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해보자. 현재까지는 과학적으로 타임머신(time machine)은 불가능하다고 하니, 일종의 ‘사고 실험’(思考 實驗·thought experiment)이다.
아리따운 처자를 만났다. 심청이다. 단아한 차림새에 눈빛이 결연하다. 내일이면 아버지는 물론 이 세상과 하직해야 한다. 아버지의 밥을 지어놓는 등 마지막 집 정리를 하고 있다.
아버지 심 봉사(심학규)가 실족하여 개천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지나가던 몽운사 화주승이 구해준다. 그리고 부처님께 정성을 들이면 눈을 뜰 수 있는데, 정성을 들이려면 재물이 필요하니, 절에 공양미 300석을 시주하라고 말한다.
이 소식을 안 심청은 송나라와 조선을 오가며 장사하던 상인들이 물살이 거칠어, 침몰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인당수 해역에 용왕을 달래기 위해, 인신 공양으로 바칠 처녀를 찾고 있다는 풍문을 들었다. 심청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자기가 그 희생(犧牲)이 되기로 작정하고 상인을 만났다. 그리고 300석을 받았다. 내일이면 인당수에 몸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이 상황에 맞닥뜨려서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행동하겠는가? 우선, 그 승려를 사기꾼으로 판단할 것이다. 개안 수술이라면 몰라도, 신비적인 힘으로 봉사의 시신경을 살려낸다는 것은 우리의 의학 상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함을 알고 있다. 쌀 한 가마니는 현 시가로 20만 원쯤 한다. 1석은 2가마니이니, 600가마니×20만원, 곧 1억 2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애옥한 장애인 부녀 가정에 사기를 친 것이다.
다음으로 어떤 선의라 할지라도 인신매매는 불법이다. 무엇보다도 바다의 거친 물살은 자연현상일 뿐, 용왕이니 뭐니가 일으키는 초자연적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심청이의 효심에 감탄하며 눈물을 찔끔거리고만 있다. 상인들은 거금을 투자했을망정, 안전한 뱃길을 확보했다고 적이 안심한 얼굴이다. 당신은 이 엽기적인 상황에 아연실색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생각을 그들에게 말하며 이 야만적인 계약을 물리려고 한다면, 아마 몰매를 맞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몰매가 두려워 생각을 입 밖에 내진 않더라도, 그들이 틀렸고, 당신이 옳다는 판단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생각이라는 걸 한 번 해보자. 우리가 심청이나 마을 사람들이나 상인들보다 속칭 머리가 좋은가? 그들은 저능아이고 우리는 천재인가? 아니다. 우리가 저들의 시대에 태어났다면 우리 또한 저들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들과 우리의 차이는 단지 천 년이라는 시차가 존재할 뿐이다.
도대체 이 천 년이란 세월이 인간의 가치관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인류의 역사는 이성 확장의 역사이다. 이성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만의 편협한 관점에서 벗어나게 하고, 살아가는 방식을 반성하게 하며, 더 나아질 방법을 찾게 한다.
언어학자이자 진화심리학자인 스티븐 핑커(1954~)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인간사에 지식과 합리성을 더 많이 적용하는 능력, 곧 이성의 확장으로 인류가 점차 더 똑똑해지면서 도덕의 진보와 폭력의 감소를 일구어냈다고 주장한다.
이성의 속성은 무엇인가? 실천윤리학의 분야 거장이자 동물 해방론자로서 『동물해방』으로 유명한 피터 싱어(1946~)는, 이성은 에스컬레이터와 같다고 주장한다(이성의 에스컬레이터 이론). 에스컬레이터의 특징은 일단 올라타면 무조건 올라간다는 것이다.
심청이와 마을 사람들과 상인들보다 우리가 더 똑똑한 것은, 그들이 저능해서 우리가 천재여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들보다 에스컬레이터의 상층부에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조선시대 노비는 개인의 재산이었다. 여자 노예인 비(婢)는 남자 노예인 노(奴)보다 비싸게 팔렸다. 자녀라는 재산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200년 전에는 많은 미국인들은 노예제도를 없애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100년 전 영국 정부는 투표권을 요구하는 여성들을 감옥에 가뒀다.
