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의 세 가지 열정: 사랑, 지식, 그리고 인간에 대한 연민 ... ㊥지식
러셀의 세 가지 열정: 사랑, 지식, 그리고 인간에 대한 연민 ... ㊥지식
  • 조송원 조송원
  • 승인 2017.09.28 15:43
  • 업데이트 2017.09.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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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세 가지 열정: 사랑, 지식, 그리고 인간에 대한 연민 ... ㊥지식

20세기를 대표하는 두 지성인 러셀과 아인슈타인이 주도한 '러셀-아인슈타인 선언' 표지. 사회주의-반사회주의 대립과 세계전쟁의 위험을 해소하고 세계평화와 인간성을 지키자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 선언은 1955년 7월 9일 런던에서 발표되었다.

“내가 똑같은 열정으로 추구한 또 하나는 지식이었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보고 싶었다. 하늘의 별이 왜 반짝이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삼라만상의 유전(流轉) 너머에서 수(數)들이 힘을 발휘한다고 설파한 피타고라스(Pythagoras. 그리스의 철학자, 수학자)를 이해해 보고자 했다. 그리하여 나는 많지는 않으나 약간의 지식을 얻게 되었다.” -프롤로그 중에서 (송은경 옮김, <버트런드 러셀 자서전>, 사회평론)-

산복도로를 걸었다. 정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녀와 같이 있는 시간을 늘리고픈 마음이었다. 아까 같이 저녁밥을 먹으면서, 막걸리를 나는 한 잔 너는 반 잔, 하며 꽤나 오랜 시간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 밑천이 떨어졌는지 어떤 사안의 갑론을설에 매듭이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하여튼 좀 걷고 싶었다. 그녀도 곁에서 걷는 품새가 가벼웠다.

마침 전망이 넓은 곳에 벤치가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같이 앉았다. 아파트 숲의 야경은 참 아름답게 느껴졌다. 돌리는 술잔이 나는 두 번, 그녀는 한 번인 것처럼 대화도 내가 두 몫, 그녀는 한 몫이었다. 그런 내가 한동안 침묵했는가 보다.

“나는 선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 저 많은 아파트에 왜 내 집이 없지, 하고 생각하고 있지요?”

뒤통수의 망치? 나는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한참이나 자세도 바꾸지 않고 눈길도 그녀 얼굴에 꽂은 채였다. 그녀의 몸짓은 확신에서 당황으로 변했다. 왜 그래요, 하며 내 손을 잡았다.

‘말은 마음의 똥’이라는 경구가 그렇게 절실할 수가 없었다. 1년 넘도록 일주일에 서너 번씩은 몇 시간씩 말하면 듣고, 물으면 답하고 또 서로 대화하곤 했는데... 역시 마음은 마음으로밖에 전달할 수 없는 일인가.

나는 헤아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저 아파트 가구마다 사람이 살고 있다는 흔적으로 불빛을 낸다. 그 불빛들이 어우러져 야경을 이룬다. 저 야경을 이루는 아파트 숲 각 세대들을 관통하는 이치가 뭘까? 무얼 바라, 무엇을 하며 일터, 배움터, 놀터에서 돌아와 밤이면 불 밝히며 저기서 둥지를 트는 것일까? 왜 그래야만 할까? 그렇게 시키는 세상 이치는 무엇일까?

그녀가 뭐라 뭐라 하는 말보다는 내 반쪽 같았던 ‘마음의 심장’에서 바람이 빠지고 있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 후 서로의 열정은 짚불처럼 사그라졌다. 벌써 30여 년 전의 일이다.

유난스레 여유작작했던 교사가 생각난다. 입성도 빼어났다. 과목이 달라 그 선생의 실력은 가늠할 길이 없었지만, 학생들의 평판은 별로 달갑지는 않았다. 마는 동료 교사들도 대체로 그 선생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신입 교사로서 뭐가 있기에 그럴까, 좀은 의아스러웠다.

“우리 아저씨는 책 읽기를 지독히도 싫어해요. 신문도 안 봐요. 예전에 하도 책을 많이 봐서 질렸다고 하데요.”

점심 후 교무실에서 삼삼오오로 망중한을 즐기다 어쩌다 거론된 독서에 대해 말이 오가는 중에 그 교사의 일성이었다. 자랑인지 자조인지 영 분간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매무새 고운 입성만큼이나 표정이 밝았다.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에 나는 순간적으로 인지부조화를 느꼈다.

