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건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건다?㊦
  • 조송원 조송원
  • 승인 2017.11.13 14:52
  • 업데이트 2017.11.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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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건다?㊦

<자객열전>의 내용을 토대로 그린 예양(왼쪽)과 예양이 조양자에게 붙잡힌 중국 하북성 싱타이(형태)현의 예양교. 출처:每日頭條

안동 양반에 대한 우스갯소리 하나.

옛날 어떤 사람이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는 문병 온 친구에게, “삼도천三途을 건너긴 건넜는데 염라대왕閻羅大王이 하는 말이, 너는 아직 올 차례가 아니라고 해서 그만 쫓겨났네 그려.” 라고 말했다.

“그래? 참 잘 됐네. 헌데 저승에서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만났는가?” “암, 만났고말고. 퇴계 선생, 학봉 선생, 서애 선생도 만나 뵙고 왔네.” “허, 거 참 반가웠겠네. 그래, 선생님들은 편안히 잘 계시던가?” “그런데, 그렇지가 않아.”

퇴계 선생은 어찌 된 영문인지 삐쩍 말라서 운신도 못하고 길바닥에 누워 있었다. 피골이 상접하여 몰골이 정말 형편없었다. “제발 적선해 주이소.” 라고 했는지 어쩐지는 확실치 않지만, 불쌍해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아니, 선생님. 도대체 어찌된 영문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퇴계 선생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글쎄, 이런 법이 어디 있소. 자손 놈들이 일은 안하고 그저 나만 뜯어먹고 있으니, 내가 아무리 영양을 섭취해도 도무지 배겨낼 도리가 있어야지.”라고 하소연했다는 것이다.

수백 년 전 조상이 이루어 놓은 업적이나 명성만을 신주단지처럼 떠받들고, 그것만으로 호구糊口하려는 양반들의 정체를 재치 있게 풍자한 이야기다. 뼈 속까지 갉아먹히고 있는 퇴계의 처절한 비명이 들리는 듯하다.(윤학준, 『나의 양반문화 탐방기Ⅰ』, 길안사)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건다?㊥에 이어) 주 왕실의 무력이 약화되고 제후에 대한 통제력이 상실되자 주 왕과 제후 간의 정치적 관계도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원래 주 왕실의 종묘 또는 태묘에서 주 왕으로부터 책명策命을 받고 제후로 분봉되면 그 임기는 제후 자신의 일대一代에 국한되었다. 그러므로 제후가 사망하고 아들이 제후위諸侯位를 상속받기 위해서는 다시 종주宗周인 호경鎬京에 출두하여 주 왕으로부터 새로 책명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주 왕실의 무력이 기울고 통제력이 약화되는 반면에 제후들의 국력이 신장되자 새로 즉위한 제후들은 호경으로 출두하지 않고 대신 주 왕이 사신을 보내 책명을 수여, 전달하였다. 이에 따라 주 왕에게 행하던 조근朝覲의 예도 점차로 중단되었는데 이것은 사실상 주 왕과 제후 간의 봉건적 군신관계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주 왕실의 봉건적 구속과 통제를 벗어난 각 제후국은 각국이 처한 환경과 지역적 조건 속에서 다양하게 성장, 발달하고 독자적인 정치・군사적 활동을 전개하여 마침내 열국列國으로 성장하였다.

반면에 주 왕실은 세력이 더욱 약화되고 영토는 줄어들어 완전히 소국으로 전락하였다. 주왕周王은 오로지 천자로서 명맥만 유지하고 매년 거행되는 천天에 대한 제례祭禮에 참석하고 열국에 새로운 군주가 등극하면 이를 인정하는 오직 의례적인 권위와 형식적 절차만 가졌을 뿐 실제 정치・군사적 힘은 완전히 상실하였다.

이와 같이 각국은 춘추중기 이후에는 주 왕실의 무력약화와 병행하여 주권과 영토를 가진 독립국가로 발전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종래의 씨족적 결합과 전통의식을 매개로 형성된 지배씨족이 정치・군사력을 장악하고 주 왕실과 분리되면서 독자적인 정치를 시행하여 갔다.

