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641)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8장 백수출발⑨
대하소설 「신불산」(641)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8장 백수출발⑨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3.11.20 06:00
  • 업데이트 2023.11.19 1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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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백수출발⑨
“아이고 이 허세, 아직 외국이라고는 대마도 밖에 안 가본 사람이 어디서 들은 것은 있어서?”
 
하고 웃는데 음식이 들어왔다. 어제의 피로로 아직도 머리가 띵 하고 속이 울렁거렸지만 매운 낙지볶음 같은 일등안주를 두고 그냥 넘어가기가 아쉬워 소주와 사이다를 하나씩 시키는데
 
“나는 음료수 대신 우동사리 하나!”
 
영순씨가 잔뜩 신명이 났다.

집으로 돌아와 이빨을 닦고

“얼마나 남았지?”
 
열찬씨가 묻자
 
“천 만 원 조금 넘네.”
“내 한 삼백만 주고 나머지는 당신 통장에 넣고 쓰소.”
“아이구, 고맙구로.”
“그래 친구들이랑 밥도 좀 먹고. 사고 싶은 것도 사고.”
 
하다 멈칫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보소. 내 이 돈까 밍크코트 사도 되나?”
“그라든지.”
 
얼마나 맘속에 앙금이 남았나 싶어 애달픈 생각이 들면서도
 
“돈이 자래나? 삼백만원 마자 줄까?”
“아니요. 여름 철 창고 정리하는데 가보면 될지도 모르지요. 마, 이거만 해도 감지덕지요.”
 
하는데
 
“그래, 말 나온 김에 내 딱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들어줄래?”
“뭔데요?”
“일 년 지나서 적금이자 탈 때 당신이 다 가지되 내 몫으로 건당 10만 원씩 주는 것.”
“그라든지.”
 
하고 맘도 배도 다 넉넉하여 기분 좋게 각자 침대와 소파로 찾아가 낮잠에 빠졌다.
 
 
“보소. 안주 자능교?”
 
얼마나 잤는지 몰라도 아직도 정신이 혼곤한 열찬씨를 깨우며
 
“내 좀 나갔다올게요.”
 
영순씨가 이미 외출준비가 다 된 차림으로 말했다.
 
“와, 어데 가는데?”
“순이언니가 전화가 왔다. 롯데백화점에 잠바 바꾸러 가는데 따라가자고.”
“아니 남 옷 바꾸는데 따라가면서 하늘같은 남편은 집을 보게 만드나?”
“나도 가는 김에 당신 티, 속옷이랑 양말도 좀 사고.”
“그래?”
 
이따 세시 반에 유치원차로 영서가 오면 좀 받아서 데리고 노소.“
 
“알았어.”
“냉장고에 바나나랑 우유가 있으니 간식을 챙겨 먹이고 되도록 컵라면은 먹이지 마소.”
“알았어.”
 
시계를 보니 아직 세 시가 채 안 되었다. 다시 소파에 길게 누워 텔레비전을 켜도 마침한 프로가 없었다. 뉴스를 틀어놓고 보는 둥 마는 둥 어느새 잠이 들었는데 따르릉 전화벨이 울리더니
“보소. 당신 잠들었능교?”
“아, 아니.”
“뭐로. 목소리가 잠에서 깬 목소린데.”
“...”
“아아 올 시간 다 됐심더. 어서 나가소. 갈 때 내 시장에 들러서 당신 좋아하는 칼치 사갈 게요.”
“알았어.”
 
하고 급히 슬리퍼를 찾아 신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가관이었다. 추리닝바지에 짧은 티셔츠와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아직도 잠이 덜 깬 눈빛이 흐릿했다. 사람 망가지는 것이 시간문제라더니 내일부터는 자신도 무언가 시작하며 정신을 좀 집중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파트 앞의 길에 나가 한참을 기다리니 울긋불긋 원색으로 칠한 차체에 번쩍이는 경광등을 단 유치원차는 물론 태권도장과 미술학원, 피아노학원의 승합차들이 잇달아 들어오며 아이들을 내려놓고 미리 나와 기다리던 부모들이 아이들을 번쩍 들어 올리거나 손을 잡아주며 반색을 했다. 한참이나 지나 영순씨가 말한 노란색의 토현유치원차량 중에서도 앞쪽 유리창에 복숭아마크가 붙은 차가 멎더니
 
“엄마아!”
“할머니!”
“아이구, 내 새끼!”
 
서로들 반색을 하며 아파트현관을 향하다
 
“영서야!”
 
반색하는 열찬씨에게
 
“왜 할아버지가 나왔어?”
 
]단단히 심통이 난 아이를 보며
아아, 영서할아버지시구나?”
 
여자들이 인사를 했다.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며
 
“가연이 안녕!”
 
7층에서 내리는 가연이와 할머니, 또 11층에서
 
“다혜 안녕!”
 
하는 소리에 다혜와 그 어머니를 기억하고 12층에서 내리면서 영서가
 
“동현이 안녕!”
 
하는 인사소리를 듣고 13층의 동현이까지 곰곰이 얼굴의 생김새와 특징을 떠올리며 기억하려 하는데
 
“할아버지 나 배고픈데.”
 
거실바닥에 아무렇게나 유치원가방을 던지는 걸 받아 탁자위에 놓으며
 
“그래. 우유랑 바나나 먹어.”
 
하며 꺼내주자
 
“할아버지 나 우유랑 바나나 싫어. 컵라면 먹으면 안 돼?”
 
딱 영순씨의 염려대로 나오는 지라 한참이나 궁리하다
 
“영서야, 그러면 할아버지가 김치볶음밥 해주면 안 될까?”
“아아, 할아버지 김치볶음밥!”
 
