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539) 제6부 배반의 계절 - 제13장 폭설이 오고, 손재식 국장이 떠나고①
대하소설 「신불산」(539) 제6부 배반의 계절 - 제13장 폭설이 오고, 손재식 국장이 떠나고①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3.07.30 05:40
  • 업데이트 2023.07.27 18: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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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폭설이 오고, 손재식 국장이 떠나고①

파란 들판 가득 하얀 눈이 내리 듯 벼이삭이 펴고 참새가 날기 시작했다. 마을 입구나 들판에 하나둘 허수아비가 등장하면서 나락에는 물이 잡히고 그 나락이삭에 다시 노오란 결실의 빛깔이 내려앉으며 가을은 거대한 잔칫상처럼 들판가득 황금빛을 채웠다. 하늘도 높아가고 맑아가며 푸르러갔다.

무더위와 태풍이 말갛게 씻어낸 그해 가을의 들녘을 열찬씨 는 늘 혼자서 걸어야 했다. 처남 남근씨가 출항해서 출어도 못 하고 등산과 삼겹살과 시원소주에 빠진 김몽룡씨가 바빠 같이 산행이 안 되는 토요일마다 그는 기장, 철마, 정관, 좌천, 남창, 양산 동면의 벼가 익는 들판을 걸어 그리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아 쉬엄쉬엄 오르기 좋은 3,4백고지 높아야 5,6백 고지의 산을 부지런히 오르고 집에 돌아와선 지도에 붉은 표시를 하고 <등산기록>이란 폴더를 만들어 산 이름과 높이, 산기슭의 사찰이나 유적 등을 기록했다.
 
문태광이란 등산가가 쓴 <부산의 근교산>에 나온 대로 해운대 장산에 달린 간비오산, 옥류봉, 구곡산, 박걸산, 수령산 같은 작은 봉우리를 일일이 밟고 장산사, 안국사 같은 작은 절도 빠짐없이 산신각을 찾고 장산정상의 억새 벌과 장산마을의 잔치국수집도 안내서에 나온 데로 일일이 확인했다.
 
부산근교의 3대 악산이자 기장군의 최고봉인 603미터의 철마산에서 솥뚜껑의 사투리인 소두방산, 그러니까 솥의 모자라는 정관산이 이어져 정관면의 유래가 되었고 그 아래로 매암봉, 망월산, 백운산이 추모공원까지 이어졌고 동래부의 고지도(古地圖) 소산참(站)이라는 역명이 나오는 소산(蘇山) 벌에서 동쪽으로 문래봉, 함박산, 천마산을 거쳐 500미터가 넘는 주봉 달음산, 월음산을 거치면 동해남부선 일광역이 나왔다. 소산 벌 남쪽으로는 역시 400미터 급 옥류봉과 거문산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300미터가 채 안 되는 공덕산이 두구동으로 이어졌다.
 
또 금정산에서 부산대학과 부곡동을 건너 오륜대, 동대라는 옛 명승지가 있는 구월산이라고도 불리는 300미터 급 윤산을 건너면 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는 아홉산이 있고 그 산기슭에서 철마에서 정관으로 넘어가는 도로위의 야생동물이동로를 따라 걷다보면 사람을 도운 개라는 뜻의 의구(義狗)기념비가 나오기도 했다. 정관에 사는 벼슬아치가 동래부에서 퇴청하다 술에 취해 그 고개에서 잠이 든 찰나에 산불이 일어 덮치는 판에 따라다니던 개가 꼬리에 물을 묻혀 불을 꺼 주인을 살렸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개좌고개, 개좌산이라고 불리는 능산을 한참 지나가면 천주교재단의 실로암공원묘지를 껴안은 백운산이 나왔는데 인근에 오륜대저수지가 있어 초가을엔 알맞게 습기를 먹은 영지가 노랗게 얼굴을 내밀기도 했다.
 
그렇게 기장읍에 다다르면 그 뒤 쪽으로 일광산이라는 300미터급의 산이 나오고 자전거코스가 잘 알려진 나지막한 야산이 이어지는데 그 역시 아홉산이라고 불려 불과 십리도 안 떨어진 금정구의 아홉산과 헛갈리는 것까지 완전히 마스터했다.
 
