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의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서',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뉴턴의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서',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 조송현 조송현
  • 승인 2017.04.11 22:24
  • 업데이트 2018.09.03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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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서',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프린키피아'를 들고 있는 뉴턴이 새겨진 1파운드짜리 영국 지폐. 어깨 위에 사과와 옆에 망원경도 보인다. 뉴턴은 56세 때인 1699년부터 약 30년간 영국 조폐국장으로 일하며 통화질서를 바로잡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프린키피아'를 펼쳐들고 있는 뉴턴이 새겨진 1파운드짜리 영국 지폐. 어깨 위에 사과와 옆에 망원경도 보인다. 뉴턴은 56세 때인 1699년부터 약 30년간 영국 조폐국장으로 일하며 통화질서를 바로잡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우주관 오디세이 - 뉴턴, 우주의 수학적 원리를 캐다

“만약 내가 멀리 보았다면(많은 과학적 성취를 이루었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에 가능했다(If I have seen farther, it is by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

이 문장은 뉴턴이 1676년 2월 5일 그의 경쟁자 로버트 훅에게 보낸 편지에 적혀 있습니다. 뉴턴이 그의 선배인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 그리고 갈릴레이와 로버트 훅의 과학적 발견에 도움을 많이 받았음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이는 대가인 뉴턴의 겸손한 면모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문장으로 흔히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편지의 전후 사정, 특히 훅과의 갈등을 살펴보면 뉴턴이 겸양의 소유자와는 거리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뉴턴과 훅의 갈등은 뉴턴이 왕립협회 회원에 선출된 1672년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뉴턴은 그 해 왕립협회에서 빛과 색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는데, 훅의 앞선 연구 성과(뉴턴 고리로 알려진 것)를 평가절하여 제대로 인용하지 않음으로써 반발을 샀습니다.

뉴턴은 자신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인 『광학』을 훅이 사망한 이듬해인 1704년에 출판했습니다. 20~30년 전에 완성된 연구 성과에 대한 출간을 이처럼 늦춘 것은 경쟁자인 훅의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유력합니다.

특히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완성하는 데에 훅의 연구를 참고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린키피아』에는 이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길버트의 자력에서 중력의 개념을 유추한 케플러의 아이디어가 훅에게 이어졌고, 훅은 행성들의 궤도 운동이 궤도의 중심에 있는 태양이 끌어당기는 인력(중력)에 의해 발생한다는 가설로 발전시켰습니다.

훅은 나아가 태양이 행성에 미치는 중력의 크기가 태양-행성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수리적 표현까지 세웠습니다. 뉴턴은 이 같은 훅의 가설과 케플러의 행성운동 법칙을 바탕으로 만유인력의 법칙을 정식화하는 데에 성공한 것입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에서 훅의 공헌은 적지 않은 셈입니다.

다시 만유인력의 법칙의 물리적 개념을 살펴보겠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관성의 법칙과 인력의 법칙의 결합에 의해 정식화 되었습니다. 지구의 인력이 없다면 달은 관성의 법칙에 의해 회전 운동이 아니라 직선 운동을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태양계의 행성들도, 만약 태양의 중력이 없다면 직선 운동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달이나 행성들이 직선 운동을 하지 않고 회전 운동을 하는 것은 궤도 중심의 천체가 달과 행성들을 끌어당기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한 것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향한 결정적인 도약이었습니다.

1666년 5월 23일 왕립협회에서 발표한 훅의 논문에는 '행성의 직선 운동을 구부리는 원인은 회전 중심에 놓인 태양이 자신의 방향으로 행성을 끊임없이 끌어당기는 인력 때문일지도 모른다'1)는 문장이 들어 있다.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발간되기 21년 전입니다.

경쟁자에게 냉혹하고 때로는 비겁했던 권력자 뉴턴

훅은 또 1679년 11월 24일 뉴턴에게 보낸 편지에서 ‘행성의 운동을 접선 방향으로의 직선 운동과 회전 중심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운동의 합으로 보는 나의 가설 또는 견해’에 대해 뉴턴의 견해를 묻고 있습니다.2) 특히 이듬해 1월 6일 훅이 보낸 편지는 과학자들이 그토록 찾아 헤맨 ‘역 제곱’이라는 정량적인 표현까지 들어 있습니다.

