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욱 교수의 '다시 문학청년으로' <3>'멍청이들'의 신문과 잡지
민병욱 교수의 '다시 문학청년으로' <3>'멍청이들'의 신문과 잡지
  • 민병욱 민병욱
  • 승인 2018.01.15 11:19
  • 업데이트 2018.01.1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민병욱 교수의 '다시 문학청년으로' <3>'멍청이들'의 신문과 잡지

부대문학회 부대문학회 회원들. 앞줄 왼쪽부터 조홍, 최춘식, 필자, 한 사람 건너 박치환, 가운데 줄 왼쪽부터 김혜경, 김정열(앉은 사람), 한 사람 건너 설성용, 뒷줄 왼쪽부터 故 김창식, 김영진, 세 사람 건너, 차윤흥, 류종열, 이정주, 박설호. 출처: 민병욱 교수

“나의 문학 수업은 (…) 습작기 텃밭이었던 ‘간선문학’의 산실이자 발표 무대가 바로 여기(부대신문)였다는 사실이 그렇고 (…) 신춘문예 당선과 시인 박지열, 이달희, 오수일 등과 함께 ‘독립가옥’에서 수없이 밝힌 밤들과 ‘황성옛터’가 그렇고 (…)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우리의 재학시절, 선후배를 막론한 우리의 교우관계의 거의 전부는 실로 이 창구(부대신문)를 통하여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여서 … ” - 김창근, 「땀에 젖은 습작의 흔적들」, 부대신문 축쇄판 제4권, 1992.12.5.

“부대신문이 문학상을 제정하고 문인초청 강연회를 주요 사업으로 시행한 것은 곧 학생들의 문예 창작이나 서클 활동 등 정서생활에 많은 비중을 두었음을 뜻한다. (…) 또 선배 기자들도 기사보다 소설 쓰기에 더 열을 올렸거나 다정다감한 성격의 로멘티스트였던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 최화수, 「문학에 심취했던 기자들」, 부대신문 축쇄판 제2권, 1991.11.15.

재학 시절에 대학신문 기자를 했던 시인 김창근과 소설가 최화수의 부대신문에 대한 추억은 후배들에게는 ‘독립가옥’, ‘황성옛터’, ‘로멘티스트’, ‘간선문학’, ‘부대문학상’, ‘문인초청강연회’, ‘문예창작 서클 활동’ 등은 산성막걸리와 함께 전설로 전해진다.

‘독립가옥’의 전설은 김창근, 박지열, 이달희로부터 시작된다. ‘독립가옥’이란 특별한 문학 공간이 아니라 시문학 동인이나 간선문학회 동인들이 모여 막걸리를 마시면서 문학을 논하던 박지열의 자취방이었다.

문청들이 문학을 논하고 삶을 이야기 하는 방은 애꿎은 영어사전 낱장을 찢어서 둘둘 말은 꽁초에서 뿜어대는 자욱한 연기, 찌그러진 주전자나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는 플라스틱 통으로 마시는 산성 막걸리가 늘 함께 하고 뭔가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 혼탁한 분위기가 지배한다. 그 방에는 주인도 손님도 없고 모두가 방주이며, 모든 억압적인 것들로부터 완전한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고 있다. 그 방주들은 문청계의 고수로서 자리를 굳건히 한다.

고수들은 재학 중에 부대문학상과 신춘문예를 석권한다. 김창근은 제3회 수상자로 국어국문학과 4학년 때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을, 박지열은 제6회 수상자로 철학과 3학년 때 197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을, 이달희는 제8회 수상자로 무역학과 4학년 때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을 한다.

그 고수들 가운데 박지열을 만나는 행운은 1978년 4월 무렵에 찾아온다. 무지개 문을 따라 내려온 첫 사거리에서 온천장 방향으로 몇 발자국만 옮기면 허름한 술집이 있다. 카바이드 통을 중심으로 등받이 없는 의자가 몇 개 놓여 있고, 군데군데 썩어서 구멍이 난 나무 벽과 그 사이로 가끔씩 새앙쥐가 눈을 말똥거리며 잽싸게 가로질러 다니는 술집에서 고수는 이정주, 류종열 그리고 나에게 전설을 이야기했다.

전설로 전해지는 고수들의 세계를 찾아서 문청들은 먼저 부대신문이나 교지 『부대문학』과 『효원』, 단과 대학 학보 등으로 입문을 한다.

입문의 세례를 거치면서 문청들은 문학동인회, 시화전이나 시사진전으로 넓혀간다. 그러다가 문청들은 부대문학상과 문리대 문학상을 쟁취하거나 아니면 건너 뛰어 신춘문예나 『현대문학』, 『현대시학』, 『시문학』 등 몇 되지 않는 문학잡지의 추천으로 달음질한다.

고수의 길을 찾아서 떠난 문청들- 1977년 강유정(본명 강선학)은 『현대문학』에서, 1980년 박태일은 중앙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에서, 1980년과 1981년 남송우는 조선일보(신춘문예 평론 입선, 1980)와 중앙일보(신춘문예 평론 당선, 1981)에서, 1982년 구모룡은 조선일보에서, 1982년 이정주는 『현대문학』에서, 1983년 민병욱은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에서, 1984년 정영태는 『시문학』에서, 1986년 이갑재는 『시문학』에서, 1989년 강경주는 『현대시학』에서, 1988년 허의도는 『세계의 문학』에서, 1993년 김경수는 『현대시』에서 첫 발을 내딛는다.

문청의 세계에 대한 나의 입문도 『부대신문』에서 시작된다. 그 신문에 ‘민 욱’이라는 필명으로 시 “號角”(1975년 10월 13일자)을 발표하고 원고료 500원을 받았다. 그 돈은 당시 물가- 버스회수권 25원, 짜장면 150원, 소주 100원, 맥주 300원, 담배 청자 100원, 거북선 200원에서 본다면 점심 도시락을 싸다니지 못하는 나에게 너무나 큰 가치로 다가온 것이었다. 신문사에 가서 원고료를 받으면서 문학평론의 원고료는 200자 원고지 한 장당 100원이란 말을 들었다.

다음해 나는 ‘시에 있어서의 자각과 변화’(1976년 3월 29일자)라는 평론을 발표하고 거금 1200원을 받고는, 부대신문을 비롯하여 교지 『부대문학』, 『효원』, 『사대학예』 등에 평론의 발표에 전념했다.

그렇다고 시의 습작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니다. 부대문학회의 신입생 환영 시화전, 소속 학과에서 하는 시사진전시회(부대신문, 1976.05.24), 부산지역 대학연합시화전(부대신문, 1977.05.02.) 등에 출품하면서 습작을 이어갔다.

대학에서 발간하는 매체와 시화전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문청의 멍청한 4년을 보낸 것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