 
그 밖에도 정관신도시 뒤에는 함박산이라는 400미터급의 동그란 산이 있고 낮은 능선을 따라 썩은덤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봉우리를 지나 장안사 척판암을 지나 삼각산으로 이어졌다.
 
또 양산 서창시장에서 동쪽으로 한참 걸으면 체육공원이 나오고 그 위에 제법 큰 저수지를 넘으면 시명사라는 절을 품은 시명산이 나오고 그 시명산에서 북쪽 능선을 타면 장안사를 품에 앉은 월광산이 나오고 거기에서 곧장 나아가면 부산, 울산, 경남 양산의 3개 시도가 만나는 중심 742미터의 대운산 정상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이렇게 수많은 봉우리를 토요일마다 한 두 봉우리씩 돌파해 추석이 지나고 가을이 이울어 11월이 되면서 마침내 부산의 해운대와 금정구와 기장군, 경남 양산군과 울산시 울주군을 아우르는 동남해안일대의 모든 산을 완등하고 만 것이었다.
 
 
그 제서야 옛 선비가 굳이 노모를 봉양하거나 선산을 돌본다며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속맘을 알 것도 같았다. 실권이 없으니 시비하는 사람도 없을 이치, 어차피 눈치놀음에 밝고 붕당을 짓거나 질시와 모함에 능한 무리를 이길 수 없고 절대 권력자의 눈 밖에 날 수 밖에 없다면 역시 그렇게라도 말하면서 제 스스로 물러나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었다. 열찬씨와도 결코 무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실속 없는 방재안전과장의 자리에 앉는 바람에 의회사무감사나 예산안심사에 어느 의원도 질문을 하거나 시비를 걸지 않고 그저 고생 많다고 치하만 하는 것은 망외의 소득이자 부수입만 같았다. 그렇게 맹물 같은 한 해가 흘러갔다.
 
 
해가 바뀌어 시무식을 하고 신년하례를 해도 한해를 열찬씨에겐 별다른 의욕도 변화도 없이 그냥 무심하기만 했다. 그래도 조금 변한 것이 있다면 그 바람에 물동이에 내려앉은 모래먼지가 조금씩 세월이 흘러 시나브로 가라앉아 밑바닥에는 언양사투리로 헤굼이라고 부르는 앙금으로 갈아 앉으면 물은 조금씩 맑아져 어느 듯 얼굴이 보이도록 투명해지듯 약간 허전하기는 하지만 마음자체는 상당히 맑아지고 또 밝아진 것이었다.
 
그러나 김모구청장과 추종세력은 목전에 닥쳐오는 위기감에 점점 불안해지는 모양이었다. 지금의 바닥민심으로는 박극제, 조양환 두 시의원 중 누가 공천을 받더라도 당선은 따 논 당상이며 아무리 현직 구청장이라 해도 무소속으로는 당선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제2기 민선 때 변모구청장 측근의 합천 출신 선거인명부 발췌사건 같은 예기치 못한 사고나 악재가 발생하지 않는 한 선거판은 누가 한나라당의 공천을 따느냐의 싸움일 뿐이라며 박, 조 두 시의원 중 누가 유기준 국회의원이나 당에 더 밀접하며 최후의 승자가 되어 공천권을 쥐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일 뿐이었다.
 
ⓒ서상균

그렇게 겉으로는 조용하고 속으로는 불안한 평온이 아닌 평온이 두어 달 흘렀을 때였다. 이제 막 서대신동의 언덕배기 밭에 파릇한 풀잎이 돋아나고 멀리 수평선위로 대마도의 윤곽이 또렷하게 다가오기 시작하는 봄의 문턱 3월초에 때 아닌 눈이 내린 것이었다. 열찬씨가 인사 문을 쓸 때 자주 인용하는 <사철 꽃이 피는 따뜻한 남쪽 바다 부산 서구>에 뜻밖의 손님처럼 슬며시 찾아와 진작부터 봄기운을 물씬 풍기며 남도의 봄을 장식하던 붉디붉은 동백꽃봉오리에 슬며시 내려앉는 눈발을 보며 저러다 곧 그치겠지, 금방 녹고 말겠지 하며 눈 구경을 한 지가 벌써 10년도 넘은 사람들이 모두 이 뜻밖의 사태에 깜짝 놀라면서도 빙그시 웃은 것이 놀랍기 보다는 반가운 모양이었다. 이제 아예 작심이라도 하고 내리듯 점점 눈송이가 굵어지며 금방 길과 화단과 지붕에 하얗게 쌓이기 시작하자 구청사를 찾아온 산책을 하거나 민원을 보던 내방객들이 빙긋 웃으며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하고 부모의 손을 잡은 아이들이 폴짝폴짝 뛰자 강아지들도 덩달아 컹컹거렸다.

