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593)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4장 또 한 번의 위기돌파③
대하소설 「신불산」(593)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4장 또 한 번의 위기돌파③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3.09.24 06:45
  • 업데이트 2023.09.20 16: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 또 한 번의 위기돌파③

서기관, 서기관! 아아 서기관...

무려 14년이나 걸린 가시밭길 역정, 누구보다도 고달프고 험한 그 길을 내가 마침내 돌파했다는 것인가? 열찬씨의 눈앞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갔다.

연산동 동서기를 6급 사무장이 되도록 도와준 동년배 김태현사무장과 많은 사람들, 서구상징물의 홍보개선안의 아이디어와 고사성어(故事成語)를 보고 요직에 발탁해준 안동출신의 깨끗한 선비 김만연구청장과 몇 년 뒤에 만난 유생 같은 최원호부구청장, 기획실무를 다듬어준 이장희실장, 윤영수실장, 그리고 친형님 같던 손재식국장, 또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합하던 동료, 양보해준 친구 신해기국장, 공무중의 교통사고와 재활과정을 함께하며 같은 환자처지에도 밥을 타오고 약을 데워주던 그 착한 아우 김남규총무계장, 서울의 법학원과 고시원의 좁은 방과 매일 먹던 오징어덮밥과 날마다 날 견제하며 등 뒤에서 저들끼리 웃던 가깝고도 먼 숙명의 동료이자 적수들과 큰오빠 같다면서 걱정해주던 전라도출신의 술집아가씨와...

그리고 그 모진 인연의 김모구청장, 그 싸늘한 눈길과 안경과 힐책과 붉은 볼펜으로 긁어버린 결재서류와...

그 때 아내 영순씨의 전화가 왔다.

“당신 욕봤심더.”
“욕은 무슨 욕? 당신이 고생했지.”

아내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은 것이 보지 않아도 몇 번이나 눈물을 훔쳐 눈이 발갛게 충혈 되었을 것 같았다. 이내 슬비와 정석이의 전화가 오고 스물두 살의 새아기 상미도

“아버님, 축하드려요. 우리 아버지도 기뻐하시고 어머니도 사돈어른이 대단하다고 대단한 집 아들로 사위를 보았다고 난리가 났답니다.”

하는데 이번에는 사위 김서방이

“아버님, 정말 축하드립니다. 제가 정말 장가는 잘 온 것 같습니다.”

하여 정말 오랜만에 어깨가 한 번 으쓱해졌다.

그리고 막내처제 영아가

“형부, 축하합니다. 저는 형부가 기어이 해낼 것을 믿었습니다.”
하는 문자를 필두로 반여동의 영신씨의 문자도 오고 연산로터리산우회의 박정상총무가 회원들에게 통지를 하였는지 평소에 서로의 독불장군기질이 자주 부딪혀 그야말로 애증(愛憎)의 적수인 네 살 많은 이성복회원도

“이과장 추카, 축카! 아니 이국장 추카 추카!”

묘한 문자가 오기도 했다.

 

끝이 났다. 그 길고긴 고난의 여정이 마침내 종식되고 늘 괴롭고 외로운 영혼이 피안의 언덕에 도달한 것이었다. 이제 자신이 몸담은 공직이라는 세계에서 더 바랄 것도 없는 종착역에 닿았으니 조용히 숨을 고르고 편안히 지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아내의 표정도 달라졌고 집안도 더 안온한 것 같았다.

아침에 출근을 하면 국장비서 손정은양이 커피를 가져다주고 주무과인 자치생활과의 서무인 권윤서양이 그날 하루의 일정표를 가져왔고 월요일 아침의 간부회의와 수요일에 청장실에서 있는 국실장과 총무과장이 참석하는 티타임, 금요일 부구청장실의 티타임을 제하고는 특별히 시간을 제약받는 일도 없이 찾아오는 손님이나 맞고 전자결재만 하면 되었다. 무엇하나 아쉽거나 답답한 일이 없었다.

“보소, 가국장님. 그렇게 원하던 승진을 했으니 술 한 잔 사소.”

간혹 산우회원이나 친구들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하며

“그럽시다. 까짓 거.”

