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이 무엇인가? 성애(性愛. erotic love), 곧 합일의 폭발적 경험을 사랑이라 착각하지는 않는가? 우리는 사랑과 ‘확대된 이기주의’를 구별할 수 있는가?
에리히 프롬(1900~1980)은 『사랑의 기술』에서, “본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머지 동포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확대된 이기주의’다”라고 피력했다.
사랑의 한 종류인 ‘형제애’(brotherly love)도 크게는 전 세계 모든 인류에 대한 사랑이다. 자신의 가족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은 적대시 혹은 배타적으로 보는 것 또한 확대된 이기주의에 불과하다.
하여 ‘가족주의는 야만이다’ 보수와 진보는 정치적 이념과 가치를 기반으로 나뉜다. 미국에서 보수는 가족 가치를 중요시하고, 낙태 합법화를 반대한다. 생명 존중(pro-life)을 내세운다. 그러나 에너지 전환, 기후 변화 대응 등 환경 보호 정책에는 반대한다. 트럼프는 기후온난화는 ‘음모론’이라고까지 주장했다.
이제는 지구온난화가 아니라 ‘지구가열화’시대다. 지금 당장 온실가수 감축을 실행하지 않으면, 지구는 인류가 살 수 없는 행성으로 불모화할 것은 시뮬레이션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가족은 자신과 자녀들만으로 한정되는가. 자녀의 자녀, 또 그 자녀의 자녀는 가족이 아닌가. 태아만 생명인가. 가족을 소중히 여기고, 생명을 존중하면서 지속가능한 지구를 위한 환경보호 대책에 반대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고 근시안적일 뿐이다.
미국의 보수는 그나마 정책에 일관성이라도 있다. 한국의 보수는 ‘그 때와 이 때’가 다르다. 아니, 일관성이 있기는 하다. 오직 이익! 그들의 정치적 이념과 가치는 이익이다. 그래서 한 정치학자는 한국의 보수당은 정치적 결사체가 아니라, 이익단체라고 진단하기까지 했다. ‘그 때’ 방사성 오염수 방류를 쌍심지 켜고 반대했던 그들이, ‘이 때’는 안전하며 과학을 들먹인다. 과학이 무엇이관대?
과학이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은 객관적 사실을 일컫는 데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의 영역에서 ‘사실’은 확정적인 것이 아니라, 잠정적인 것이며 시험에 열려 있다는 것이다. 방사성 오염수가 안전하다는 일부의 과학자들의 주장도 ‘현재로서’ 잠정적인 참일 뿐이다. 과학적 양심을 가진 학자들은 절대로 ‘안전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과학적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BC 384~BC 322년)는 철학자지만, 그의 저작 중 약 4분의 1은 생물학에 관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최초의 생물학자다. 생물에 관한 기존의 사변적 연구에서 벗어나 많은 관찰 연구를 통해 일반 원리를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데이터를 많이 수집했고, 그 중에는 어부와 양봉업자, 여행가의 경험담까지 참고한 것도 있다.
그런 ‘과학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는 지금 보면 우스꽝스러운 게 많다. 남성은 여성보다 치아의 개수가 많고, 치아의 개수는 수명과 비례한다고 했다. 남녀 치아는 동일하며, 평균수명은 여성이 더 길다. 왜 이런 엉터리 주장을 했을까? 아마 그의 세계관에 바탕한 생물학 연구 탓인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모든 존재가 완전하고 불변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연에서의 각각의 위치도 영원히 불변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자연에는 위계가 있을 뿐 아니라, 인종의 위계(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노예가 되기 적합하다)와 남녀의 위계(남성은 본질적으로 여성보다 우월하다)가 있다고 믿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잘못된’ 믿음보다 더 잘못된 것은, 그의 세계관은 이후 2000년이 넘도록 진리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고, 지금도 지지자가 많다는 것이다. 남성우월론자나 인종차별주의자, 그리고 지역차별주의자가 아직도 횡행하고 있지 않은가.
아리스트텔레스는 『동물사History of Animal』에서 파리의 다리가 네 개라고 주장했다. 이후 천 년 동안 사람들은 파리의 다리가 네 개라고 믿고 있었다. 곧 파리의 다리를 실제 세어보고 여섯 개란 사실을 알기까지 천 년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남녀 치아의 개수가 다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대해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은, “결혼을 두 번이나 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내의 입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어야 했다”고 비꼬았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왜 그럴까? 그 편견이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그 이익을 ‘과학’으로 포장하기도 한다. 여성은 남성우월론을 믿지 않을 것이다. 차별받는 지역민은 결코 지역차별론에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편견으로 이익을 보는 집단에게 그 편견은 ‘아름다운 편견’이다. 보수가 경제와 국방 문제를 더 잘 해결할 것이라는 믿음도 보수 지지자들의 ‘아름다운 편견’에 불과하다. 가족이기주의를 ‘가족애’로 미화하는 것도 아름다운 편견의 일종이다.
자 범위를 넓혀 인간 종으로 확대해 보자.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우월한 영혼을 가졌다는 믿음, 그리고 이를 통해 자연계의 수장이 되었다는 아름다운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식물과 동물, 인간의 영혼을 구분했다. 식물은 번식과 성장을 위한 식물적 영혼, 동물은 이에 더해서 이동과 감각을 위한 감각적 영혼, 그리고 인간은 다시 이에 더해서 사유와 반추를 위한 합리적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생물학적 존재가 배태한 원초적 잠재력은 달라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렇게 빚어졌다. 이러한 잠재력의 수준에 따라 생물학적 존재의 등급을 총 11단계로 나누었다. 층층이 나누어진 세상의 위계, 자연의 사다리 가장 꼭대기가 인간이다. 만물의 영장이며 신의 자리 바로 아래다. 중세의 교부철학자들의 자연의 사다리는 ‘신-천사-인간-광물-지하세계의 악마’였다.
그렇다면 인간 행동은 특별히 우월한 정신적 능력의 결과일까? 영국의 동물행동학자 로이드 모건(1852~1936)은, ‘어떤 행동이, 낮은 수준의 심리적 능력을 훈련시켜서 나타날 수 있다면, 더 높은 정신적 능력의 결과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우리 인간 종은 미물에서 시작하여 영적 존재로 향하는 거대한 존재론적 경주에서 선두를 달리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행동은 그저 우리 종이 겪어온 독특한 시공간적인 생태 환경에 대한 적응일 뿐이다. 다른 모든 종의 행동도 그렇다.
우리가 생각하는 소위 ‘위대한 인간 정신’이 ‘모든 동물 중 가장 우월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러나 인간 정신에는 어떤 경향성이 있다. 곧, 위아래로 나누는 데 익숙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을 층층이 사다리로 나눈다. 그리고 무생물-식물-동물-그리고 가장 꼭대기에 인간을 위치시킨다. 과연 그러할까?
잠정적 결론은, “자연계에서 인간의 자리는 동물의 왕국 그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다. <계속>
*이 글은 박한선(서울대 인류학과 교수)의 『인간의 자리』에 크게 힘입었음을 밝힙니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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