 
“이게 도대체 뭔 이변이야? 부산에 눈이 와서 쌓이는 경우가 다 있다니, 시절이 하 뒤숭숭하니 날씨마저 종잡을 수 없는 것인가?”
 
창밖을 내다보던 안승덕 민방위게장이 안경을 벗어 닦으면서 말하자
 
“글쎄요. 부산에 사는 젊은 연인끼리 우스개로 하는 말로 ‘첫눈이 내리는 날 다시 만나자.’는 약속은 ‘우리 이제 그만 헤어지자.’라는 뜻이라는데 말입니다. 이 엉뚱한 이변이 도대체 무슨 심상찮은 징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종철 도로관리게장도 끼어드는데
 
“그러지 말고 아미동과 서대신4동사무소에 전화를 해서 까치고개, 감천고개, 구덕령의 상황이 어떤지 확인해 봐요. 만약 제설작업을 해야 될 정도라면 이것 참 큰일인데.”
열찬씨의 말에
“그러게 말입니다. 지난 번 예산심의 때 제설용 염화칼슘구입비를 요구했다가 부산에 무슨 눈이 오느냐고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때 혹시 아냐고, 재난은 늘 방심할 때 찾아온다던 과장님의 말씀이 꼭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고...”
 
최정길 재난관리계장이 걱정스레 열찬씨를 쳐다보는데
 
“경사가 심한 곡각지점 언덕마다 설치한 모래와 제설 장비함은 다 제대로 있는지 모르겠네. 아무튼 도로관리계에서는 준설인부, 도로인부, 준설차와 노랑차도 대기시키고 지역경제과 녹지인부도 협조를 요청하계. 그리고 아미동, 서대신4동에 상황이 확인되는 데로 우리 과의 차량과 인부를 내보내고 각 실과에서는 담당동의 제설작업을 돕도록 미리 방송 안을 작성해놓게. 또 초장동, 암남동의 고갯길 상황도 확인하고.”
 
지시를 하고 밖을 내다보는데 제주도에서 들여온 사철 파릇한 잎을 자랑하는 구실잣밤나무와 먼나무의 연두 빛 이파리가 하얗게 눈을 덮어쓰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못 되어도 20년은 되었을 옛날 사촌처남 남근씨의 결혼식 날 저녁에 신혼부부는 신혼여행을 가고 가까운 친척끼리 양정 남숙씨의 집에서 커다란 마구로를 썰어 술추렴을 벌이는데 문득 눈발이 날려
 
“아따, 우리 처남 겁나게 잘 살 거구만. 부산에 평생 안 오는 눈이 다 오네.”
 
하면서 웃었는데 눈이 제법 소복이 쌓여 택시조차 다니지 못 하여 벽에 기대 대충 눈을 붙이고 아침에 근무지 연산4동사무소까지 걸어가던 일이 눈에 선했다. 혁우라는 큰 아들이 벌써 고등학생이 되었다던가...
 
“과장님, 이거 점점 심상찮습니다. 아미동 까치고개, 감천고개에는 차량이 거북이걸음을 하다 모두 멈춰 섰고 구덕령고갯길은 눈밭에 미끄러진 차량들이 가벼운 접촉사고까지 나서 지금 서부경찰서의 경찰관이 나왔답니다.”
“그럼 지금 바로 구내방송을 하게. 민원담당을 제외한 직원들이 모두 담당 동으로 나가 제설작업을 해 막힌 도로를 뚫도록. 그리고 노랑 차는 꽃마을로, 준설 차는 아미동으로 인부를 싣고 나가고 서부서에 전화해서 주요지점에 교통통제를 요구하게.”
“청장님 결재는 요?”
“급한데 결재는 무슨? 내가 한 바퀴 돌면서 설명하고 바로 꽃마을로 나갈 테니 강세훈씨 순찰차 대기시키게.”
 