순순히 응했다. 분기 90만원, 월 30만원의 업무추진비가 나와 주민복지국내 100여명 직원의 경조사를 챙기고 일시적으로 특별히 힘든 업무에 시달리는 직원들이나 청소종사원, 조경인부 등을 격려하는데도 부족하지만 어차피 생활비로 쓸 수 있는 돈도 아닌 만큼 누구에겐가 술밥을 사주는 재미도 쏠쏠했다.

육군대령이 장군으로 진급하면 근 100가지의 대우가 달라진다고 했는데 행정바닥의 장군격인 서기관으로, 그것도 이등병이나 다름없는 9급 서기보에서 출발한 열찬씨가 드디어 국장이 되니 우선 국장실이라는 독방의 사무실이 생기고 세 명의 국장을 같이 모시는 여비서가 있고 관용차와 기사가 늘 대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월 30만원의 업무추진비의 네 가지 정도가 공식적으로 달라진 것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아내 영순씨의 눈빛이 달라지고 제가 승진을 한 것처럼 자부심과 만족감이 가득한 점이었다.

하루는 오후 늦게 전화가 와서

“당신 오늘 늦능교?”
“아니 뭐...”

특별한 스케줄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단번에 아무 일도 없이 곧장 퇴근하겠다고 하면 명색 국장까지 된 사람이 저녁에 그렇게 만날 사람도 없나, 도대체 인생을 어떻게 살았냐며 놀릴 것 같아

즉답을 피하고

“와? 당신 무슨 일 있나?”

되물으니

“안 바쁘면 저녁이나 사주소.”
“그라든지.”

하고 약속장소를 정하는데

“아니, 당신 근무하는 방에 한 번 가볼라꼬.”
“그래. 그라면 여섯시 반 지나서 사람들 퇴근하고 나서 오소.”
“야.”

하고 퇴근시간이 되어

“이 국장님, 퇴근 안 하십니까?”
“예. 조금 있다 하지요.”

옆방의 총무국장, 도시국장을 보내고

“퇴근 안 합니까?”

술 생각이 간절한 듯 한 서규수부구정장의 전화가 와서

“손양, 부구청장님 저녁 일정을 좀 알아봐.”
“오늘은 일정이 없는 모양입니다.”

해서 이제 문화관광과 문화계장이 된 정병진씨에게 전화를 걸어

“동생, 바쁘나?”
“예. 아닙니다. 소주 한 잔 할까요?”
“그래. 나는 있다 누가 오기로 했고 자네 시간 나면 박기도계장, 이재식계장 연락해 봐. 지금 부영감이 술이 고파 퇴근을 못 하고 망설이는 모양인데.”
“예.”

계장들로서 부구청장과 따로 술자리를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업무적인 애로사항을 의논하면서 친분을 쌓아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에 더없이 좋은 찬스라 싫을 리가 없는 것이었다. 과연 얼마 뒤 부구청장실에서 부스럭거리는 기척과 함께

“수고하셨습니다.”

비서 구혜진양의 목소리가 낭랑한 것으로 보아 부구청장이 퇴근해 자신도 이제 데이트든 무어든 자유의 몸으로 풀리게 되는 모양이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출퇴근용 승용차에 오르는 부구청장에 이어 박기도, 정병진 두 계장이 타고 있었다. 이제 아내가 와도 신경 쓰일 사람이 없겠다면서 의자에 등을 기대고 느긋이 누우며

“정은씨, 먼저 퇴근하지.”

송도축제를 열 시절 횟집을 경영하며 송도번영회총무를 맡아 문화관광과장인 열찬씨와 함께 두 명의 실무책임자로 늘 함께 하며 친해진 동갑친구로써 특히 노래자랑결선을 앞두고 마이크를 들고 잠적한 이벤트사의 사장을 찾으러 나서고 비가 악수같이 쏟아지는 밤바다에서 열정과 카리스마로 뭉친 통기타가수 박강성의 노래를 끝까지 듣고 구청장과 번영회장이 가버린 쓸쓸한 노래자랑말미의 시상식을 함께 했던 손상주총무의 딸이라 쉽게 딸처럼 대하는 것이었다. 그 때 고등학생이던 딸이 멋쟁이아가씨가 되어 같이 근무하는 것은 좋지만 동갑친구는 이미 고인이 되어 있었다. 술과 바다와 친구를 좋아한 그는 간암이란 마지막 친구를 만나 그의 손을 잡고 좀 어둡기는 하지만 편안하고 아늑한 나라로 떠나버린 것이었다.

