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에 관한 관견(管見)  ④경제가 성장한다고 내 삶이 나아지는가?
기본소득에 관한 관견(管見)  ④경제가 성장한다고 내 삶이 나아지는가?
  • 조송원 조송원
  • 승인 2017.05.27 19:21
  • 업데이트 2017.06.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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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에 관한 관견(管見)  ④경제가 성장한다고 내 삶이 나아지는가?

장하성(고려대 경영대학원 교수) 청와대 정책실장과 한국의 불평등을 분석한 장 정책실장의 저서 '왜 분노해야 하는가' 표지.

昨日到城郭(작일도성곽) 歸來淚滿巾(귀래루만건) 遍身綺羅者(편신기라자)  不是養蠶人(불시양잠인)

어제 성 밖에 나갔다가 눈물 흠뻑 흘리며 돌아왔지. 온몸에 비단을 감고 있는 사람들 하나같이 누에 치는 사람은 아니더군.

양복 한 벌 값이 50만 원. 싼가, 비싼가? 싸다고 할 수도 있고 비싸다고 할 수도 있다. 더 적확히 말하면 싼지 비싼지 우리는 알 도리가 없다. 흔히들 시장가격은 수급관계의 변동에 따라 등락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상품 생산에 종사하는 자본에게 균등이윤율(평균이윤율)을 보장하는 수준의 가격, 즉 생산가격에 일치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교과서적 설명으로는 양복 값이 적정한지의 여부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경제’라는 단어의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은 무지렁이라도 익히 알고 실천하고 있는 아주 간명한 기준이 있다. 바로 자신의 소득이다. 월 소득이 1,000만 원 이상이면 아주 싸다고 할 것이고, 100만 원이라면 양복은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옷이 될 것이다.

소득이 ‘만물의 척도’이다. 소득재분배가 잘되면 경제성장률도 올라간다(현대경제연구원 보고서.2017.5.14.). 한데 우리나라의 소득불평등 정도는 2000년 이후 심화되어 오늘의 ‘헬조선’에 이르고 있다.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장하성 고려대 교수(현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는 1990년부터 지난해까지 각 경제주체의 누적성장률을 물가상승을 제외한 실질가치 기준으로 분석한 자료를 지난 1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개했다. 장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이 기간 기업총소득 누적 증가율은 358%이고, 경제성장률은 260%인 반면, 가계총소득 증가율은 186%에 그쳤다. 이 분석 결과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첫째, 기업은 부자가 되었으나 가계는 기업의 반밖에 소득이 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996년 국민총소득 중에서 가계소득으로 분배된 비율은 71%였으나 2014년에는 62%였다. 반면 기업소득으로 분배된 비율은 16%에서 25%로 늘어났다.

장 교수는 자신의 저서 『왜 분노해야 하는가』에서 “경제가 성장했는데도 불구하고 보통 국민들의 삶이 더 나아지지 않았고 소득 불평등이 더욱 악화되었다면 성장의 성과가 임금으로 분배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국민총소득 중에서 가계로 분배된 몫이 지난 20년 동안 크게 줄었다. 경제성장의 성과가 가계, 즉 국민에게 분배되지 않고 대기업이 소유하는 기현상이 한국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둘째, 경제성장률의 증가가 반드시 내 소득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냥 개인과는 거의 무관한 ‘평균’일 뿐이다. 한 학급의 평균 점수 80점은 40점대의 학생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것과 같다. 경제가 260% 성장하면 뭐하나, 가계소득은 186%밖에 늘지 않았는데.

셋째, 가계소득 계층 간 불평등이 커졌다는 사실이다. 기업총소득 누적 증가율은 358%이고, 경제성장률은 260%인 반면, 가계총소득 증가율은 186%에 그쳤다는 것은 기업주나 사용자 가계의 소득증가율이 일반 가계의 소득증가율에 비해 훨씬 크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난 26년간 가계소득이 186% 증가했다고 치자. 그 결과로 우리의 삶이 186%로 더 나아졌는가. 답은 부정적이다. 그렇다면 ‘경제성장’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해야 하지 않을까?

앞의 <잠부(蠶婦, 누에치는 아낙네)>라는 한시(漢詩)는 평측법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고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당나라 이전의 작품이라는 말이다. 십 수 세기가 지난 오늘 이 시를 감상하면서 코끝이 찡해지는 것은 필자의 감상이 지나쳐서일까? 그때나 지금이나 경제적 불평등은 별반 진전된 바가 없다. 아마 고달픈 삶의 비율 또한 그러하리라.

‘잠부’의 시대는 출생이 당사자의 경제적 운명까지 결정하는 봉건 경제 시대였다. 필부들이 투쟁하고 희생하면서 역사는 발전하여 현 시대는 적어도 법적으로는 동등한 시장경제 시대이다. 그렇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경제적 불평등은 해소의 기미조차 없다. 하여 ‘먹고 사는 문제’는 어떤 이데올로기나 ‘주의(-ism)'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시장의 덕성을 부인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작동하는 시장의 배후에 존재하는 부와 소득과 권력의 불평등의 문제에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곧 과연 시장이 누구에게나 접근 가능하고 누구나 동등한 자격으로 배분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인가를 물어야 한다. 시장은 만능일 수도 없고 시시때때로 우린 ‘시장의 실패’를 경험하고 있다. 특히 시장은 본원적으로 경제적 약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주먹’으로밖에 작동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의 삶은 시장을 떠나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구조가 되었다. 정상적인 시장의 작동은 그만큼 우리 삶의 질에 관련성이 깊어졌다는 말이다. 하지만 너와 나,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일정한 비율의 사람에게는 반드시 시장은 실패자를 구조적으로 전제한다. 하여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시장의 실패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 그 유일한 해답이 필자는 기본소득이라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