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595)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4장 또 한 번의 위기돌파⑤
대하소설 「신불산」(595)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4장 또 한 번의 위기돌파⑤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3.09.27 13:54
  • 업데이트 2023.09.27 13: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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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또 한 번의 위기돌파⑤

이제 아무 걸림도 애로사항도 없이 천천히 커피 향을 음미하며 느긋하게 한나절을 보내고 오후에는 순찰사마 대신공원이나 구덕산, 시약산, 아니면 장군산이나 송도해수욕장을 한 바퀴 휙 돌면서 그 긴 고난의 엑서더스를 거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에 닿은 것 같은 세월이 도래한 것이었다. 국장전용차량이 있어 운전기사가 모시고간다고 했지만 공식 업무가 없을 경우에는 청사입구에서 부터 구덕로나 송도아랫길을 거쳐 오밀조밀한 골목길을 올라 산복도로의 할머니들과 대화도 나누고 경노당도 둘러보고 지역경제과의 조림지도 살피고 산불감시원을 만나 순찰확인 서명을 해주기도 했다. 구체적인 실무가 없이 그냥 두루뭉술한 참모직인 국장이란 자리의 묘미는 길을 걸어도 산을 올라도 모두가 순찰이 되고 관내의 동향파악이라는 업무가 되는 것이었다. 살다살다 마침내 쥐구멍에 볕이 든 것 같았다.

그렇게 <먹고땡>으로 만판 놀고만 먹는 판에 마침내 제대로 된 일이 하나 떨어졌다. 어느 무료한 오후에 

“아이구, 선배님!”

의료보험서구지사 한정길 지부장이 빙글빙글 웃으며 국장실로 들어서

“아이구, 후배님. 아니 지사장님!”

악수를 하고

“우짠 일로? 청장실에는?”
“있다 가보지요. 선배님 오늘은 예방(禮訪)이 아니라 업무 차 왔습니다. 이 일은 선배님만이 도와줄 수 있습니다.”

하면서

“어이, 박 부장 인사하게. 내가 말하던 시를 쓰는 우리 선배님 국장님이지.”

하며 인사를 시키더니

“우리 박 부장 설명 듣고 잘 좀 챙겨주십시오. 저는 청장 실에 인사하고 오겠습니다.”

하고 나가자 박 부장이란 사람이 커다란 서류봉투를 열어 몇  백 장도 넘는 서류뭉치를 서넛이나 꺼냈다.

“이게 뭐요?”
“예. 국장님. 올해부터 법이 바뀌어 중풍, 치매 등 거동이 불편하고 인지능력이 없어 장기요양이 필요한 노인이나 환자들의 등급을 지정하여 전액 혹은 일부를 국가지원으로 보호시설에 입원시키고 요양보호사자격증을 가진 가족이 가정에서 보살피는 재가보호자에 대한 비용을 지원하는 노인요양보호시책이 시행되는 것은 알고계시지요?”
“예. 한번 보고받은 것 같습니다.”
“그 장기요양대상자의 등급을 결정하는 심사위원회의위원장을 당연직으로서 시군구 기초자치단체의 복지담당국장이 맡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래요? 대상자가 꽤나 많지요?”
“예. 1차로 이번심사에 오른 사람만 한 2백 명이 조금 넘습니다.”
“그럼 그 많은 사람들의 건강상태나 가정형편 등 모든 조건을 일일이 심사해야 됩니까?”
“예.”
“심사위원은?‘
“예. 의사, 약사, 물리치료사, 심리치료사, 요양보호사 또 보건소와 구청의 관련업무 담당 등 모두 9명으로 되어있습니다.”
“간사는?”
“예. 담당과장인 제가 맡고 있습니다.”
“야, 골치 아픈데. 주관부서에서 미리 검토를 해서 어느 정도 등급을 산정해주는 것입니까? 아니면 처음부터 하나하나 검토를 해야 됩니까?”
“처음이라 한 명 한 명 일일이 서류를 검토하고 심사위원의 토론과 합의를 도출해 1, 2, 3등급으로 분류하여야 합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가정이나 병원 등 현장을 방문하여야 하는 경우도 있고요. 등급고하에 따라 수용시설입소여부, 정부지원의 전액, 일부, 비 지원으로 분류되는 만큼 당사자들에겐 엄청 중요한 일이고 힘든 가정에서는 생사가 달린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큰일 났네. 시간이 엄청 걸리겠네.”
“예에...”

담당부장이 머뭇거리는데

“선배님, 선배님만 믿고 저희는 물러갑니다.”

구청장실을 다녀온 한정길 이사장이 담당부장에게 눈을 찡긋해 일어서게 하고는 홀홀히 사라져버렸다.
 (어떡한다?)

