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플러, 최후의 신비주의자이자 최초의 천계(天界) 물리학자
케플러, 최후의 신비주의자이자 최초의 천계(天界) 물리학자
  • 조송현 조송현
  • 승인 2017.02.25 14:18
  • 업데이트 2018.08.16 09: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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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플러, 최후의 신비주의자이자 최초의 천계(天界) 물리학자
요하네스 케플러. 출처: 위키피디아
요하네스 케플러. 출처: 위키피디아

피타고라스에서 출발한 인류의 우주관 여행은 코페르니쿠스와 티코를 거쳐 막 케플러에 도착했습니다. 우주관 혁명의 여명기라고 할 수 있는 곳이지요. 코페르니쿠스는 ‘태양 중심 지동설 (Heliocentrism)’을 제창해 우주관 전환의 계기를 마련했으나 미완에 그쳤습니다. 그 자신이 고대 그리스의 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데다, 태양 중심설도 우주를 올바르게 설명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체계였으니까요.

반면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한계를 넘어 행성 운동의 본질에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만유인력의 맹아를 피어올렸습니다. 케플러는 갈릴레이와 함께 뉴턴의 우주관 혁명에 결정적인 디딤돌이 된 것입니다. 참, 우주관(宇宙觀)은 인류의 우주에 관한 과학적인 견해를 말합니다.

케플러의 성취를 들면, 첫째 행성의 운동이 타원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 발견은 2000년 넘게 군림해온 ‘행성 궤도는 원’이라는 절대관념을 깨뜨린 일대 사건입니다. 천체의 운동에 관한 인류 사고의 도약인 것입니다.

케플러의 성취 ... 행성 궤도는 타원, 행성 운동의 근원은 태양, 공전 궤도-반지름 관계 수식화

둘째, 행성들의 궤도 운동을 일으키는 힘의 근원을 탐구하고 그것이 태양임을 밝히면서 뉴턴의 중력법칙 발견의 토대를 제공했다는 점입니다. 셋째, 행성의 궤도 운동 주기와 궤도 반지름과의 관계를 수식으로 정립했는데, 이는 근대 물리학의 출발점으로 평가됩니다. 근대 물리학의 모든 법칙은 수식으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는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가 발표된 지 28년 후인 1571년 독일의 작은 도시 바일(Weil)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59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기구한 운명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전쟁터를 전전하다가 제대한 후 빚보증을 잘못 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간신히 처형을 면하고 케플러가 17세 되던 해에 다시 군대에 나갔는데 소식이 끊겨버렸다고 합니다. 케플러의 어머니는 천문현상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로 인해 마녀로 오인되어 화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날 때부터 몸이 약했던 케플러는 어머니를 변호하면서 가난에 시달리며 평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케플러가 살던 시대의 독일은 가톨릭과 신교 사이의 ‘30년 전쟁(1618~1648)’ 중이었습니다. 독일 경제는 파탄지경이었고, 신교도였던 케플러는 종교적으로도 심한 압박을 받았습니다. 케플러는 수도원학교에 들어갔지만 학교생활은 즐겁지 못했습니다. 성격 탓에 급우들로부터 미움을 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천문학과 수학에서 위로를 찾고 비운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케플러에게 1577년 혜성과 1580년에 일어난 월식을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기구한 운명적 삶 ... 아버지 군대에서 소식불통, 어머니 마녀로 오인받아 화형 선고

케플러는 1589년 튀빙겐 대학 신학과에 진학했고, 졸업 후 23세 되던 해에 프로테스탄트 계열의 그라츠 신학교의 교사 겸 역산학자가 되었습니다. 교사로서는 인기가 없었으나 역산학자로서는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그는 큰 추위의 임박과 터키의 침입을 예언했는데, 이것이 들어맞자 예언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당시 점성술에 관심이 많았던 황제 루돌프 2세는 이 일을 듣고 케플러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나중에 티코 브라헤와의 만남과 천문표인 ‘루돌프 표’를 만든 것, 마녀로 오인돼 화형선고를 받은 어머니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점성술사로 유명해져 루돌프 2세를 만난 덕분이었습니다.

케플러가 천문학자로서 유명하게 된 것은 『우주의 신비(Mysterium Cosmographicum)』(1596)를 펴내면서입니다. 25세의 젊은 나이에 처녀작으로 발표한 이 책은 태양계의 비밀을 풀었다는 평가와 함께 유럽 전역에 일약 천문학자로서 케플러의 명성을 떨치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우주의 신비』는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과학도서라기보다 신비한 이야기책에 가깝습니다.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수용해 행성 궤도 사이의 수학적 조화를 탐구하여, 행성 궤도의 수정천구 사이에 다섯 개의 다면체가 알맞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 책으로 유명 인사가 되었고, 특히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인 티코의 관심을 끄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처녀작이자 출세작 『우주의 신비』, 사실은 과학도서라기보다 신비한 이야기책

케플러의 탄생 이듬해인 1572년 천문학적으로 유명한 사건이 터졌습니다. 카시오페아 별자리에서 초신성이 나타난 것입니다. 티코 브라헤가 열심히 관측한 이 신성은 초기엔 낮에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밝았고, 18개월 후인 1574년 초까지 빛나다가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천상세계는 완전하고 영원불멸하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 태어나지도, 기존의 것이 소멸하지도 않는다는 당시 우주관의 근간을 뒤흔든 사건이었습니다.