하고 국장실, 부구청장실, 구청장실을 한 바퀴 도는데
 
“그래요. 이 봄에, 이 부산에 웬 눈이 다 오고 난리야! 우선 현장상황을 보고 전화를 하세요. 나도 한번 나가보든지.”
 
세 사람이 비슷한 어조로
 
“수고 많소!”
 
머리가 허연 최고참사무관이 눈을 치러 가는 모습을 딱한 듯이 바라보았지만 구청장은 무심한 척 하는 것 같았다.
 
청내 방송을 들으며 순찰차를 타고 나서는데 버스와 택시들이 모두 엉금엉금 기고 버스정류소에는 행인이 거의 끊기고 단지 자신의 가게 앞의 눈을 쓰는 사람과 겅중대는 아이들과 강아지들이 보일뿐이었다.
 
“과장님, 더 이상은 위험합니다.”
 
구덕실내체육관에서 광성공고까지 비스듬한 언덕길을 힘들게 운전한 강세훈씨가 마침내 민방위교육장 앞에서 차를 세웠다.
 
“아이구야, 이거 장난이 아니네.”
 
차에서 내려서자말자 발이 푹푹 빠졌다. 조심조심 한 발을 내딛는데 미끄덩하면서 도로 뒷걸음을 칠 수 밖에 없었다. 배수로 위의 진달래꽃 꽃대를 단단히 잡고 조심조심 발을 내딛어도 자꾸만 미끄러지는 것이 급하게 구두를 신고 청장실에 갔다가 운동화로 갈아 신을 염도 않고 바로 온 것이 문제였고 더더욱 밑창을 갈 때가 다 된 낡은 구두라 도무지 앙금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던 강세훈씨가 재빨리 건설인부휴게실로 달려가더니 낡은 운동화 한 켤레를 들고 왔다. 인부들이 슬리퍼처럼 빠개 신던 폐품이었지만 눈길을 올라가기에는 한결 나았다. 둘이 비틀거리며 평소 7,8분이면 오를 길을 근 30분이나 걸려 버스정류소가 있는 구덕령 안부(鞍部)에 도착하자
 
“아이구, 문화관광과장님!”
“아이구, 이 실장님!”
“수목원 자치생활과장님!”
 
한창 제설작업에 열중하던 오리백숙집 송육수사장, 일동이네집의 김일동씨를 비롯한 꽃마을 상인 여남은 명도 보이고 노랑차를 세워놓고 이종철도로계장과 서정미주무, 김반장과 건설인부들도 부지런히 오삽이라고 불리는 넓은 삽과 빗자루로 밀고 쓸고 제설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감사실장님까지 직접?”
 
장갑을 끼고 삽 하나를 받아든 열찬씨를 보고 기러기구이전문 김일동 사장이 쳐다보는데
 
“지금은 실장이 아니고 방재안전과장으로 나왔지요. 내가 이래 봐도 춘천 군견훈련소나 철원 백골부대 철책선에 근무해서 제설작업이라 하면 한 제설 하던 내무반장 이하사아잉교?”
 
하면서 오삽을 밀어나가니 벌서 입에 막걸리냄새를 풍기는 송육수씨가
 
“자, 과장님. 추운데 막걸리나 한 잔 하고 하십시다.”
 
손을 잡고 막걸리와 두부안주를 건넸다.
 
이어
 
“과장님, 수고 많습니다.”
 
교통통제를 하러 나왔던 서부서의 경찰관이
 
“밑에 광성공고 앞과 여기 버스정류소 앞 양쪽에 바리케이드를 세웠습니다. 나중에 눈이 그치면 상황 봐서 과장님과 의논해서 통제를 풀기로 하겠습니다.”
 
하고 자신도 장갑을 꼈다.
 
그렇게 두어 시간 그야말로 관과 민이 하나가 되어 열심히 제설작업을 하자 입구의 광장은 물론 서쪽으로는 구덕수목원입구까지 동쪽으로는 골프연습장입구까지가 뚫리고 골프연습장에 주저앉았던 차량들이 슬슬 몰려나와 경찰관이 호각을 불어 제지시키고
 
“과장님, 교통통제를 풀까요?”
 
