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 칼럼】 ‘개’ 같은 인생 ②‘상갓집 개’와 공자
【조송원 칼럼】 ‘개’ 같은 인생 ②‘상갓집 개’와 공자
  • 조송원 기자 조송원 기자
  • 승인 2023.07.23 19:50
  • 업데이트 2023.07.26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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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7년 파리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이 출판한 중국 철학자 공자
1687년 예수회 선교사들이 프랑스 파리에서 출판한 '중국 철학자 공자' [위키피디아]

공자도 ‘상갓집 개’로 불린 적이 있다. 모함이 아니다. 공자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생면부지의 어떤 사람이 공자의 몰골에 대한 진솔한 표현이 상갓집 개였다. 더 주목할 점은 그 표현에 대해 공자 자신도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공자가 정나라에 갔는데 제자들과 서로 길이 어긋나서 홀로 성곽의 동문에 서 있었다. 정나라 사람 누군가가 자공에게 말하였다.

“동문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이마는 요임금과 닮았고, 그 목덜미는 요(陶. 순임금의 신하, 고요)와 닮았고, 그 어깨는 자산(子産. 정나라 귀족)과 닮았어요. 그러나 허리 이하는 우임금보다 3촌(寸) 짧으며, 풀 죽은 모습은 마치 상가(喪家)의 개와 같았습니다.”

자공은 이 말을 그대로 공자에게 고했다. 공자는 흔쾌히 웃으며 말하였다. “한 사람의 모습이 어떠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상가의 개’와 같다고 하였다는데, 그것은 정말 그랬지! 그랬고말고!”」 -사마천/『사기史記』, 공자세가-

공자는 성인(聖人)일까? 성인이란 칭호를 붙이는 순간 공자에게서 ‘인간’은 사라진다. 하늘로 올려버려, 땅 딛고 사는 사람과는 무관한 ‘신적 존재’가 돼버린다. 인류의 지성을 숭앙하는 거야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성인이라 부르며 평범한 사람들과 분리시켜버리면, 그에게서 배울 것은 없게 되고 추앙만 해야 한다.

요즘 들어 특히 언어 인플레이션이 심하다. ‘무슨 무슨 천재’니 ‘무슨 무슨 신’이니 하는 말들이 많이 쓰인다. 심지어 ‘공부의 신’란 말까지도 듣는다. 생각해 보면, 이런 말을 쓰는 사람들은 아주 비겁한 사람들, 혹은 자신의 무기력을 합리화하는 ‘책임 회피자’들이다. ‘내가 그들보다 못난 것은 못난 게 아니다. 그들은 천재이고 신이니까’

초등생 시절 들었던, 에디슨의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이란 말 누구나 기억하리라. ‘신야자불과습자지문’(神也者不過習者之門), 곧 신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오로지 반복해서 익숙하게 하기 때문이다, 란 『유마경』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논어』를 읽고 난 뒤에 나에게 남은 느낌은 두 글자, 곧 고독이다. 공자는 매우 고독했다. (중략) 공자는 성자가 아니라 사람이었을 뿐이며, 출신은 비천했지만 고대의 귀족이 된, 입신의 표본이 된 사람이었다. (중략) 그는 ‘옛날의 도’에 대한 열정으로 주공(周公)의 정치를 회복해 천하의 백성을 안정시키려고 꿈꾸던 사람이었다.”

“공자는 대단히 불행했고 또 정말로 어찌할 도리가 없어 입술이 타고 입이 마르도록 초조했으며, 실패와 좌절 속에서 유랑하는 신세가 되어 마치 돌아갈 집이 없는 떠돌이 개와 같았다.”」 -리링(李零. 베이징대 중국문학과 교수)/『집 잃은 개』(喪家狗)-

리링 교수는 ‘상갓집 개’를 ‘집 잃은 개’로 달리 봤다. 먼저 ‘상갓집 개’부터 언급하자. 상갓집은 처갓집처럼 동의어 반복이다. 상가(喪家)에 이미 ‘집’이 있으니, 굳이 집이라는 군더더기를 붙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상가나 처가는 문어적이고 딱딱한 관공서 문서에나 쓰일 뿐, 입말의 어감에는 상갓집과 처갓집이 제격이다. 그래서 상가와 상갓집, 처가와 처갓집은 둘 다 복수표준어이다.

다음으로는 ‘상갓집 개’냐 ‘집 잃은 개’냐의 문제이다. 물론 어느 쪽을 택해도 의미에 대차는 나지 않는다. 다만, 지적 즐거움이나 훈련을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다. <공자세가>에는 ‘喪家狗’라 되어 있다.

첫대바기에 ‘喪家+狗’에서 ‘喪家’는 상갓집이고 ‘狗’는 개다. ‘상갓집 개와 같다’는 ‘의지할 데가 없어 굶주려 이리저리 헤매어 초라한’ 사람을 형용한다. 상갓집 개는 조문객으로 사람과 음식은 넘쳐나지만, 관심 바깥에 있기에 정작 돌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쫄쫄 굶는 처량한 신세가 된다.

공자가 조(曹)나라에서 송나라로 갔다. 거기서 환퇴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아 송나라를 떠나 정나라로 갔다. 그 정나라에서 ‘상갓집 개’란 말을 들었다. ‘喪家狗’를 ‘상갓집 개’로 번역해도 좋을 듯하다. 그러나 뭔가 좀 부족한 느낌은 없는가?

조송원 작가
조송원 작가

이에 반해 리링 교수는 ‘喪’을 ‘죽다’로 읽지 않고 ‘잃다’로 읽었다. ‘상실’(喪失)의 그 ‘상’이다. 그러므로 ‘상가구’는 ‘상갓집 개’가 아니라, ‘집 잃은 개’가 된다.

『논어』 등 경전을 통해서는 공자의 진면목을 볼 수 없다. ‘위대한 스승’이란 한 면만이 부각될 뿐이다. <공자세가>는 사마천이란 걸출한 역사가의 공자의 일생에 대한 간략한 평전이다. 고뇌하는 지식인, 원대한 꿈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정치인, 그 뜻이 좌절되고 곤궁한 처지에 몰리는 위대한 사상가의 인간적인 면모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공자는 우리가 미치지 못하는 저 높은 곳의 성인이 아니라, 너와 나 우리의 곁의 평범한 사람이되 흔치 않은 ‘위대한 인간’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인간적 고뇌에 차라리 가슴 여며지며, 더욱 ‘인간 공구(孔丘)’에 공감(empathy)하게 되는 것이다.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ouasaint@injurytim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