케플러는 시력이 나빠 결코 뛰어난 하늘의 관측자가 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라츠 신학교에서는 관측 자료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순수이성과 상상력을 발휘하여 우주의 본성을 설명해내려고 시도했던 고대인들의 정신적 발자취를 좇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당시 그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졌습니다. 지구가 하나의 행성으로서 태양을 도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 지동설 체계가 옳다면, ‘우주에는 왜 행성이 여섯 개인지, 행성의 궤도 크기와 공전 주기는 왜 그렇게 돼야 하는 것일까?’ 케플러는 태양 중심 지동설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태양계 전체의 존재 근거를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당시 알려진 행성의 수는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의 여섯 개입니다. 행성 궤도 반경의 상대적인 크기는 태양 중심설에서는 처음으로 제기된 문제였고, 행성의 개수 6의 유래나 궤도 반경과 공전주기 사이의 관계도 그때까지 누구도 의문을 던진 적이 없었던 문제였습니다. 또 이 같은 의문이 모두 정량적(수치적)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케플러의 기하학적 우주 모형 ... 완전성 의미하는 플라톤의 정다면체에서 영감

그런데 근대 과학의 시발점이 된 이 같은 문제의식이 사실상 고대 신비주의 사상에 젖어있던 케플러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케플러는 플라톤주의자였고, 과학혁명 여명기에 최후의 신비주의자였던 셈입니다. 그는 플라톤이 『티마이오스 Timaios』에서 말했듯이 “가장 완전한 건설자인 창조자가 가장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천체가 어떤 기하학적인 질서와 조화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플라톤 사상을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이런 케플러에게 어떤 신의 계시와도 같은 영감이 떠올랐습니다. 완전성을 의미하는 정다면체를 토대로 한 기하학적인 우주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플라톤 입체 혹은 피타고라스 입체로 불리는 이들 입체는 기본 요소 도형이 3각형인 정사면체 정이십면체 정팔면체, 요소 도형이 4각형인 정육면체, 요소 도형이 5각형인 정십이면체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케플러의 기하학적 우주 모형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케플러의 ‘우주의 신비(Mysterium Cosmographicum,1600)’에 발표된 천체 모형. 이것은 플라톤의 다면체에서 영감을 받아 구체화한 것이다. 케플러는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등 6개 행성이 도는 궤도가 플라톤의 정다면체들이 서로 겹쳐 있는 구조에서 내접, 회접하는 3차원 구라고 주장했다. 정팔면체, 정이십면체, 정십이면체, 정사면체, 정육면체의 순으로 다면체를 배열할 때 3차원 구의 간격이 행성들의 궤도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케플러는 나중에 행성이 타원궤도 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이 천체 모형을 스스로 폐기했다. 이 모델은 다만, 당시 지배적인 권위를 갖고 있던 천동설에서 벗어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한 첫 번째 우주 모형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케플러의 ‘우주의 신비(Mysterium Cosmographicum,1600)’에 발표된 천체 모형. 이것은 플라톤의 다면체에서 영감을 받아 구체화한 것이다. 케플러는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등 6개 행성이 도는 궤도가 플라톤의 정다면체들이 서로 겹쳐 있는 구조에서 내접, 회접하는 3차원 구라고 주장했다. 정팔면체, 정이십면체, 정십이면체, 정사면체, 정육면체의 순으로 다면체를 배열할 때 3차원 구의 간격이 행성들의 궤도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케플러는 나중에 행성이 타원궤도 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이 천체 모형을 스스로 폐기했다. 이 모델은 다만, 당시 지배적인 권위를 갖고 있던 천동설에서 벗어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한 첫 번째 우주 모형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는 자신의 저서 『우주의 신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구 궤도는 모든 궤도의 척도이다. 여기에 정십이면체를 외접시켜보자. 그러면 이 입체에 외접한 구가 화성의 궤도가 된다. 다시 화성의 궤도에 정사면체를 외접시키자. 그러면 이 입체에 외접하는 구가 목성의 궤도가 될 것이다. 목성의 궤도에 입방체를 내접시키면, 이 입체에 외접하는 구가 토성의 궤도가 된다. 한편 지구의 궤도에 정이십면체를 내접시키면, 이 입체에 내접하는 구가 금성의 궤도가 된다. 금성의 궤도에 정팔면체를 내접시키면, 내접하는 구가 수성의 궤도가 될 것이다.”

