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순서인 누군가가 가로채고 자신은 괜히 패만 들통이 나는 바람에 선 한번 하기가 힘든데다 예사로 꼴찌가 되고 욕심을 부리다 7자가 잡히고 모처럼 좋은 패라 <땡큐>를 받고 패를 던지다 역으로 <땡큐>를 당해 덤터기를 쓰기가 예사였다. 한 시간 동안 선 한 번을 못 잡고 3,4만원이 나가더니 두 시간 반이 흐른 여덟시 중간결산 때에는 무려 7만원이 나갔다. 양사장이 데라통의 돈을 세면서
“자, 돈 잃은 사람은 액수를 신고하세요.”

하더니 3만 원당 만원씩 2만원을 도로 내어주었다. 한 10만원 쯤 밑천을 들여 반쯤 꼴더라도 저녁에 술이나 한 잔 얻어먹고 돌아오면 되리라고 생각한 것이 딱 들어맞은 것이었다. 퇴직자형편에 작은 돈이 아니지만 날마다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영순씨가 오늘 만은 대범하게 놀고 술도 한 잔 사라는 말에
“어이, 양 사장! 오늘은 장원은 아니지만 내가 데라를 보태 저녁을 사면 안 될까?”
하니
“좋지!”
하면서 훌라판의 9만 원과 고스톱 판의 6만 원을 합해 도합 15만 원을 주는지라
“북경으로 갑시다. 3만 5천원 안주 서너 개에 쟁반짜장, 소주를 마시면 한 20만 원이나 될라나?”
호주머니에서 5만 원을 꺼내 20만 원을 채우는데
“안 될 걸. 이 인간들이 소주, 맥주를 언간히 마셔야지. 사람 여덟이면 스무 병은 넘을 테니 20만 원은 택도 없을 기다 술값만 7,8만 원은 될 끼다.”
“우쨌기나.”
하고 북경이라는 중국집에서 탕수육과 팔보채, 양장피, 유산슬을 시키는데
“사장님, 그라지 말고 코스로 시키지요? 여덟 명이면 두당 2만 5천원이니 8명에 20만 원!”
단골이라 주인이 직접 물병을 들고 와서 권하는데
“이 친구들이 워낙 술이 세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꼴이 나올까 싶어...”
열찬씨가 망설이는데
“사장님, 남도 아이고 단골이라 내 고량주 존 거 한 병 서비스하지요.”
하자
“국장님, 그래 하지요. 내 딴 돈 2만 5천원 보탤께.”
양 사장이 돈을 꺼내주며 돈 딴 사람 내어놓으라고 압력을 넣어도 모두들 외면을 했다. 결국 코스를 시키기로 하고 오향장육에 소호도선(小糊塗仙)이라는 고량주가 들어오자 선 사장이
“아하, 한국에서 이 술을 다 만나다니. 친구들 보소. 이 술 이름의 뜻이 조금만 마셔도, 그러니까 입에 풀칠만 해도 금방 신선이 된다는 귀한 술이니 조금씩 마시면서 천천히 맛을 음미해 보시지요.”
하는데
“신선은 둘째 치고 간에 기별도 안 가네.”
유리가게 윤 사장이 아쉬운 표정이라
“맞아, 우리 부산사내들은 그저 시원소주지.”
열찬씨가 시원소주 중에서 제일 도수가 높은 20도짜리를 시켜 잔에 가득 부으면서
“소주 도수가 자꾸 연해져서 큰일이다. 사람들은 순한 술 마시면 건강에 좋다고 하지만 건축인부나 어부, 농사짓는 사람들은 도대체 술이 취하지 않으니까 술 마시는 기분이 안 나지. 그렇다고 술을 줄일 수도 없으니 한 병 먹을 것을 두 명 먹으니 술값 더 들고 몸도 더 상하고.”
하는데
“그 기 다 술 공장하고 국세청이 짜고 하는 것 아이가? 하나는 돈 많이 벌어서 좋고 하나는 세금 많이 나와서 좋고. 서민들이이야 죽든지 말든지.”
설비 김 사장이 역시 삐딱한 말투로 나오자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겠지. 그 바람에 덕 보는 사람들도 있고.”
양 사장이 점잖하게 나오며
“술집이나 중도매상도 그렇지만 특히 포장마차 같은 서민들.”
하고 빙긋 웃는데
“아, 또 있다. 공병장사, 공병박스장사!”
열찬씨의 말에 환호를 지르며 다시 부지런히 술을 마시는데
“보소, 이 국장!”
중국에서 돌아온 손 사장이 잔을 건내며
“이형도 참 어지간하요. 듣기로 40년이나 공직생활을 했다하니 제헙지도 안 했어요?”
“공무원 들어갈 때는 대학공부도 해야 되고 다른 직장도 잘 없고 해서 들어갔고 그 다음부터는 처자식이랑 묵고 산다고 제헙고 말고가 없었지요.”
“그래도 70년대 후반 나라전체가 좀 먹고살기가 나을 때는 딸도 안 준다는 5급 을류 공무원을 때려치우고 다들 기업체로 갔지요. 우리처럼 처음부터 기업체로 간 사람도 있지만 김전무, 설사장처럼 민간기업으로 간 사람도 많지요.”
같은 회원 중에서 공무원을 중도작파한 사람을 거명하다
“나도 아직 정식회원이 아니고 그저 양사장, 박교수 만나는 제미로 가끔씩 나올 때 아직 회원가입도 안 한 이형이 윤사장, 임사장 만난다고 가끔 와서 얼굴이나 알 정도였는데 이번에 귀국한 후 심심해서 혼자 몇 번 산우회사무실에 드나들면서 아주 새로운 사람을 둘 발견했지요.”