그리고 자국 중심의 국가이익과 세력신장에 몰두하였으므로 각국 간에는 치열한 대립, 항쟁이 시작되고 무력에 의한 병합이 노골적으로 자행되었는데 당시 패국覇國이었던 제齊, 진晉, 초楚 등은 주변 약소국을 무력으로 병합하여 대국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므로 춘추시대 전쟁 횟수를 보면 1200여회가 넘었고, 춘추초기 100여 국에 달했던 열국의 수효가 춘추말기에는 13개국으로 축소되고 뒤이은 전국시대에는 다시 7개국으로 압축되었는데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열국 간의 약육강식 현상이 얼마나 치열하고 격렬하였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춘추시대 말기와 전국시대에 이르러 농업, 수공업, 상업의 발달과 번영은 필연적으로 당시의 사회 변화를 초래하였다. 바로 상공인 외에 사인士人계층의 출현이다. 당시 자작自作의 소농민계층 형성, 각국 간의 공벌・병합의 와중에서 몰락하였던 귀족들의 평민화, 수공업과 상업의 발달로 인한 부유한 상공인의 출현 등의 사회・경제적 발전과 전환기에 많은 자유민이 출현하였다.

이들 자유민은 농업, 수공업, 상업 등의 생산업에는 종사하지 않고 오로지 학식과 지식을 개인적으로 습득하여 연마하고 이 학식과 지식을 배경으로 관료로 임용되어 출세하려고 하였다. 여기에서 학식과 지식을 소유한 지식인계층이 새로이 형성되었는데 이것이 사인士人계층의 출현이다.

이렇게 하여 춘추전국시대의 사 농 공 상으로 구성된 사민四民사회 형성이 완성된다. (이춘식, 『춘추전국시대의 법치사상과 세勢・세術』, 아카넷)

여기서 지식인 계층, 곧 사인 계층은 각국 군주들의 인재 채용 경쟁 속에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곧 춘추전국시대에는 각국 간의 처절한 약육강식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 와중에서 요구되었던 것은 오직 부국강병이었다. 그러므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각국은 각종의 정치・군사・경제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개혁과정에서 각국의 군주는 유능한 인재이면 혈연, 비혈연을 가리지 않고 다투어 등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맥락에서 계속되는 혼란과 분열을 극복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한 부국강병책을 제시하는 제자백가가 출현했다. 대표적으로 공자의 유가사상, 묵자의 묵가사상, 노자의 도가사상, 한비자의 법가사상을 들 수 있다.

과거제도는 1000여년 뒤 수나라(581~618) 시대에 실시된다. 그러므로 주 왕조가 무너지고 열국이 할거하던 춘추전국시대에는 지식인(士人)들이 새로운 사회계층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고 출세하기 위한 길은 오직 하나였다. 군주가 ‘알아주어’ 관료로서 발탁되는 길뿐이었던 것이다. 하여 각국 군주들에게 나름의 구세관救世觀과 부국강병책을 제시하며 자신을 써주길 바랐다.

군주로서도 인재 등용은 자신과 국가의 생사가 달린 일이었다. 각국 간에 치열한 대립과 항쟁이 시작되고 무력에 의한 병합이 노골적으로 자행되던 시대였다. 부국강병을 이룩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 상황이었다.

개인의 출세욕과 국가 보전, 나아가 세력 신장을 위한 군주의 야심이란 두 방향의 이익이 합치된 결과,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건다’라는 그럴듯한 금언이 유통된 듯하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건다” 라는 말은, 과문한 탓이긴 하지만 『사기열전』의 <자객열전>에서 예양이 한 말 외 중국고전에서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혼란한 시대에는 도덕은 쌀 한 줌만 못하게 되고, 간교한 술수와 배신이 난무하게 된다. 이에 그 시대상에 아랑곳하지 않고 목숨을 바쳐 의리를 지킨 자객들은 분명 어지러운 세상의 귀감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마천은 바로 이 점에 주목한 것이 아닐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