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욱 교수의 '다시 문학청년으로' <5>유신대학의 역설-한백회

민병욱 교수의 '다시 문학청년으로' <5>유신대학의 역설-한백회

민병욱 승인 2018.01.29 00:00 의견 0

한백회 회원들. 왼쪽 두 번째부터 이상록, 최규수, 민병욱. 출처: 민병욱 교수

부산대학교는 1974년에서부터 1979년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유신대학’으로 불렀다. 그 기간 동안 학내 분위기는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1970년대 말 ○○여대에서 조롱의 뜻으로 가위를 보냈더라는 소문이 1974년 이래 교내 시위가 끊긴 탓에 ‘유신대학’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던 부산대에 떠돌았다. 부산대 학생들은 가위의 수신자를 자처하며 자괴감을 되씹었지만 이는 이 학교만의 일이 아니었다. 의원직에서 제명당한 김영삼의 지역구에 위치한 동아대도, 전직 대통령 경호실장 박종규가 장악한 경남대도 이 소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거시기’를 잘라내고 싶을 정도로 이 지역 대학생들은 자신의 무기력에 자괴감을 느꼈고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동시에 공분의 표출 방식을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이 가위에 관한 소문이었다.” - 김성환, 유신 종말의 단초가 된 부마항쟁 - 1970 박정희부터 선데이서울까지(22), 경향신문, 2014.1.10.

마침내 1979년 10월 16일에서 18일까지 부마민주항쟁을, ‘대학생들의 자괴감이 한순간에 폭발한 것’으로, 주도자들도 ‘유신대학의 불명예를 씻다.’(신재식, 당시 사회복지 복학2년차), ‘유신대학의 오명을 씻고 투쟁에 나서다.’(김하기, 당시 철학과 2학년)라고 스스로 표현한다.

뿐만 아니라 『부마 민주항쟁 증언집』의 ‘부산 편’이나 ‘마산 편’, 그리고 기획으로 다루고 있는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도 ‘항쟁’을 ‘학생들(대략 30%)과 반실업상태의 자유노동자, 도시 룸펜 계층, 접객업소 등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억눌렸던 감정의 순간적 폭발’이라고 한다.

맞다. 폭발이다. 그때 나는 남포동 극장가에 있었다. 누군가가 던진 일회용 라이터에 의해서 경찰 지프차와 버스가 순식간에 폭발하고 시위를 하던 사람들을 따라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대청동 가톨릭 센터 방향으로 달아나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구멍가게에서 소주 한 병을 사서 온 몸에 뿌리고는 거리에 주정뱅이마냥 누웠다. 막힌 골목길에 다다른 전경은 내 몸을 구둣발로 툭툭 치면서 ‘이 새끼는 역사의식이 없어, 술이나 쳐 먹고’ 하면서 되돌아나갔다.

그리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영점 오구구 동인들과 부마항쟁 때의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인 김 개도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 했다.

부마항쟁이 발발한 지 꼭 40년이 되는 올해, 문청시절을 보낸 유신대학을 되돌아보면서 ‘왜 억눌렸던 감정이 폭발했을까?’라고 되묻게 된다. 항쟁 주도자의 한 사람인 신재식이 가위 소문(윤석인 기자, 유신종말의 기폭제 부마항쟁, 한겨레 1988.10.20.)을 퍼뜨렸다면 ‘왜 그랬을까?’라고 되묻게 된다.

부대신문은 그 이유를 증언하고 있다. 대학도서관은 1972년부터 1977년까지 매학기가 시작되면 그 전 학기 도서 대출을 비롯한 도서관 이용 실적을 부대신문에 발표했다. 1974년 1학기를 기준으로 그 이전에는 문학과 어학 분야가 1위를, 그 이후부터는 사회과학 분야가 1위를 한다. 곧 도서관의 발표(부대신문, 1973.04.08., 1974.09.23., 1975.04.07., 1975.09.08., 1976.04.12., 1976.09.06., 1976.11.05., 1977.03.11., 1977.09.12., 1977.10.17.)에 따르면 1974년부터 1977년까지 사회과학 도서의 대출이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 책들은 ‘운동권 책’이거나 ‘의식화 도서’이거나 ‘불온서적’이거나 ‘금서’일 것이다.

오히려 그 책들은 캠퍼스 가로수에 달려 있는 스피커 밑에서 이야기하면 경찰이 다 듣고도 있다고 이야기 할 정도로 위축되었던 문청시절을 해방시켜주는 양서였다.

당시 대학생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낮에는 학생회관 서클 룸에서 카드 게임 마이티를 하거나 도서관에 가거나 밤에는 진주식당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것뿐이었다. 도서관은 학문을 연구하거나 세속을 떠나서 진리를 추구하는 상아탑이 아니라 논밭 팔고 소 팔아서 다니는 우골탑의 대학에서 스스로 탈출시키는 유일한 해방구였는지도 모른다.

해방구에서 사회적 분노와 개인적 좌절을 스스로 억누르면서 만났던 우리들, 김정열(법학, 75학번), 민병욱(국어, 75학번), 박광수(행정, 75학번), 이상록(정외, 74학번), 전형권(사학, 75학번), 정종찬(정외, 75학번), 최규수(국문, 75학번) 등은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를 줄여서 한백회를 만들었다.

경남 마산 진동 앞 바다에서 포즈를 취한 한백회 회원들. 출처: 민병욱 교수

1976년 우리는 친구의 자취방이 도서관 좌측에 있다고 하여 ‘장전 좌파’라고 칭하면서 차가운 방에 모여 뜨거운 토론을 하고는 아무런 해답도 마련하지 못하고 어둠이 깔리면 막걸리 집으로 갔다. 그러다가 고향에서 부쳐 준 돈이 떨어지면 동네 구멍가게에 안면을 잡히고는 막걸리를 외상으로 가져와서는 싸늘한 냉방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대안도 실천도 없는 토론으로 긴긴 날을 보내던 우리에게 작고 그러나 커다란 변화가 왔다. 나와는 서로 다른 학교를 다녔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냈던 설동일과 몇몇 회원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 만남으로 설동일과 이상록은 고난의 길동무가 되었고, 한백회는 다시 한백회로 되돌아갔다.

나도 끝없는 토론의 장에서 빠져 나와 다시 문청의 길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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