은 종점이 바뀐 합리적 근거만 제시하면 그만이다. 제시한 근거가 합리적이면, 김건희 일가의 땅 때문이니 아니니 하는 설왕설래는 정말로 ‘정치적 프레임’일 것이다. 직이나 정치생명을 거니 마니 하는 것은 본질과 한참 먼, 웃기는 변명이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 의심만 더할 뿐이다.
천재적 두뇌의 소유자가 이까짓 정도의 간단한 일에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 천재성은 뭐에 쓰는 물건인가.
정치는 시험이 아니다. 정치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정치인은 ‘국민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아’ 정치를 한다고 했다. ‘제주가 낳은 천재’인 원 장관은 무엇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가. 국민의 마음인가, 김건희나 윤 대통령의 마음인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사적 이익추구의 마음인가?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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