“내 가정은 인력은 항상 중심으로부터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것입니다.”3)

이들 편지야말로 뉴턴에게는 만유인력 법칙의 정식화를 향한 결정적인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출판한 것이 1687년이었는데, 이는 그 3년 전 핼리가 뉴턴을 방문해 “태양으로부터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을 받는 행성의 궤도 형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뉴턴은 핼리의 질문을 받고 “몇 년 전에 그 문제를 이미 풀었다”고 했으니 1680년 전후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1679년 받은 훅의 서신 내용이 결정적인 참고가 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만유인력 법칙의 착상 시점은 흔히 케임브리지 대학생이던 뉴턴이 페스트 때문에 고향에 내려가 있던 시기(1665~1666년)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뉴턴도 사적으로 “훅이 기여한 몫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뉴턴은 『프린키피아』에 훅의 이름을 넣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습니다.

이 같은 전후 사정을 감안해 보면, 뉴턴이 편지에 언급한 ‘거인들’의 의미는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풍채가 볼품없었던 훅을 겨냥해 “케플러와 갈릴레이 등 훌륭한 선배들과 위대한 고대 철학자들의 아이디어를 빌렸을망정 당신(로버트 훅)의 도움은 필요치 않았다.”는 뜻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일생 동안 학문적 경쟁자들에게 냉혹했던 뉴턴의 성정을 감안하면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뉴턴은 훅 말고도 동시대 인물인 영국 왕립천문학자인 존 플램스티드에게 학문적 빚을 크게 졌습니다. 뉴턴은 『프린키피아』를 완성하는 데 있어 최초의 왕립천문학자인 존 플램스티드의 매우 세밀한 관측에 의해 제작된 천문목록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최종 편집에서 플램스티드의 도움 내용을 삭제했습니다.

뉴턴은 심지어 케플러에게 진 빚도 『프린키피아』에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케플러 법칙으로부터 만유인력의 법칙을 도출했다고 스스로 인정했음에도 말입니다. 원고를 탈고한 해인 1686년 뉴턴은 에드먼드 핼리에게 보낸 한 편지에 자신의 만유인력 법칙에 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약 20년 전쯤에 행성 운동에 관한 케플러의 법칙으로부터 이 관계(만유인력 법칙)를 추론해 낼 수 있었다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도 인간적인 면에서는 이처럼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일반적인 역사가 그러하듯 과학사도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일까요?

가설을 세우지 않는다고 해놓고 왜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을 상정했을까?

뉴턴은 ‘가설을 세우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실제로 그의 역학은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이라는 가설 혹은 관념의 토대 위에 세워졌습니다. 뉴턴이 『프린키피아』에서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절대공간은 자신의 본성에 따라서 스스로 존재하며, 외부의 어떠한 것과도 관계가 없고, 늘 똑같으며 움직이지 않는다. 상대공간이란 어떤 움직이는 좌표이거나, 또는 절대공간의 척도(measure)를 말한다. 물체의 위치를 통해 우리는 이 상대공간을 파악한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움직이지 않은 공간으로 여긴다. 이러한 예로는 땅속 공간, 공중 공간, 우주 공간을 들 수 있다. 이것들은 모두 지구와의 상대적 위치에 따라서 결정된다. 절대공간과 상대공간은 생김새나 크기는 같다. 그러나 이들이 수치상으로 늘 같은 것은 아니다.

절대, 진짜, 수학적 시간이란 스스로 존재하며 외부의 어떠한 것과도 관계가 없이 자신의 본성에 따라 늘 똑같이 흐른다. 이것은 지속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상대, 겉보기, 통상적 시간이란 움직임에 의해서 감지할 수 있고 잴 수 있는(정확하든, 틀리든) 시간을 말한다. 우리는 진짜 시간 대신에 이러한 시간을 쓰곤 한다. 시간, 일, 월, 년이 이런 것들이다.4)