“정은씨 올해 몇이지?”
“스물여섯이요.”
“벌써 그렇게 되었나? 남자친구는 있나?”

하는데

“국장님 또 그 말씀, 나이만 물으면 남자친구 있느냐, 시집은 언제 갈 거냐 물으시면서.”

사회과서무 권윤서양이 소소한 참고자료 몇 가지를 챙겨 들어오면서

“정은아, 속지 마라. 국장님 말씀만 그렇지 내게도 잘 생긴 아들 소개시켜준다고 하고 3년째 무소식이다.”

하며 해쭉 웃었다. 정석이 하고 동갑이니 벌써 서른이 되었을 것이었다. 같이 부산에만 있어도 좋으련만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려운 공무원직장을 버리라고 할 수도 없고...

그나저나 사람들 다 내 보내고 호젓이 아내를 만나려고 하는데

“국장님, 사모님 오셨는데요.”

벌써 영순씨가 도착한 것이었다.

“여보. 이 사람은 국장실 손정은씨고, 이 아가씨는 내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생활지원과 권윤서양이야. 우리 정석이하고 동갑.”

하니 여자 셋이 눈인사를 하고 정은씨가 커피를 가져오더니

“국장님, 문단속 잘 하고 나오십시오. 우리는 먼저 갑니다.”

그 제서야 어서 퇴근하라는 뜻을 안 것 같았다.

“당신사무실 멋지네. 이 넓은 공간을 당신 혼자 쓴단 말이요?”
“그렇지 뭐.”
“내 남편, 이 홍영순이 남편이 과연 출세를 하긴 했군.”

책상위의 명패도 만져보고 커튼을 열고 창밖을 내다보며

“야, 정원도 좋네. 석류가 다 익어가고.”

한껏 기분이 고무된 지라

“와? 당신 오늘 무슨 좋은 일 있나? 아아들 말로 양놈 지갑이라도 주웠나?”
“좋고말고요. 당신이 서기관승진하고는 날마다 좋은 날의 연속이지요. 이 홍영순이 평생에 이런 좋은 날이 다 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 당신 욕 봤심더.”
“이 사람이 뭘 잘 못 묵었나? 별소리도 다 하네.”
“그 기 아이고 당신 요 좀 앉아보소.”

하며 원탁에 마주 앉은 영순씨가 하는 말이

“오늘 낮에 그 남일회라고 정석이친구들 엄마들 모임을 안 했능교? 거기서 당신 서기관승진했다고 난리가 났다 아잉교?”
“...그래?”

어쩜 그럴 것 같기도 했다. 정석이가 고3이던 시절 이상하게 남일고등학교에 수재들이 많이 모여 부산의 최 상위권으로 서울의 명문대에 무려 14명이 진학한지라 그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엄마들은 엄마들대로 모임을 만들었는데 아이들은 각각 의대, 법대 등으로 전공도 다르고 고시준비나 군입대등으로 만나기도 힘든데 스스로 대견한 아들들을 두었다고 자부심이 대단한 엄마들은 마침내 아빠들까지 끌어들여 가끔 부부동반모임을 하기에 이르렀다.

다들 풍족한 사람들이라 서로가 수십만 원씩 드는 비싼 식대, 노래방 비를 서로 내느라고 열찬씨 같은 공무원들에게는 도무지 기회조차 돌아오지 않는 모임이었다. 아이들이 머리가 좋은 만큼 그 아빠들도 의사, 약사에 관세사, 집달리(執達吏)를 겸한 법무사, 건축업자, 관광회사, 오퍼상, 목욕탕주인에 선장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자격이나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처지는 축이 경찰서과장 한 사람과 고등학교국어교사와 행정공무원열찬씨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집달리나 관세사, 관광회사, 건축업을 하는 사람들이 각각 법원, 세관, 구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했지만 일관성 있게 공직에 몰두하기보다는 세상 돌아가는 일이나 이재(理財)에 밝아 중도에 공직을 작파하고 바깥세상에 나와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한 살림을 모은 사람들인데 반해 끝까지 행정공무원으로 남은 열찬씨가 마침내 서기관승진을 하여 어느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당당한 처지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소식을 듣고

“정석엄마 축하해요!”