장기요양대상자 심사기준 및 심사대상현황, 장기요양대상자 심사위원명단, 심사대상자명부와 조사표, 심사기준표... 테이블 가득 서류를 펼쳐놓고 살펴보던 열찬씨가 같이 심사에 들어갈 생활지원과 이미경 계장을 불러 

 “이것 봐요. 이게 다 우리가 심사할 서류들인데 잘못 하면 1박 2일 밤샘을 해도 못다 할 것 같아.”
 “예. 저도 이미 자료를 받아 고민 중에 있습니다.” “살림 사는 이계장이 제대로 집에 들어가려면 어쨌거나 한 두어 시간에 마쳐야 되는데 아무튼 능률적인 방법을 찾아야겠지.”
 “어떻게요?”
 “우선은 이 계장이나 내가 서류를 꼼꼼히 읽어보고 장애의 정도와 요양시설수용의 필요성등 문제의 핵심이 되는 부분을 파악할 체크포인트나 흐름을 찾아야겠지.”
 “...”
 “그래서 말인데 이미 심사를 해 본 구청이 있는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가장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핵심 포인트가 뭔지 알아보란 말일세.”
 “예.”
 

하고 나간 이미경 계장이 한 시간 뒤쯤

“국장님 큰 일 났습니다. 남구에서는 오후 두 시에 시작해서 밤 열 시에 끝이 났고 동래구에서는 당일에 끝이 안 나 이튿날까지 1박2일을 했답니다. 수영구는 자정이 넘어서 끝이 나고요.”
“저런 심사위원 중에 가정주부들도 많을 텐데.”
“예. 심사위원 수당 8만원 안 받고 안 한다고 난리가 났답니다. 그래도 법정업무에 당연직 심사위원이 대부분이라 안 할 수도 없는 형편이지요.”
“그렇구나. 나도 걱정이 태산이네. 평생을 공무원으로 지내며 회의행사에 시달려온 나는 회의시간 긴 게 제일 고통이 아닌가? 오죽하면 죽어 다시 태어나면 회의 없는 세상에 태어나고 싶을 정도로. 또 회의시간하고 여자치마는 짧을수록 좋다는 말도 있고.”

유심히 쳐다보다 마침내 입을 삐죽하던 이계장이

“그러지 말고 책 빨리 읽기로 소문난 국장님께서 속독법 실력을 발휘해서 미리 파악해서 일사천리로 밀어붙이지요.”
 “글쎄.”

 심사당일이었다.

서대신동의 지사회의실에 모여 각자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서류를 바라보며 한숨을 푹푹 쉬는데 너름새 좋은 한정길지사장이 같이 차를 마시며 두루 인사를 시키고는
“자, 심사위원장님 잘 부탁합니다. 저는 물러갑니다.”

하고 떠나자

“여러 위원님들, 저는 서구청주민복지국장 가열찬입니다. 우리가 심사를 하여야할 경위는 잘 아실 테고 저나 여러분이나 얼추 당연직 심사위원이라 아무리 힘이 들고 시간이 걸려도 안 할 수도 없습니다. 부잣집에서 돼지를 키우는 이유는 잔칫날 잡아먹기 위해서라는데 우리가 지금 바로 그렇게 한 몸을 던지듯 이 일에 열중해야할 것입니다. 아무튼 사내아이들이 입대를 할 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을 하는데 여러분들도 기쁜 마음으로 임해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간사 박 부장에게 심사개요를 설명하게 하고 1등급지정대상자 한 명을 심사하는데 가정방문을 거친 기본조사표, 진단서, 의식, 인지, 동작, 가정환경 등을 도표로 표시한 그라프와 조사자의견서등을 보며 의사, 물리치료사에게 병세와 재활가능여부 등을 물어 의견을 모으는데 30분이 더 걸렸다. 이번에는 2등급 대상자를 한 건 심사하는데 역시 20분 가까이 걸리는 지라 열찬씨가
 “자, 여러 위원님들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잘 들으십시오. 우리가 보통 심사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격 미달자가 잘못 심사되어 자격을 받는 경우가 없도록 하는 것이고 다음으로 자격대상자가 억울하게 탈락하는 경우가 없도록 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오늘 우리가 하는 심사는 정부의 복지시책일환으로 어려운 장애인과 가정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니 만큼 두 번째 기준인 억울하게 탈락되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겠지요. 그러니까 업무나 심사자체가 인간사랑 휴머니즘을 그 기본이랄까 바탕으로 깔아야 된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다음 우리가 아까 1,2등급 대상 한 건씩을 심사하는데 약 30분씩이 소요되었습니다. 이러다간 밤을 새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일주일이나 그 이상이 걸릴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안합니다. 매 조사표와 진단서에 해당되는 의사, 약사, 물리치료사, 심리치료사 등의 전문가의견을 듣되 특별히 이상하거나 심각한 하자가 없으면 다른 위원들은 이의를 말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또 자기의 전공부분에 대한 검토의견을 낼 때도 건별로 시시콜콜 할 것이 아니라 맨 처음 한 건에 대비해 특별한 상이점만 보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얼마나 능률적인 심사를 하느냐는 바로 여러분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하니 대충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 이 대하소설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