이 모형으로 산출한 궤도 반경의 비율이 우연히도 실제 측정으로 얻은 값과 아주 잘 들어맞았으므로 케플러는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입각했다고 하지만 당시 케플러의 정신은 아직 근대 이전의 것이었고, 현대인에게는 신비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당시 평판이 좋고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은 이와 같은 발상이 당시에는 위화감 없이 유럽 사회에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주의 신비』의 성공으로 케플러는 자신의 천직은 성직자가 아니라 천문학자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행성의 타원 궤도를 발견함으로써 자신의 기하학적 우주 모형 스스로 폐기

『우주의 신비』를 통해 내놓은 기하학적 우주 모형은 케플러 자신이 행성들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긴 타원형이라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곧바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후 행성이 6개보다 더 많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주의 근본적인 이론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우주의 신비』가 전근대적이고 신비주의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 속에는 근대 과학혁명의 상징인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의 맹아가 싹트고 있었습니다. 케플러는 행성이 태양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궤도를 더 천천히 돌고 있다는 코페르니쿠스 관측 결과를 토대로, 행성들은 태양에서 뻗어 나와 그것들을 밀고 있는 힘(그에 따르면 활력)에 의해 궤도를 따라 계속 돌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태양에서 멀어질수록 활력이 덜 왕성할 것이므로 멀리 떨어진 행성일수록 더 천천히 돌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케플러의 삶은 1600년 2월 4일 새로운 전환을 맞았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루돌프 2세의 고문인 바론 호프만의 소개로 당시 천문 관측의 1인자인 티코 브라헤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 것입니다. 그때 티코의 나이는 53세였고, 케플러는 28세였습니다.

티코는 방대하고 정확한 천문 자료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 자료를 분석해줄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던 차였습니다. 반면 케플러는 수학적 능력과 우주의 신비를 풀겠다는 열정의 천문학자였지요. 티코는 방대한 자료를 정리해줄 조수가 필요했고, 천문학자인 케플러는 천문관측 자료가 필요했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천상의 결합인 셈이지요.

티코 브라헤와의 운명적인 만남 ... 하늘의 비밀을 풀어줄 '신의 배려'

케플러가 티코의 풍부한 관측 데이터를 갈망한 구체적인 이유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다면체 이론으로 계산한 행성의 궤도의 반지름이 코페르니쿠스 값과 차이가 났던 것입니다. 정확한 관측 자료만이 그 차이를 보정하고,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케플러는 티코의 조수로 일하기 위해 1600년 9월 프라하로 이주했습니다. 티코는 곧바로 케플러에게 화성 궤도에 관한 일을 맡겼습니다. 케플러로서는 그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그는 1609년 선보인 『새로운 천문학(Astronomia Nova)』에서 “화성의 궤도 운동은 천문학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에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며, 이를 연구하지 않았다면 그 비밀을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고 회고하면서 그 과정을 ‘신의 배려’라고 표현했을 정도입니다.

화성은 당시 알려져 있던 외행성 중에서 이심률이 가장 크고, 원 궤도에서 벗어나는 정도가 가장 두드러진 행성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케플러는 화성을 통해 행성의 타원 궤도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행성들은 궤도가 원에 너무 가까워 티코 브라헤의 데이터가 아무리 정밀하다 하더라도 타원 궤도를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프라하에 있는 티코-케플러 동상.
프라하에 있는 티코-케플러 동상.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편치 않았다고 합니다. 케플러는 티코에게 의지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고, 티코는 케플러가 배신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케플러가 티코 문하에 들어간 지 1년이 조금 지난 1601년 10월 티코는 세상을 떠납니다.

타원 궤도 발견의 결정적인 요인 ... 티코 브라헤의 화성 궤도 관측 자료

티코는 유언에서 행성궤도 표인 ‘루돌프 표(Rudolhine's Tables)’를 완성할 임무와 함께 방대한 관측자료 관리 책임을 케플러에게 넘겼습니다. 티코는 그 자료를 넘기면서 코페르니쿠스 모형이 아니라 티코 모형의 진리를 밝히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관측 자료를 케플러에게 넘긴다는 데 많은 반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티코는 임종 직전에도 정신이 뚜렷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케플러가 조수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수학자로서 관측 자료를 가장 잘 사용할 것임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후에 라이프니츠는 티코의 관측 데이터가 케플러 손에 들어간 것을 ‘신의 섭리’라고 평가했습니다.

케플러는 티코의 관측자료, 특히 20년 가까이 축적된 화성의 관측 자료와 수년 간 씨름한 끝에 “행성은 태양을 하나의 초점으로 삼아 타원 궤도를 그리며 돌고, 그때 반지름이 움직이면서 단위 시간에 그리는 면적은 항상 일정하다.”는 ‘케플러의 제2, 제1 법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천문학 역사상 최초의 근대 물리학적 법칙이 탄생한 것입니다. 근대 물리학적 법칙은 정량적 관측과 통계적으로 정확도가 보증된 데이터로 뒷받침되어야 하며, 동시에 엄격하게 정의된 수학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케플러의 이들 법칙은 이 조건을 만족하는 천문학 역사상 최초의 법칙인 것입니다.

<'우주관 오디세이' 저자·인저리타임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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