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명히 잔인한 이 수단에 의해 전쟁을 끝내는 것이 가볍게 착수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현재로서 그 당시에 더 나은 길이 열려 있었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한 좋은 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펜하이머/1965년 CBS와의 인터뷰 중에서-
「인터스텔라」(2014)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새 영화 「오펜하이머」가 15일 한국에서도 개봉한다. 이 영화는 지난달 20일 북미 개봉 뒤 많은 찬사를 받았고, 개봉작 최고 오프닝 및 역대 전쟁영화 최고 수익 등 갖가지 흥행기록까지 가지고 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의 삶을 그린 영화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이 중심이 되고 영국과 캐나다가 공동으로 참여했던 핵폭탄 개발 프로그램이 ‘맨해튼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과학자가 오펜하이머이다.
오펜하이머와 그의 많은 동료들은 독일인들이 핵폭탄 개발에 앞서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 믿음이 현실화할 경우 그 참담한 결과도 이해하고 있었다. 연구에 박차를 가했고 독일보다 먼저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공시켰고, 마침내 전쟁은 종식되었다.
오펜하이머는 누구나 아는 유명인이 되었다. 그의 이미지는 인기 있는 잡지의 표지를 빛냈고, 그는 최고 수준의 정치권력에도 접근하게 되었다. 그는 이 유명세를 자신이 개발에 도움을 준 핵무기를 어떻게 통제해야 할 것인지를 구체화하는 데 이용했다. 그와 그 동료들은 정치 지도자들이 이 문제에 대한 국제적인 협치(global governance)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낭비적이고 포괄적인 핵 군비 경쟁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펜하이머는 「원자과학자 회보」(the 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와 같은 단체를 만들어, 과학자·법률전문가·경제학자·정책실무자 등 최고의 사상가를 끌어들여 새롭고 강력한 기술을 관리하기 위한 혁신적인 해결책을 제안하도록 도왔다. 20세기 후반 어렵게 이루어진 군비통제협정들 중 많은 것들은 오펜하이머가 지지했던 기관들의 덕분이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가 왜 핵무기 통제에 앞장섰을까? 1945년 7월 16일 역사상 최초의 핵폭발 실험인 ‘트리니티 실험’이 미국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 인근에서 실시되었다. 실험 성공 후 두 종류의 핵폭탄이 만들어졌다. ‘리틀 보이’와 ‘팻 맨’이다. 1945년 리틀 보이가 8월 6일 히로시마에, 팻 맨이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투하 후 수초 만에 십 수만 명이 살해되었다. 이뿐 아니다. 이후 핵무기 실험으로 방사능 낙진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 미국인들과 알제리인들, 호주인들, 카자흐스탄인들, 그리고 수많은 태평양 섬 주민들을 독살했다.
오펜하이머는 이러한 후과를 예상했을 것이다. 그래서 훗날 트리니티 실험을 언급하며,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자책했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오펜하이머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는 본디 좌파 성향이었고, 평화주의 신념의 소유자였다. 전전(戰前) 교수 시절 대공황으로 유행하던 좌파사상에 경도되기도 했다. 여러 좌파운동에 참여했고, 그의 주위에 공산주의나 좌익사상에 경도된 인물들이 많았다. 친동생인 프랭크 오펜하이머는 잠시 공산당에 익명으로 가입했던 적이 있었다. 아내인 키티 역시 한때 좌익사상에 깊이 경도된 적이 있었다. 결혼 전 애인 진 태트록도 역시 좌익사상을 표방한 인물이었다.
오펜하이머의 이런 이력은 맨해튼 프로젝트을 시작하기 직전에도 문제가 되었다. 미국 장성들은 오펜하이머의 충성심과 사상을 의심했을 정도였다. 다만 맨해튼 계획 당시에는 오펜하이머의 능력이 당장 필요하기도 했고, 그와 많은 대화를 했던 미국의 장성들, 정치인들은 그가 한때 좌익사상에 몸담았던 적은 있지만, 국가 기밀 취급에 적합한 인물로 결론을 내렸다. 실제로 매카시즘 광풍으로 오펜하이머가 소련 스파이라는 마녀사냥을 당할 때, 맨해튼 계획의 총 책임자 레슬리 그로브스 육군 소장은 ‘오펜하이머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의심하지 않는다’는 호의적인 증언을 했다.
오펜하이머는 원자과학자 회보의 구성원이기도 한 동료 과학자 에드워드 텔러가 옹호하는 수소폭탄에 대한 추가 투자를 반대했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의 입증된 파괴력을 고려할 때, 미국이 그러한 무기의 필요성에 회의적이었다. 그의 이 반대는 대가를 치렀다.
1954년, 오펜하이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미국 원자력위원회 보안 청문회를 강요했다. 오펜하이머의 간첩혐의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 청문회는 ‘레드 공포’ 시대의 캥거루 법정(엉터리 재판. 인민재판)처럼 진행되었다. 그 결과 오펜하이머는 보안 허가를 박탈당하고, 미국에 대한 그의 충성에 대해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 받았다. 사회적 대의(大義)에 헌신한 뛰어난 물리학자인 오펜하이머는 결국 인생이 파산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오펜하이머」의 원작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저자 카이 버드는 영화 개봉을 기념한 <뉴욕 타임스> 기고에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가 거짓 고발을 당하고, 공개적으로 모욕당한 ‘오펜하이머 사건’은 이후 과학자들에게 공공의 지식인으로서 정치무대에 나서지 말라는 경고가 됐다”고 썼다.
오펜하이머가 초대 회장이었던 원자과학자 회보의 현 회장 레이첼 브론슨은 <시카고 트리뷴>에 영화 「오펜하이머」가 이처럼 대중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에 대해 칼럼을 기고했다.(Rachel Bronson/‘Ways to honor Oppenheimer's legacy’/The Korea Herald/Jul 31, 2023)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주제에 대한 적절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시대정신(Zeitgeist)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오펜하이머의 시대처럼 과학적 흥분(인공지능)과 안보에 대한 두려움(우크라이나 침공)과 디스토피아적 정치(진영대결)가 난무하는 시대이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과학(기술)이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앞지르고 있던 순간을 상기시켜 준다. 이 영화는 과거 오펜하이머가 직면했던 상황에 현재 우리 자신도 처해있음을 자각케 한다. 우리가 지구상의 삶의 미래를 해치는 것보다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이 만든 기술을 관리하는 데 시간과 자원 그리고 노하우를 투자할 것인가?
우리는 과학자들이 다른 정치적 실천가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함께 정치적 논쟁에 참여하도록 격려하고, 필요할 때 그들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가 불성실 혐의로 변질되지 않는 정치 문화를 확립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이 질문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오펜하이머의 유산을 기리는 것이 될 것이다.
브론슨의 시대 진단은 현재 한국 현실에서 더욱 절박하고 절실하다. 잼버리 감사로서 행사장에 직접 참가했던 전수미 변호사는 ‘윤석열 정부는 ‘압·구·정’ 행태를 보인다’고 말한다. 정말 그렇다. 윤 정권이 하는 게, 할 수 있는 게 압수수색, 구속영장, 정치표적수사뿐이다.
현재의 축적이 곧 내일이고 미래이다. 현재의 이룸이 없이는 내일도 미래도 없다. ‘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가 불성실 혐의로 변질되지 않는 정치 문화’, 윤 정권에서는 가망이 없다. 그럼 우리는 지금 이 당장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ouasaint@injurytim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