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큰누님은 가고 아토피가 오고②
“언제 한국에 오실 기회가 생기면 꼭 연락 주십시오. 우리 고향 언양의 반구대암각화도 구경시키고 언양불고기도 대접하고요.”
“예. 저도 반구대암각화는 꼭 보고 싶어요.”
하며 둘이 오래 손을 잡고 흔들다
“좋은 친구였어요. 고마웠어요.”
스스럼없이 서로 포옹하려다 마침 뒤에선 구엔씨와 눈이 마주쳐 열찬씨가 멈칫하는데 뒤돌아선 뜨엔씨가
“여보, 한국의 시인님이 가신데요.”
하고는 다시 열찬씨를 가볍게 포옹하자 구엔씨도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얼추 한나절이 걸리는 김해공항까지의 비행시간 내내 열찬씨는 큰누님 갑찬씨의 생각에 빠져있었다. 벌써 근 20년 전에 생질 신철이를 장가보낼 때였다. 당시 사직동에 있었던 시외버스터미널 앞의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가족사진을 찍을 때였다.
“보래이, 동생아, 오늘 우리 7남매가 다 모였제. 이래 하나도안 빠지고 모인 것이 처음인 것 같다. 모인 김에 가족사진이나 찍자.”
하는 바람에 막내 백찬씨를 불러 이미 식당으로 올라간 김해 순찬씨, 영주의 일찬씨 내외를 비롯한 형제들을 불러오는데
“아이구야! 우리 새이가 우째 이런 생각을 다 했노? 환갑이 다 되가니 가리느까 시근이 들기는 드는구나.”
하고
“뭐 촌사람들 관광 간 것도 아이고 사진을 말라꼬 찍어쌓노. 촌사람얼굴이 말키 그 얼굴이 그 얼굴이지.”
연신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김해댁이 한마디 거드는 것은 그럴 줄 모르고 입성이고 머리를 제대로 하고 오지 못한 것이 아쉬운 것 같았는데
“그래도 맏이가 다르기는 다르네. 개혼한다고 7남매가 하나도 안 빠지고 다 오네. 논밭전지 다 팔아 묵고는 언양 오기를 얌생이 소금 먹듯이 싫어하더니.”
금찬씨가 덕찬씨 들으라는 듯 말하자
“새이 니는 마 그만해라. 얌생이가 소금 먹으면 죽는데 오늘 같은 잔칫날 그 기 어데 할 말이가? 말이가 중까랭이가?”
하며 옆구리를 찌르자
“말이사 바로 하자면 우리 성제들이 못 모인 것이 어데 다른 사람 탓이가? 잔치는 고사하고라도 아부지, 엄마 돌아가셨을 때 명색 맏이가 되어 두 번 다 못 온 사람이 눈데?”
자신의 삶이 고달프니 비록 형제간이라도 남 좋은 일이 그리 보기 좋은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이구, 저 놀부심사하고는...”
덕찬씨가 혀를 끌끌 차는데
“처형! 마 잔주코 사진이나 박읍시다. 이리 오소.”
코가 덩그런 제부 고서방이 옆으로 당기자 입을 다물었다.
그 후 딱 형제간 수대로 사진 일곱 장을 빼서 집집이 나눠주며 그렇게 흡족할 수 없었던 갑찬씨는 뜻밖에도 남동생 일찬씨가 먼저 죽자 이번에도 역시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참석을 못 했지만
“아이구, 일찬아! 내도 있고 김해 김서방네도 있는데 니가 먼저 가면 우짠단 말이고, 아이고!”
명절 때 열찬씨나 백찬씨가 가기만 하면 가족사진 속의 일찬씨를 쓰다듬으면 탄식을 하곤 했는데 이제 바로 자신이 죽고만 것이었다.
(만약 어제 내가 꿈을 꾼 그 시간에 죽었다면 아직 입관은 안 했겠지...)
시간을 보니 오후 7시. 아직도 도착시간은 한 시간 이상이나 남았다. 하늘같은 부모가 혹시 다시 소생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존엄성 때문에 금방 묻거나 태워버릴 수 없다며 사망 24시간이 지나야 사망진단서가 나오고 입관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동사무소에서 매화장신고업무를 담당했던 열찬씨가 모를 리 없었지만 그게 법대로 다 지켜지는 것도 아니었다. 사고무친의 외톨이나 끼니도 잇기 어려운 집 또는 부모를 앞선 참척이나 악상, 혹은 장티푸스와 같은 전염병인 경우 2일장이라 해서 그 이튿날 묻거나 혹은 사망당일에 태워버리는 경우도 없지 않는 것이었다.
공항에 내리자말자 영순씨에게 전화를 걸어도 어쩐 셈인지 신호가 잘 떨어지지 않더니 의회의 봉고차를 타고 서구청에 도착해 서로 악수를 하며 해단식의 인사를 나눌 때 비로소 전화가 연결이 되었다.
“별일 없나?”
다짜고짜 묻는 열찬씨에게
“아이구, 이 양반아, 근 일주일 만에 마누라 목소리 들으면서 그 기 무슨 말잉교? 그래 몸은 성하고 재미는 있고요?”