“나는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고 한 뉴턴이 왜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이란 가설적 개념이 필요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운동법칙을 세우기 위해 정지와 운동이라는 개념을 정의하고 사용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운동이란 특정 시간 동안 위치 이동을 의미하기 때문에 균일하게 흐르는 시간과 절대적 기준이 되는 공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법칙을 만드는 데 있어 지구는 기준이 될 수 없음은 뉴턴에게 너무도 분명했습니다. 그 당시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이 이미 확인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뉴턴은 자신의 운동법칙이 필연적으로 범우주적 법칙이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전 우주의 운동 기준으로 절대 부동의 공간인 절대공간을 가정했습니다. 이 절대공간을 기준으로 마침내 우주에서의 절대정지와 절대운동을 논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또 한결같은 속도로 흐르는 절대시간도 도입했습니다. 뉴턴은 시간과 공간에 대해 절대불변의 실체이며 이들로 구성된 우주 역시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견고한 세계라고 생각했습니다. 뉴턴은 이들 두 개념을 가정함으로써 ‘나는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라는 우주적인 물음에 답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뉴턴은 절대공간이 무한히 많은 관성계 중 어느 하나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난점이 있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관성계(inertial frame)란 관성의 법칙이 성립하는 좌표계로, 갈릴레이는 아득히 먼 우주의 공간 중 중력이 미치지 않는 특수한 공간을 상정했습니다. 이것은 절대공간과 거의 비슷한 개념입니다. 이 공간에 일정 좌표계를 설정해 관성계로 삼으면 이것과 등속운동(속도의 변화, 즉 가속도가 없는 운동이며, 원 운동은 속도가 시시각각 변하는 가속도 운동이다.)하는 좌표계는 모두 관성계이다. 따라서 절대공간과 등속 운동하는 공간을 모두 관성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난점은 바로 뉴턴이 역학 체계를 세우는 데 기초가 된 갈릴레이의 ‘상대성의 원리’(아인슈타인 특수상대성이론의 기초가 된 2개 공준 중 하나)에 의해 드러났습니다. 상대성의 원리란 서로에 대하여 등속운동을 하는 좌표계에서는 모든 물리 법칙은 동일하며, 이들 좌표계의 모든 관찰자는 자신의 좌표계를 정지계로 간주할 수 있다는 원리입니다. 이를 관성계로 표현하면 두 관성계에 있는 모든 관측자는 동일한 물리 법칙을 겪으며, 이들은 모두 자신의 관성계를 정지계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절대공간은 우주의 어디엔가 존재하는 절대정지의 공간으로 뉴턴의 운동법칙이 완벽하게 성립하는 관성계입니다. 따라서 이 같은 관성계는 무수히 많을 가능성이 있는데, 왜 절대공간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해야 할까요? 게다가 절대공간은 실험적으로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뉴턴은 절대공간이란 개념의 불완전성을 솔직히 시인했습니다.

이 같은 어려움은 절대공간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포기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모든 관성계를 절대공간으로 봄으로써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뉴턴은 그런 타협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뉴턴은 절대공간과 절대시간 가설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뉴턴 역학'의 성공이 결국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의 정당성을 입증해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절대공간이라는 개념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를 믿었던 뉴턴은 신이 세계를 시간과 공간, 정확히 말하자면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으로 창조했다고 했습니다.

뉴턴의 절대공간과 절대시간 개념은 아일랜드의 철학자이자 성직자인 조지 버클리와 라이프니츠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더욱이 100년 후 제기된 라플라스(1749~1827)의 비판은 유명합니다. 라플라스는 당시까지의 과학적 결과를 모두 종합해 체계화한 대작 『우주체계론』 『천체론』과 확률에 관한 『확률과 해석적 이론』을 저술했습니다.

라플라스가 나폴레옹에게 『우주체계론』을 바쳤을 때, 나폴레옹이 “라플라스 백작, 그대는 우주체계에 관해 이 대저를 발간했으나 그 속에 창조주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없다면서?”라고 묻자, 그는 “폐하! 저에게 가설은 필요하지 않습니다.”라고 태연히 대답했다고 합니다. 라플라스의 이 말은 신의 역할을 상정한 뉴턴의 역학 체계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의 의미로 해석됩니다.

또 그로부터 100년 후인 19세기에 에른스트 마흐가 뉴턴 역학을 호되게 비판했습니다.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은 살아남아서 뉴턴이 그 바탕 위에 건설한 역학 체계는 1905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나오기까지 200년 넘게 절대과학으로 군림할 수 있었습니다.

※ 1)야마모토 요시타카, 과학의 탄생, 동아시아, 2005, p.790(원전 : Birch, Vol.2, p.90)
2)같은 책 p.791(원전 : Hooke to Newton, 24 Nov. 1679. Correspondence of Isaac Newton, Vol.2, No.235, p.297)
3)같은 책 p.793(원전 : Hooke to Newton, 6 Jan. 1679/80, Correspondence of Isaac Newton, Vol.2, No.239, p.309)
4) '프린키피아'(이무현 옮김, 교우사)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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