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쇼펜하우어(1788~1860)에게 개가 한 마리 있었다. 그 개의 이름은 ‘헤겔’이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칸트(1724~1804)의 계승자라고 생각했고, 서재에 칸트의 초상화를 걸어놓을 정도로 존경했다. 반면 헤겔(1770~1831)을 몹시 미워했다.
칸트는 이 세계를 물자체와 현상계로 구분했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우리 뇌가 감각자료를 통해 해석한 현상계뿐이고, 물자체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현상계가 쇼펜하우어에게는 ‘표상’이다. 칸트는 물자체는 알 수 없는 것이라 했지만, 쇼펜하우어는 그것을 ‘의지’라고 봤다. 그래서 쇼펜하우어의 대표 저서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이것 이상으로 확실한 진리는 없다”고 단언할 정도로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학설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했다. 한데 헤겔은 변증법이니 절대자니 하면서 이 둘을 절대정신 속에 집어넣으려 한다고 생각했다. 하여 쇼펜하우어는 헤겔이 헛소리만 늘어놓는 사기꾼이며, 그의 관념론은 사람들을 속이는 거대한 사기극이라 주장했다.
쇼펜하우어는 당시 명성이 드높았던 헤겔이 사기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작정을 했다. 베를린 대학 강사로 있을 때 일부러 헤겔과 같은 시간에 강의를 개설했다. 막상 뚜껑을 열자 헤겔 강의에는 수백 명이 몰렸지만, 자기 강의에는 서너 명밖에 오지 않아서 한 학기 만에 폐강했다.
분을 참지 못한 쇼펜하우어는 이후 개를 한 마리 샀다. ‘헤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열불이 날 때마다 ‘헤겔아, 헤겔아’라고 불렀다.
송시열과 대립한 소론은 집에서 키우는 개 이름을 ‘시열이’라고 지었다. 송시열을 미워하는 마음을 담아 개를 보며 ‘시열이, 시열이’ 하고 불러댔다. 송시열(1607~1689)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인물이다. 우리나라 인물 중 유일하게 이름에 자(子) 자를 붙여 ‘송자’(宋子)로 불리는 성리학(주자학)의 거물이다. 조선은 그를 ‘성현’으로 추대했고, 사후에는 『송자대전』이란 문집도 편찬했다.
인조반정과 양대 호란을 겪으면서 17세기 조선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특히 병자호란의 굴욕은 민족적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송시열은 강력한 북벌론과 근본주의적 성리학의 선봉이었다.
송시열의 근본주의적 성리학의 골자는, 이 세상 모든 만물은 하늘의 절대적 이치가 나타난 것으로 이 이치에서 벗어난 것은 모두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은, 정치적으로는 봉건 전제 군주 제도를 충실히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사회 전체의 개혁과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됨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당시 부패하고 무능한 임금에 대하여 “한 포기의 풀, 한 그루의 나무와 민중들의 머리칼 하나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에나 임금의 은혜가 미치지 않는 것이 없다”고 찬양했다. 나아가 “임금의 절대 권위는 매우 존귀하여 누구든 이를 침범해서는 안 되며, 민중들은 그의 명령에 절대로 복종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짐승의 무리’와 같다고 하였다.
또한 송시열은 노론의 우두머리로서 당파 싸움에 앞장서서 자신과 생각이 다른 학자들을 이단자로 몰아 억압했다. 그리고 철저하게 중화를 받든다는 생각에 얽매여 융통성 없는 사고방식을 보였다. 중화를 받든다는 것은 망해가는 명나라를 받드는 일이다. 그 이유는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에 우리나라를 도와준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의 파병은 조선의 어려움을 구해주고자 한 것만은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명나라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송시열은 대의명분만을 내세우며 자신과 생각이 다른 윤휴, 윤선거, 박세당, 윤증 등을 박해했다.
송나라의 주희(1130~1200)가 집대성한 주자학(성리학)은 원나라에서 국가가 장려하는 철학으로 발전하였다. 중앙 집권 국가의 통치 철학으로서 주자학이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주자학이 그 시대 변화와 학문 사상을 담아내지 못하고 공리공담으로 변한 문제점과, 사회와 역사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좀 더 그 시대에 부합되는 철학 사상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명나라의 양명학이고, 청나라에서는 고증학이다.
당시 중국과 조선은 매년 2~3차례 사신들이 오갔다. 이에 따라 학문과 사상, 서적의 교류가 많았다. 따라서 16세기 중반에 이미 양명학이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하지만 당시 대학자 이황이 앞장서서 양명학을 비판하였고, 이 입장은 그 뒤 우리나라 양명학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양명학은 보다 진보적인 사상적 경향을 가진 학자들에게 수용되었다. 그 중에 허균(1569~1618)과 정제두(1649~1736)가 있고, 독립운동가 박은식과 일제 때 정인보도 양명학자였다.
양명학에서는 참된 지혜인 양지(良知)를 사회적으로 모두 실현하고자 한다. 그래서 모든 민중이 평등한 대동사회를 이룩한다는 것이다.
허균은 자신이 쓴 『학문에 관한 이야기』에서 당시 주희의 성리학이 자기들의 학문만 옳다고 하면서 많은 거짓말을 그럴듯하게 꾸미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기들의 사사로운 욕심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우리나라에서 양명학을 제대로 평생 동안 공부하고 양명학파를 세운 사람은 정제두이다. 그는 당시 주자학을 따르는 학자들이 대부분 겉으로는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윤리 도덕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정제두는 “오늘날 주희를 말하는 사람들은 주희의 성리학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희를 빌려 왔을 뿐이며, 더 나아가서는 주희의 권위를 빌려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고 있다”고 일갈했다. 주자학(성리학)을 철저하게 옹호하면서 정치 권력과 이익을 챙긴 송시열과 그 추종자들을 비판한 것이다.
*이 글은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야기 한국철학』/우리철학의 새로운 전개②’에 크게 힘입었음을 밝힙니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ouasain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