열찬씨를 바라보는지라
 
“글쎄요? 내가 뭘 알아야지. 제설전문가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망설이다가
 
“이 계장, 밑에 정현오씨한테 전화해보소. 광성공고 앞까지 완전히 눈을 쓸었는지”
 
해서 이미 제설이 완료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사무실로 전화해 초장동, 아미동, 암남동의 상황도 알아보라고 했다. 그 사이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본 경찰관이
 
“현장의 구청과장님하고 판단해서 해제하랍니다.”
 
하는 지라
 
“보소. 노랑차기사님, 그라고 강세훈씨! 직접 운전대를 잡는 사람 입장에서 한번 판단해보소. 이 정도면 운행해도 될는지?”
 
하자 나이가 많은 노란차기사가
 
“예. 눈도 치고 모래도 깔았으니 우리 같은 큰 차는 문제가 없는데 승용차나 작은 차는 아직도 좀...”
 
모두들 똑 부러지는 정답이 안 나오는지라
 
“자, 그러면 노랑차가 한번 내려가 보소.”
 
하고 무난하게 내려가자
 
“해제합시다. 단, 얼마간은 조심하라고 주의는 주면서.”
 
열찬씨가 결단을 내리자
 
“예. 알겠습니다.”
 
경찰관과 인부들이 바리케이드를 치우고
 
“미끄럽습니다. 조심해서 내려가세요.”
 
주의를 주면서 차 간격을 띄워 천천히 내려 보내니 10여 분만에 완전소통이 되고 밑에서도 마을버스가 올라오며
 
“헤이 오랜만이야!”
 
기사들끼리 오랜 친구라도 만난 듯 기분 좋게 손을 흔들며
 
“일 마치고 한 잔?”
“오케이!”
 
손을 뒤집어 술 마시는 시늉을 하는 것이 오랜만의 눈에 상당히 기분이 들뜬 것 같았다. 구청장실로 전화를 걸어
 
“청장님, 꽃마을에 제설작업을 완료하고 교통통제를 풀었습니다.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수고했네.”
 
모처럼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사무실로 돌아오니
 
“야, 기록이랍니다. 기록!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부산에서 36.8미리의 눈이 내린 것은 처음이랍니다.”
 
사무실을 지키던 조명순계장이 탄복을 하는데
 
“과장님! 아무래도 우리 과장님이 일을 몰고 댕기는 것 같습니다. 문화관광과장 때도 그렇게 일을 많이 떼 오더니 방재안전과장이 되자 말자 단 한 번도 없던 지진에 초강력태풍 나비에 폭설까지 말입니다.”
 
안승덕 계장이 애매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며 웃으니
 
“맞아. 나도 우리 과장님하고 몇 번 같이 근무했는데 한 번도 조용하게 넘어간 적이 없었지. 우째 보면 일을 몰고 다니는 것 같고 우째 보면 일 자체를 즐기는 것도 같고.”
 
최정길 계장도 맞장구를 치자
 
“과장님, 모처럼 땀을 빼니 목이 칼칼하네요. 저녁에 한 잔 어때요?”
 
꽃마을 버스기사들처럼 주먹을 뒤집어보였다. 열찬씨가 서정미씨를 불러
 
“서 주무, 저녁식사 겸 직원회식을 하면 어떨까?”
 
묻고 컴퓨터를 켜 밀린 결재서류를 읽어보는데
 
“과장님, 여직원들은 대체로 난색을 표합니다. 갑작스런 일이라 식구들 저녁도 그렇고, 또 기관운영비도 그렇고...”
“그래요? 그런데 김은숙씨 같은 처녀들은 왜?”
“아이구, 과장님 김은숙, 차태종, 장도영같은 처녀총각들은 데이트해야지요. 명색 첫눈이 온 날인데.”
“그렇구나.”
 
곰곰 생각하던 열찬씨가 시간을 확인하고
 
“그럼 이렇게 하지. 서무 박 여사랑 직원 몇이 정문 앞에 가 서 순대랑 만두, 튀김과 오뎅을 넉넉하게 사오세요. 사무실에서 간단히 하고 처녀총각은 데이트를 하고 기혼자들은 식구들이랑 첫눈기념 외식이라도 하게.”
 