영서가 금방 웃는 얼굴이 됐다. 얼마 전 주말의 출출한 오후에 혼자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식탁에 앉는데
 
“할아버지!”
 
어미의 손을 잡고 영서가 들어오고 아이어미가
 
“엄마는 어데 갔는가베. 도연씨하고 나는 친구들 모임에 가는데 영서는 할아버지차지가 되겠네. 아빠, 잘 부탁해요.”
 
하고 가버리자
 
“할아버지 나 배고파.”
 
바로 식탁에 앉아 하도 맛있게 먹어
 
“너거 집에는 김치 볶음밥 안 해 주나?”
“해 줘. 엄마보다 아빠 볶음밥이 더 맛있어.”
“그럼 할아버지 볶음밥은?”
“응. 할아버지 볶음밥도 맛있어.”
“그래 그게 바로 할아버지의 꿀 볶음밥이지.”
 
하며 속으로 웃었다. 음식을 잘 만들지도 않지만 깔끔한 영순씨가 쳐다보려고도 않는 열찬씨의 요리를 순진한 영서가 먹어주는 것이 너무나 신통했던 것이었다.
 
냉장고 야채 칸을 뒤져 감자와 양파, 오이를 찾아내고 냉동실에서 돼지고기도 조금 떼어내고 김장용 배추김치도 찾아내어 도마 가득 썰어놓고 프라이팬에 볶으며 소금 간을 맞추고 마지막에 밥을 넣어 완성을 하여 신문지에 깔고 식탁에 놓으니
 
“와 맛있겠다!”
 
영서가 반색을 하고 덤비고 열찬씨도 수저와 소주잔을 챙기고 냉장고에서 먹다 둔 소주병을 꺼내는데 따르릉 초인종이 울려 문을 열자
 
“영서야!”
 
태권도복으로 갈아입은 7층의 가연이가 들어와
 
“그래 너도 같이 먹자!”
 
숟가락을 건네주는데 또 따르릉 벨이 울리며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역시 태권도복의 13층 동현이가 들어와 식탁에 앉히고 소주를 따르는데
 
“안녕하세요?”
 
계집애 둘이 동시에 인사를 했다. 하나는 아래층의 다혜라는 어린이고 얼굴이 희고 동그란 아이는 낯이 선데
 
“다혜야, 민서야, 어서 와!”
 
아이들이 반기는 목소리를 듣고 영순씨에게 영서와 제일 친하다는 123동의 민서라는 이름을 떠올리며 역시 이름과 생김새를 외우기로 했다. 출출해서 소주 안주를 하려고 좀 넉넉히 밥을 볶았지만 졸지에 아이 넷이 더 붙으니 금방 바닥이 나서 바나나와 야쿠르트를 하나씩 돌리니 안 먹는다는 영서까지 잘도 먹었다. 알뜰히 긁어먹고도 프라이팬에 쳐진 커다란 배추뿌리부분을 안주로 거푸 소주 두 잔을 마시고 설거지를 하는데 아이 다섯은 열찬씨와 똑 같은 자세를 흉내 내며 텔레비전을 보는 영서를 비롯해 열찬씨의 서재에 들어가 비잉 둘러보다 서가에 놓인 종을 뎅! 하고 울려보며 신이 난 동현이와 안방 영순씨의 침대위에 올라가 폴짝폴짝 뛰는 세 계집애들로 집안전체가 북새통이 되었다. 마지못한 열찬씨가
 
“예들아, 할아버지랑 호수공원이랑 동산에 가자!”
 
하니
 
“야아, 신난다!”
 
모두들 따라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는데 영순씨가 내리면서
 
“어데 가는데?”
“호수공원.”
“야아, 오랜만에 할아버지 노릇 한 번 하시는구나. 보소 가연이하고 동현이는 네 시 반에 태권도장에 가야 되니 그 안에 오이소.”
 
하는 걸로 보아 자주 놀러오는 아이들인 모양이었다. 아이 다섯을 데리고 테라스 동(棟) 계단 길을 내려가 오목하게 자리 잡은 백여 평의 제법 큰 연못에 도착하자 마침 하루 두 번 두 시간의 가동시간이 되었는지 분수가 시원스레 물을 뿜어 올리고 있었다.
 
“야, 분수다!”
“야, 고기다. 황금붕어!”
 
신이 나서 뛰어노는 아이들에게
 
“조심해라. 물에 빠질라.”
 
하고 벤치에 앉아 연신 머리 다섯을 세어보다
 
“이리 와 봐! 우리 호수공원에 꽃이 몇 가지나 피었는지 세어보자.”
 
하고 아이들을 불러
 
“이 붉은 꽃은 연산홍, 노란 건 붓꽃, 보랏빛은 수수꽃다리 또는 라일락, 요 바닥에 붙은 꽃은 사랑꽃, 요 키다리 꽃은 접시꽃...”
 
해도 아이들은 별 관심이 없는지 휘잉 연못 주위를 달리는 동현이 쪽으로 모두 눈을 돌려 위험한 물가보다는 바로 위쪽에 보이는 안전한 어린이 놀이터로 옮겨 저들끼리 놀게 하고 한쪽 구석에 앉아 휴대폰의 주소록을 훑어보며 아이들 쪽을 흘낏거리는데
 
“보소!”
 
문득 전화기 속에서 영순씨의 목소리가 울려나오며
 
“어덴교?”
“호수공원위에 어린이 놀이터.”
“동현이, 가현이 태권도장 갈 시간임더. 올라오소.”
 
하는 소리에 아이들을 철수시켰다.
 
 
※ 이 대하소설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