“그기사 첨 여행인데 좋지. 그런데 집에는 별일 없나? 알라도 잘 크고.”
“야. 그런데 신평형님이 그만...”
“알았다. 어제 초저녁이제?”
“맞소. 그런데 그걸 당신이 우째 아요?”
“그 시간에 내 한테 왔더라.”
“누가? 설마 형님이...”
“그래. 설핏 잠이 들었는데 꿈에 왔더라.”
“아이구야! 맨날 부산동생 열찬이, 열찬이하디마는. 하기야 부모도 남편도 다 죽고 딸 셋은 다 제 살기 바빠서 속이나 썩히고 돈이나 뜯어가고 하나 뿐인 아들도 그저 돈이나 밝히고 제 자식만 알아 혹시 어느 형제가 논밭이라도 내어놓으랄까 봐 눈이 번들번들한 판에 누구를 믿고 의지하겠노, 전처자식을 의지하겠나, 돈 떼먹고 도망간 맏사우를 의지하겠나?”
“마 시끄럽다. 송신쿠로 그 기 다 무슨 소리고?”
“당신이 참 대단하단 말이요. 여북하면 죽기 전에 그 먼 베트남까지 당신을 다 찾아갔겠능교. 이 너른 천지에 당신하나밖에는 믿고 기댈 데가 없었던 거지요. 아이구, 안타까워라...”
“그건 그렇다 치고 입관은 했나? 김해누님은 왔더나? 아니 지금 당신은 어데고?”
“지금 신평임더.”
“신평이라니? 양산 신철이아파트에 있었다 아이가?”
“야. 돌아가실 때는 병원에 있었는데 아파트는 집도 좁고 이웃도 그렇고 해서 신평의 장례식장으로 옮겼다 캅디다.”
“그래. 김해누님은 오싰더나?”
“야. 말도 마소. 당신이 못 오는 바람에 우짤랑고 걱정했는데 김해 형님이 만사를 한칼에 해결했지요.”
“그래. 우쨌길레?”
“그건 전화로 다 못 합니더. 거기서 바로 집으로 오소. 나도 지금 부산 내려갈 게요.”
“아이다. 큰누님이 돌아가셨는데 내가 바로 병원에 가야지.”
“마, 부산집으로 오소. 이미 입관을 해서 당신이 와도 얼굴도 못 보고 당신 온다고 김해형님 빼고는 짜들 반가워할 사람도 없소.”
“그래도...”
“지금 차에 슬비하고 영서하고 타고 있어요. 어서 부산에 가서 아아 아바이하고 만나서 짐을 챙겨줘야 저거 집에서 주말을 보낼 것 아잉교?”
그러고 보니 금요일 밤, 아이가 제 부모를 따라 학장동 제집으로 갈 날이었다.
“아. 알았어.”
“그래 재미는 있었능교? 그래 그래 해외여행을 원을 해 쌓디마는.”
“뭐. 당신도 같이 못 가고 혼자 가는 판에.”
가방을 열어 메콩강삼각주에서 산 초콜릿을 꺼내 건네며
“후진국이라 별 선물할 것도 없고...”
눈치를 보는데
“에게게!”
영순씨가 탄식을 하고
“아빠! 하다 못 해 공항에서 엄마 머리핀이라도 하나 사지? 여자들은 그저 보석과 명품가방, 하다 못 해 화장품, 액세서리 같은 걸 사다줘야 좋아하지 세 살짜리 아이도 아니고 쪼꼴레또가 다 뭥교?”
“그렇나? 나는 그래서 내년에 영서 돌 지나면 너 엄마하고 다믄 중국이라도 같이 갈라꼬 돈을 애껴놨다 아아가?”
“그런가?”
하는데 김 서방이 와서 수인사만 하고 이내 아이와 짐을 챙겨 돌아가고
“그래, 김해누님이 뭐를 우쨌긴데?”
열찬씨가 비로소 상가의 일을 묻는데
“먼저 신평형님이 돌아가시기 몇 달 전부터 교회에 다니며 하느님을 믿었다고 신이 났지요. 그래서 동생인 자신이 언니를 회개시키고 주님의 딸로 다시 나게 하여 날빛보다도 더 밝은 천당 하느님의 나라로 인도했다고 말입니다.”
“그래? 그거사 아부지 돌아가셨을 때 하고 똑 같네. 보나마나 빈소에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주여, 주여, 하느님을 부르고 그래 했제?”
“안 봐도 비디오네. 그 뿐만 아니라 또 한 건 큰일을 해냈지요.”
“뭔데?”
“병원에 빈소를 차리고 나서 형님이랑 내가 도착했을 때였지. 누님자식들은 다 모였는데, 아니 가출한 남 서방, 가출이 아니라 이미 젊은 여자랑 살림을 차린 남 서방만 빼고 다 모였는데 전처자식 둘은 하나도 안 보이더란 말입니다. 옛날에 열차사고로 다쳐 보훈병원에서 봤던 그 봉훈이란 떠돌이요리사는 수십 년째 연락이 없어 이미 죽었는지도 모르지만 신평에서 이발소를 한다는 장남 태훈이란 사람이 안 보이는 거라."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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