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디오게네스는 시실리 왕 디오니시우스로부터 어떤 제안을 받았다. 디오게네스는 그 제안을 딱 잘라 거절했다. 플라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먹을 샐러드를 씻고 있는 디오게네스에게 플라톤이 한 마디 던졌다.
“네가 디오니시우스 왕에게 조금만 더 공손했더라면, 넌 네 샐러드를 손수 씻을 필요가 없을 텐데.”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받아쳤다. “네가 네 샐러드를 직접 씻는다면 넌 디오니시우스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을 텐데.”
#2. 천하에 두려운 것은 오직 민(民)이다.
조그만 일이 이루어진 것을 즐거워하고, 일상에 구애되어 순순히 법을 지키고, 윗사람에게 사역당하는 자를 항민(恒民)이라 한다. 이들 항민은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
피부를 벗기고 골수를 뽑히는 가혹한 착취로, 수입과 소출을 다 빼앗기고 끝없는 요구를 받아들이면서도, 슬퍼하고 탄식하며 윗사람만 탓하는 자는 원민(怨民)이다. 이들 원민은 반드시 두려운 것은 아니다.
백정 장사치 등 천업(賤業)에 몸을 숨기고, 남몰래 다른 마음을 품고 천지 사이를 엿보다가 요행이 시대의 변고가 있으면, 자기의 소원을 실행해보려는 자들은 호민(豪民)이다. 이들 호민이야말로 크게 두려워할 존재다.
호민이 나라의 허점을 정탐하여, 일의 기미에 편승할 기회를 엿보다가, 팔을 휘두르며 한번 밭고랑에서 부르짖으면, 원민들은 그 소리를 듣고 모여들어 꾀하지 않아도 함께 외친다. 그러면 항민들도 살길을 찾아 부득불 호미와 쇠스랑을 들고 그들을 따라서 무도한 자들을 죽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허균/『성소부부고』/「호민론」-
디오게네스(기원전 412년경~323년)는 플라톤(기원전 427년경~347년경)과 실제로 교류가 있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기원전 470년경~399년)의 제자이고, 디오게네스는 소크라테스의 제자 안티스테네스의 제자이다. 플라톤은 도시국가에서 전통적인 사상 체계를 세운 사람이고, 디오게네스는 모든 관습과 허세를 타파해야 한다고 한 사람이니 사이가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디오게네스는 정말 ‘개’ 같이 살고 싶어 했다. 시신 매장용으로 쓰이는 커다란 독(항아리) 속에서 혼자 살았다. 가진 것이라고는 옷 한 벌과 물 컵 하나가 전부였다. 어느 날 개가 혀로 물을 먹는 것을 보고는, “잠깐, 그러고 보니 컵도 필요 없네” 하면서 컵도 버렸다고 한다.
디오게네스는 개를 스승으로 삼고 스스로 개라 부르며 살았기 때문에 ‘개’를 의미하는 cynic으로 불렸다. 이 cynic의 번역어가 ‘견유’(犬儒. 개 같은 선비)이다. 하여 디오게네스를 키니코스학파 혹은 견유학파로 부른다. 견유주의를 영어로 ‘cynicism'이라 하는데, 디오게네스 철학은 ‘냉소주의’의 뜻과는 전연 상관이 없다.
정말 ‘개’ 같이 살았지만 꽤 유명인사였음은 분명하다. 당대의 석학 플라톤과 교류했다. 최고의 권력자 알렉산드로스 왕까지 디오게네스를 찾아왔을 정도다. ‘신’이라 자칭할 정도로 오만한 알렉산드로스가 무엇을 원하는지 묻자, “햇빛 가리지 말고 비켜 서 주시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신적 권력자 알렉산드로스가 할 일 없어 거지같은 철학자를 찾았겠는가. 이 ‘개’ 철학자가 그만큼 당대에 영향력이 있었다는 방증이다.
디오게네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시대에 살았지만, 제시한 학설에서 풍기는 기질은 헬레니즘 시대에 속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을 밝게 바라본, 그리스의 마지막 철학자이다. 이후 철학자들은 모두 이런저런 형태로 은둔 철학을 내놓았다.
디오게네스는 ‘시니컬한’(cynical. 냉소적인. 인생을 하찮게 여기는) 철학자는 결코 아니었다. 활기 넘치는 성격이었으며, 자신이 판단하기에 당대에서 가장 적합한 ‘행복’을 추구한 철학자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학설은 헬레니즘 시대의 모든 학설(키니코스학파, 회의주의학파, 에피쿠로스학파, 스토아철학)과 마찬가지로 현실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자연스런 열정마저 잃어버린, 기진맥진한 사람들에게나 호소력을 갖는 학설이었다. 그리고 실제 기원전 3세기 초에는 디오게네스의 키니코스학파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인물과 사상은 시대의 산물이다. 그 인물과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선행 지식이 필요하다. 헬레니즘 시대(기원전 323년~기원후 146년)는 그리스 고전기와 로마시대 사이로 ‘체념의 시대’였다. 왜 체념의 시대였는지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난세(亂世)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에 주목해 보자.

허균(1569~1618)은 세 부류, 곧 삼민(三民)을 들었다. 세상에 순응 혹은 야합하는 항민, 원망만 하는 원민, 혁명을 꿈꾸는 호민이다. 허균은 불교는 물론 노장 사상까지 섭렵한 지식인이었지만, 근본적으로 명문 집안 출신의 유학자였다. 하여 난세일망정 사회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었다. 아니, 적극적으로 혁명적인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치세(治世)에 대한 염원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혁명적인 삶을 능지처참으로 마감했다.
반면에 디오게네스는 사람은 아무런 사회적 의무도 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재능과 노력이 보상을 받지 않는 난세에 인간은 어떻게 해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삶의 질은 욕망을 분모로 하고 성취를 분자로 하는 방정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곧, ‘성취/욕망’인 것이다.
디오게네스는 욕망을 줄임으로써 삶의 질을 높이고자 했다. 반면, 『홍길동전』에서 표현했듯 허균은 혁명을 통해서라도 성취를 이루려고 했다. 허균이 약 2천 년 전의 디오게네스의 철학을 접할 수 있었더라면, 개 같이 산 디오게네스를 ‘개 같은 인생’이라고 간단히 치부해버렸을까?
허균의 혁명론인 <호민론>은 어쩜 시대와 시절에 야합하는, 해바라기 속성의 ‘항민’에 대한 질타가 아닐까? 허균 이후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개 같은 세상’을 만드는 ‘개’ 같은 위정자들과 그에 빌붙는 ‘항민’에 대해, 허균은 정말 ‘개’ 같이 살지 말라고 호통 치지 않을까?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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