뒤에 듣고 보니 그 교사의 남편은 공인회계사였다. 허참, 착각도 정도껏 해야지. 수험서 몇 십 권 수십 번 읽은 게 ‘질리도록’ 한 독서라니! 문득 ‘전문가 바보’라는 말이 생각났다. 인생이란 나그네 길에서 겨우 차표 끊고 기약된 여비 좀 마련한 걸 가지고 인생사 만사 해결로 오해하다니. 물론 그 당시 일반인의 지식에 대한 이해는 거기서 멈췄다. 젊은이가 공부한다고 하면, 으레 고시 공부하는 걸로 치부해 버렸으니까.

지금 50~60대에게는 흔히 듣던 우스개가 있었다. 시험을 쳐서 대통령을 뽑으면 누가 합격할까? 박찬종이다.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공인회계사시험, 고등고시 행정과,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고시 3관왕이다.

프랑스에도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 ‘학력만으로 대통령을 뽑는다면 아탈리가 1등’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학식이 깊은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 1943~ )이다.

아탈리는 파리공과대학, 파리고등정치학교, 국립행정학교 등 프랑스 명문 교육기관을 졸업하고, 소르본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곧 프랑스 최고 학력을 휩쓸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학력이 좋다는 말과 학식이 깊다는 의미는 그 함의를 달리한다.

아탈리는 단순히 ‘졸업장 채집자’가 아니다. 정치, 경제, 문화, 역사까지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지식과 통찰력으로 사회 변화를 예리하게 전망하는 것으로 유명한 유럽 최고의 석학이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까지 극찬한 진정한 지식인인 것이다.

40여 권의 책을 펴냈으며 『위기 그리고 그 이후』, 『미래의 물결』, 『인간적인 길』, 『합리적 미치광이』, 『마르크스 평전』, 『인류는 어떻게 진보하는가』, 『세계는 누가 지배할 것인가』, 『언제나 당신이 옳다』, 『긍정경제학』 등은 이미 한국에 소개되었다.

‘모든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프랑스 정치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 대중들이 단순한 ‘기능적 지식인’을 선망하는 사회와 ‘통합적 지식인’을 존중하는 사회, 이러한 다름은 어떤 차이를 결과할까? 바로 오늘날 한국과 프랑스 국민들의 삶의 질을 결정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탈레스(Thalēs. BC 624년 ~ BC 545년)는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하루는 별을 관찰하며 길을 걷다가 웅덩이에 빠졌다. 그러자 사람들이 비웃으며 쑤군거렸다.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높고 깊은 하늘의 일을 알려 하다니. 쯧쯧”

탈레스에 대한 일화는 많다. 유명하다 보니 위와 같은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유포되었는가 보다, ‘뉴턴의 사과’처럼. 사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뉴턴이 만유인력 법칙을 발견한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전하는 탈레스의 일화는 이렇다.

“그는 가난했던 탓에 철학이 쓸모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보여주는 실례라는 핀잔과 비웃음을 샀다.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아직 겨울인데 별을 관측하는 기술을 이용해 이듬해 올리브 농사가 대풍작을 거둔다는 사실을 예측했다. 그래서 얼마 안 되는 돈으로 키오스와 밀레토스의 모든 올리브 압착기의 사용권을 얻기 위한 공탁금을 걸었지만, 아무도 그와 경합을 벌이지 않았기 때문에 싼 가격에 사용권을 획득했다. 마침내 추수할 때가 되자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부랴부랴 몰려와 압착기를 빌리려 법석을 떠는 와중에, 그는 자기가 원하는 가격에 올리브 압착기를 임대해 준 대가로 엄청난 돈을 벌었다. 따라서 그는 철학자들이 원하기만 하면 쉽게 부를 축적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지만, 정작 철학자들의 야심은 다른 것이다.”

바다의 동서와 고금(古今)을 뛰어넘어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을 빼닮은 이야기이다.

사람들이 일생에서 추구하는, 누리려는 바가 ‘행복’이라 거칠게나마 총괄한다면, 사람들은 참 어리석다. 행복으로 직진하는 길을 두고 ‘돈’과 ‘권력’이라는 간이역에 도착하려 애면글면 애쓰다 생을 마감한다. 굳이 길을 두고 뫼로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에 답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진정한 ‘지식’이 아닐까? 이건 시험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곧 추석이다. 명절 때마다, 특히 연말연시에 굴곡 많은 인생 살림이나마 제대로 일구었음을 실감한다. 선물을 받을 바도 없고 줄 곳도 없다. 찾아오는 사람도 굳이 찾아갈 사람도 없다. 인사 받을 일도 없고 인사해야 할 일도 없다. 무명지사(無名之士)의 자유! 자유(自由), ‘스스로 말미암을’ 뿐, 결코 타인에 외물에 기대지 않는다!

이번 추석에는 산책 삼아 산소나 둘러보며 ‘탈정’(脫井. 제 안의 우물에서 벗어나는 것)의 걸림 없는 즐거움에 침잠할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