하는 통상적인 인사가 끝나자

“정석아, 한 턱 내라. 공무원 들어가서 서기관국장이 되는 것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는 것처럼 3대 적선을 해야 되는 일이란다.”

회장을 맡은 여장부 용준이엄마가 말하자

“아이구, 형님! 부끄럽습니다.”

영순씨가 고개를 숙였다. 같이 모임은 해도 대부분이 아파트나 상가건물이 몇 채씩이나 되고 비까번쩍한 자동차에 겨울이면 모피를 둘둘 감고 다니는 판에 혼자 너무 생활수준이 쳐져 항상 기가 죽은 영순씨에게

“여게 공무원하거나 출신이 많지만 정식으로 사무관이 되거나 목민관인 동장을 지낸 사람은 너가 신랑밖에 없다. 정석이 아부지는 죽으면 벼슬이 족보에 올라간다 아이가?”

하며 추켜세웠고 시집을 출판해 한 권씩 돌리면

“세상에 우리 가까운 사람 중에 시를 쓰고 책을 내는 사람이 다 있네. 글 쓰는 사람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우선 최고의 감성을 갖춘 엘리트가 아닌가? 가만 보자, 이 귀한 책을 그냥 받으면 안 되지.”

하면서 남편이 축재와 출세에 강하지는 못 하면서 몰라도 돈 안 되는 시인인 것에 늘 기가 죽는 영순씨의 기분을 업(up)시키려 애를 쓰고 그 날도

“사실 관세사 우리 용준이 아버지도 고시공부를 하느라 너무 늦게 공직에 들어가 정석이아버지처럼 정규코스의 엘리트공무원들이 될 수 없어서 나왔지. 아마 이미 사업에 종사하는 다른 집들도 다 비슷할 거야. 아무튼 지금껏 공무원으로 재직 중인 일수아빠, 정석이아빠가 한눈 한 번 팔지 않은 진정한 공무원이지. 그러니까 서기관이 다 나오고.”
“아이구, 형님! 일수아빠는 곧 경찰서장이 될 낀데 우리 신랑보다야 훨씬 더 높을 것 아닙니까?”

영순씨가 민망하게 생각해도

“경찰서장이 되어도 급수는 서기관보다 낫단다. 그리고 경찰이든 교사든 법원이든 관세청이든 모두 옛날로 치면 기술직에 속하는 잡직으로 정식 관리가 아니라고 하더구먼. 오로지 정석이아빠같은 행정공무원이 정 4품인가 뭐가가 되고 경찰이나 다른 직종은 아마 종 7품이나 뭐 그 품계가 형편없단다. 그래서 옛날부터 정석이 아빠처럼 사무관시험에 걸리고 지방의 수령방백을 지낸 사람을 목민관, 양떼처럼 순한 백성을 먹여 살리는 목민관이라 안 하나?”
“아이고, 형님은 우째 그래 박식합니까? 혹시 군수나 도지사집 딸입니까?”
“우째 알았지?”

이렇게 점심시간 내내 화두가 되고 영순씨가 단연 주인공이 되었다고 했다.

“그래. 모처럼 기분이 좋은 하룬데 기왕이면 저녁도 좋은 데 가서 먹지. 당신 뭐 먹고 싶은지 이야기나 해 봐.”
“점심을 하도 잘 먹어서. 회도 그렇고 소고기도 그렇고 옳지 당신 좋아하는 복국이나 먹으러 갑시다.”
“너무 싼데?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도 아니니 더 비싼 걸로 하지. 톱질을 한번 하든지.”
“마 됐심더. 묵는데 애끼 쓰고 복지 포인트로 당신 가을에 입을 티나 한 벌 싸든지.”
“그럼. 그라든지. 당신 등산복도 하나 화사한 걸로 사고.”
“그라든지.”

외식과 쇼핑이 끝나고 집에 들어가면서

“당신 고맙소. 진짜 우리가 이래 포시럽게 살아도 되는 건지.”

영순씨의 하루가 정말 행복하게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 이 대하소설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