「수의繡衣사또(어사또) 옥獄 형리刑吏 불러 분부分付하되, “네 골 옥수獄囚를 다 올리라.” 호령號令하니 죄인罪人을 올리거늘 다 각각各各 문죄問罪 후後에 무죄자無罪者 방송放送할새, “저 계집은 무언인다.” 형리刑吏 여짜오되, “기생妓生 월매月梅 딸이온데 관정官廷에 포악暴惡한 죄罪로 옥중獄中에 있삽내다.”
“무슨 죄罪ㄴ다.” 형리刑吏 아뢰되, “본관本官 사또 수청守廳으로 불렀더니 수절守節이 정절貞節이라 수청守廳 아니 들려 하고, 관전官前에 포악暴惡한 춘향春香이로소이다.” 어御사또 분부分付하되, “너만 년이 수절守節한다고 관정官廷 포악暴惡하였으니 살기를 바랄소냐. 죽어 마땅하되 내 수청守廳도 거역拒逆할까.”
춘향春香이 기氣가 막혀, “내려오는 관장官長마다 개개個個이 명관名官이로구나. 수의繡衣 사또 듣조시오. 층암절벽層巖絶壁 높은 바위 바람 분들 무너지며, 청송녹죽靑松綠竹 푸른 나ᇚ이 눈이 온들 변變하리까. 그런 분부分付 마옵시고 어서 바삐 죽여 주오.”하며, “향단香丹아, 서방書房님이 어디 계신가 보아라. 어제 밤에 옥문간獄門間에 와 계실 제 천만千萬 당부當付하였더니, 어디를 가셨는지, 나 죽는 줄 모르는가.”
어御사또 분부分付하되, “얼굴을 들어 나를 보라.” 하시니 춘향春香이 고개 들어 대상臺上을 살펴보니 걸객乞客으로 왔던 낭군郎君 어御사또로 뚜렷이 앉았구나. 반 웃음 반 울음에,
“얼씨구나 좋을씨고 어사御使 낭군郎君 좋을씨고. 남원읍내南原邑內 추절秋節 들어 떨어지게 되었더니 객사客舍에 봄이 들어 이화춘풍李花春風 날 살린다. 꿈이냐 생시生時냐, 꿈을 깰까 염려念慮로다.”」 -열녀춘향수절가烈女春香守節歌-

조선시대의 춘향이는 대한민국 헌법으로 볼 때 어떤 헌법적 권리를 박탈당하였을까?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헌법 제10조)와 관기의 딸이라는 이유로 수청을 강요당하였으므로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차별받지 않을 권리’(헌법 제11조)를 박탈당하였다. 그 외에도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않고서는 체포, 구속당하지 않을 권리와 고문 받지 않을 권리‘(헌법 제12조)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춘향이는 자신의 권리가 이처럼 박탈되었음을 알고 있었을까. 문제는 춘향이가 헌법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고상만(인권운동가)/<시민사회신문>/’춘향전을 통해 본 ‘헌법 이야기’/2010.05.03.-

지금은 다르다. 학교에서 배웠건 못 배웠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이 주옥같은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과 2항을 모두 알고 있고, 노래 가사로 만들어 떼창을 하고 있다.
현재는 물론, 양의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헌법 조항을 노래로 만들어 합창하는 국민은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이성의 에스컬레이터’는 이미 상층부에 있다. 더욱이 에스컬레이터의 속성상 무조건 올라간다. 우리의 이성도 퇴보를 모른다. 에스컬레이터가 계속 올라가는 것처럼, 이성은 확장을 계속할 뿐이다.
‘검찰 독재’? 한바탕의 헛된 꿈일 뿐이다. 그걸 꿈꾸는 인간들, ‘깨몽’하는 게 그나마 살길임을 알기나 할까? 권력의 주인임을 알고 그 내용을, 헌법 조항을 가사로 만들어 떼창을 부르는 국민이다. 다소 시간이 걸릴 뿐, 그 어떤 종류의 독재도 용납하지 않는다. 검찰 독재? 가당키나 한 말인가!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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