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내는 사람 이야기 (6)『장릉사보』(단종의 사적을 모은 책)로 본 정치인 정조(後篇)
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내는 사람 이야기 (6)『장릉사보』(단종의 사적을 모은 책)로 본 정치인 정조(後篇)
  • 조해훈 조해훈
  • 승인 2017.12.23 22:45
  • 업데이트 2019.08.12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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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내는 사람 이야기 <6>『장릉사보』(단종의 사적을 모은 책)로 본 정치인 정조(後篇)

방호정 생육신 조려의 후손인 조준도가 세운 경북 청송군의 방호정 전경. 정조가 어린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충성을 다짐받기 위해 편찬한 『장릉사보』를 이곳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했다. 사진 = 조해훈

청송 방호정에서 1914년 목판 간행하다

전편에서 설명한 것처럼 정조는 왕권강화와 자신의 사후 어린 세자를 위해 신하들의 절대적인 충절을 강조하고 다잡았다. 그러한 준거자료로 만들어진 것이 『장릉사보』였다. 이 책은 1796년 11월에 9권3책의 필사본으로 만들어졌으나, 정조가 1800년에 서거하는 바람에 목판본으로 간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다 1914년에 경북 청송군 방호정에서 필사본 장릉사보의 수정증보본인 목판본이 간행되었던 것이다. 장릉사보가 제대로 된 책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그러면 방호정이 어떤 곳이기에 정조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며, 정치적으로 활용하였던 장릉사보를 간행하였을까? 방호정은 경북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 신성계곡에 있는 정자로, 학자 조준도(1576~1665년)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모친인 안동 권씨 묘소 아래에 건립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호인 방호(方壺)를 따 정자 이름을 지었으며, 벼랑 위에 터를 잡았다. 방호정이 위치한 곳은 그 아래에 맑은 물이 휘감아 도는 청송지역의 대표적인 절경지이다. 필자가 2년 전 여름에 방호정을 찾았을 때 바로 옆 식당주인이 이 정자를 관리하면서 방문객들에게 대여를 하고 있었다.

본관이 함안인 조준도는 임진왜란 때 형인 조형도 등은 의병으로 나갔으나, 노친을 봉양해야 했기에 함께 나서지 못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고을사람들과 함께 창의하고 사재를 털어 군수물자를 조달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거를 꾀했으나, 다시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만두기도 하는 등 충절의지가 강하였다. 그는 한강 정구·여헌 장현광·우복 정경세·백암 김륵 등 여러 학자에게 종유하였고, 창석 이준·경정 이민성 등 여러 선비들과 도의교를 맺었다.

함안 조씨 가문은 대대로 충효와 절의의 가풍이 있었다. 조준도의 형인 조형도와 형제들, 사촌인 대소헌 조종도·간송 조임도 등은 이런 가풍을 잘 이어받아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일어나 충절을 다한 것이다. 특히 조준도와 조임도 등은 형 조형도를 늘 주위에서 모시면서 보좌하였다. 이들 형제의 5대조인 조려(1420~1489년) 선생은 단종을 위하여 수절한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조려의 할아버지는 고려 공조전서 조열이고, 아버지는 증사복시정 조안이다.

조려는 성균관진사가 되어 당시의 사림 사이에 명망이 높았으나, 단종 1년에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황보인·김종서 등 수십 명을 살해하는 등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인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격분한 나머지 낙향하여 학문에 힘썼다. 단종이 유배지에서 사사 당하자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가 시신을 수렴하였다고 전한다. 조려는 1489년 별세하였으며, 숙종 24년인 1698년 생육신에 추봉되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정조도 재위 5년인 1781년에 조려 선생을 이조판서로 추증하고, 시호를 정절(貞節)로 지어 내렸다. 정조는 숙종와 영조에 이어 단종 사적에 대한 관심을 크게 갖고 정비작업을 이어 이어나갔다.

하지만 정조가 치중한 것은 숙종과 영조와는 달리 단종에게 충절을 지킨 신하들을 포장한다는 원칙을 세워 이와 관련된 신하들을 발굴토록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단종에게 절의를 지킨 조려 선생의 후손들이 정조가 애타게 만든 장릉사보(필사본)을 목판본으로 정식 간행한 것이다. 선생의 후손들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괄의 난 등 때 창의하여 충절을 지켰던 그런 연유 등으로 장릉사보가 방호정에서 간행된 것이었다.

그러면 장릉사보의 체제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장릉사보는 「기년」(紀年), 「배식충신」(配食忠臣), 「사사제신」(死事諸臣), 「양릉숭봉사실」(兩陵崇奉事實), 「제신포증시말」(諸臣褒贈始末), 「잡철」(雜綴), 「열조진장」(列朝辰章), 「제신찬술」(諸臣撰述) 등이 수록되어 있다. 상편은 본기를, 하편은 열전을, 유편은 지(志)를 본뜬 것으로서, 전체적으로 기전체의 형식을 띠고 있다. 방호정에서 간행된 장릉사보는 대개 위와 같은 틀에 추보편이 덧붙여져 있다. 정조 때의 필사원본이 규장각도서에 있으며, 방호정 목판본은 규장각도서와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자료 -권진호, 「방호집」, 『퇴계학』 10, 안동대, 1999. -윤정, 「정조대 단종 사적 정비와 ‘군신분의’의 확립」, 『한국문화』 35, 서울대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05. -허권수, 「동계 조형도의 생애와 그 시대」, 『영남학』 28,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2015.

<고전·인문학자, 교육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