하고
 
“이 사람들아, 지진이고 태풍이고 폭설이고 전부 지구온난화와 기상이변 때문이지 우째 이 선량한 과장 탓이란 말이고?”
 
이번에는 열찬씨가 직원들을 비잉 둘러보는데
 
“아이구, 과장님, 옛날부터 날씨가 궂거나 지랄 맞으면 예사로 호랑이 장가간다 카거나 무당 날구지한다 카는데 그 기 다 어데 헛말이겠능교?”
 
이종철 계장이 가까운 포항출신이라 어렵잖게 언양말투를 흉내 내는데
 
“그려. 우리 과장님이 호랑이는 호랑이지. 일이 생기면 태풍처럼 밀어붙이는 거 하나는 말이야.”
 
안승덕 계장이 결론을 내렸다. 밖에 나갔던 직원들이 돌아와 과장실 원탁과 도시관리계 책상 위 두 곳에 종이를 깔고 오뎅과 순대, 파전과 삶은 달걀, 만두 등을 주욱 늘어놓자
 
“어이, 박여사! 그 거.”
 
이종철 계장이 서무를 쳐다보자
 
“아직 퇴근시간 5분전인데요.”
“난 시간이 딱 맞을 줄 알았는데 박여사가 너무 빨리 장을 봐서 오는 바람에.”
 
하니 서무가 소주 두 병씩을 테이블에 얹었다.
 
“자, 과장님. 미리 부어놓고 딱 5분만 기다렸다 마십시다.”
 
 
열찬씨에게 먼저 잔을 건네 술을 붓는데
“귀신도 사(私)가 있고 법에도 정상참작이 있는데 오늘 같은 날 방재안전과에는 정상참작이 있어야지. 자, 다들 한잔씩 합시다. 수고 많았어요!”
 
열찬씨가 잔을 들어 모두 눈을 맞춘 뒤 한 잔을 하니 금방 술병이 바닥이 나자
 
“아니 우리 박 여사 손이 이렇게 작나? 이것 참 입만 버렸네.”
 
이종철 계장이 못내 아쉬워하는데
 
“제가 어데 서무를 일박이일 봅니까?”
 
박 여사가 소주 두 병씩을 꺼내 테이블에 놓으며
 
“이제 더는 없습니다. 이팔이 십육, 직원 16명에 소주 반병씩 여덟 병이면 정량이 끝입니다.”
 
하면서 열찬씨의 잔을 채워주었다.
 
마침내 먹자판이 끝나고 다들 컴퓨터를 끄고 퇴근준비를 하는데
 
“어이, 엘리트 장도영씨! 그 기상이변이라는 엘니뇨, 라니뇨가 다 뭔지 설명을 좀 해보소.”
 
검붉은 얼굴의 안승덕 계장이 묻자
 
“계장님, 저 컴퓨터 껐는데요. 내일 아침 일찍 검색해 드릴 게요.”
 
하는 품이 데이트약속이 잡힌 모양이었다.
 
“그래요? 엘니뇨, 라니뇨라면 내가 좀 알지.”
 
열찬씨가 빙그레 웃자
 
“예? 과장님이요? 역시 모르는 것 빼고 다 아는 분이시네.”
“자, 한번 들어보소. 두 기상이면현상이 공교롭게 니뇨, 니뇨, 뇨자로 끝나는 게 심상찮단 말이지. 말하자면 오줌 뇨(尿)자로 당뇨(糖尿), 요로결석(尿路結石), 요실금처럼 어딘가 지구의 배수시설, 배뇨시설에 이상이 온 거지. 그 원인이 지구인의 폭식인지 무질서와 쾌락에 빠진 생활습성이 나쁜 탓인지 아무튼 사람이나 짐승의 생체리듬과 같은 지구의 리듬과 순리를 거역한 때문이지.”
“에이...”
“히야!”
“믿거나 말거나 자유지만 생각은 한번 해 보소. 내가 꼭 헛말을 했는지.‘
 
뭔가 찝찝한 여운을 느끼며
 
열찬씨도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