“둘이라?”
열찬씨가 건네준 잔을 비워 다시 건네주며
“예, 그 하나가 화장지 박 사장인지 그 조그만 사람이 어디에 그런 힘이 있고 배포가 있는지 이틀에 한 번 꼴로 올 때마다 화장지, 생수, 캔커피를 비롯한 온갖 것들을 한 아름씩 들고 오는지, 물론 자기 말로는 도매로 떼서 파는 물건이라 원가가 얼마 안 된다 해도 우선 이 강퍅한 세상에 그런 넉넉한 마음이 그 작은 몸 어디에서 나오는가 말입니다. 그리고 오자마자 사무실을 쓸고 밀대걸레로 바닥을 닦고 쓰레기를 분리수거까지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지요. 거기다 회원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자기가 사온 아나고회나 족발로 상을 차리고 술이 없으면 얼른 사오고...”
“아이구, 사장님. 부끄럽구로!”“
맞은편의 대각선에 앉은 박 사장이 들었는지 민망한 표정으로 잔을 건네자
“그리고 저 시! 가형이 쓴 저 <혼자마시기>란 시가 우째 내 심정을 그리 잘 토로했는지. 허허, 내가 기가 차서...”
“와요? 중국현지에 말벗도 없고 해서 혼자 독작깨나 하셨어요?”
하면서 둘이 벽에 걸린 얼룩덜룩한 시화를 이윽히 바라보는데
혼자 마시기(獨酌)
가열찬
거위간, 제비집에 샥스핀요리
호사가들 美食욕구 늘 못 당해도
쓸쓸한 해거름 막소주의 벗
한 접시 김치쪽은 늘 맛의 絶頂.
첫잔이 베고 나간 食道의 아림
슬그머니 덧칠하는 곰삭은 국물
석 잔에 배춧잎이 나비가 되고
넉 잔에 젓갈속의 멸치 떼가 헤엄치는
때 절은 런닝셔츠 고단한 중년
눈앞에 펼쳐지는 草原과 바다.
열심히 살았지만 별 이룸(成功)없이
속절없이 속아버린 허망한 生涯
다섯 잔, 반쯤 취해 감기는 눈에
꿈결처럼 스쳐가는 못난 사랑과
일곱 번째 잔 채우고 텅 빈 병처럼
우리네 삶 처음부터 덧없는 건지
몽롱한 취중에 본 蜃氣樓처럼
화려한 그 무엇이 있었던 건지...
...마지막 잔에 담긴 幼年을 털어 넣고
슬그머니 엎드린 채 잠든 저 사내
.
...마침내 고향마을 닿았나보다.
“아니, 뭐 그렇기도 하지만 좌우간 일곱 잔 반이 나오는 소주 한 병을 비우면서 첫잔은 칼로 베듯이 식도가 찌르르 하고 두 잔은 덧칠하듯 통증이 완화되고 그 다음엔 유년시절과 고향이 떠오르고 반병이 넘어서면 황홀한 상상의 세계에서 나비나 금붕어처럼 유영하는 마음을...”
“하하, 내나 손사장뿐 아니라 우리 세대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호주머니사정이나 만날 사람이나 마땅히 외출할 형편도 아닌 토요일이나 일요일의 심심한 오후에 프로야구마저 제 응원하는 팀이 져 허전할 때 혼자 식탁에 앉아 맥주 한 두 명이나 소주 한 반 병을 마시는 경우가 있겠는데 그 때 아내의 눈치가 보여 살그머니 냉장고에서 김치보시기를 꺼내 깡 소주를 한 반병, 우리 같이 술이 받는 사람은 온 병을 다 마시는 것이 맛이나 재미를 떠나 하루를 보내는데 제격이지요.”
“맞아, 그것도 오후 네다섯 시가 되어 창가에 해가 설핏하고 한창 나른함에 젖은 술꾼은 반바지에 난닝구차림으로 말이지요.”
“하하하 우째 알았지요? 꼭 내 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 같네.”
“아, 그 기사 내가 만날 하는 일이니까.”
하다 눈을 가늘게 뜨더니
“마지막 연(聯)에는 알딸딸 취한 술꾼이 식탁에 엎드려 잠든 모습을 보고 ‘마침내 고향땅에 닿았나 보다.’라고 끝을 맺었는데 그렇다면 우리 가형이 고향언양에 돌아갈 꿈이 있다는 말인데 이제 퇴직도 하고 했으니 구체적 계획이라도 있는지?”
“예, 본시 농사꾼 자식이라 제 살던 마을이나 논밭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이미 개발되어 마을이고 논밭이고 몽땅 살라질 판이고 대신 두 누님이 사는 공기 좋은 촌 골짝에 들어가고 싶어도 마땅한 데가 없어요.”
“요즘 시골이 다 그렇지. 우리 자랄 때 두메산골은 이제 최소한 광역시나 일반시청의 관할에는 없을 거요. 경남의 햠양산청이나 경북의 영양, 청송이면 몰라도.”
“그 보다는 고향만 언양일 뿐이지 물려받은 땅이나 재산도 없고 또 땅값이 하도 다락같이 올라서...”
“그럼 술만 마시면 떠오르는 귀향의 꿈이 이루어지기 어렵군겠군요. 그 간절한 시인의 꿈이.”
하는데
“어이, 손 사장!”
타일공 이 사장이 잔을 건네며
“중국에 나간 사람들은 보통 자식보다 나이어린 처녀를 현지처로 얻어 자기보다 나이어린 장모까지 넘본다는데 그 중국여자 이야기 좀 해보소. 속살이 하얀지 검은지 냄새나 재미가 색다른지?”
비릿한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 이 대하소설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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