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창 교수의 슈마허 톺아보기 에필로그

김해창 교수의 슈마허 톺아보기 에필로그

김 해창 승인 2018.05.30 00:00 | 최종 수정 2018.06.15 11:54 의견 0

『작은 것이 아름답다』와 『당혹한 이들을 위한 안내서』로 대표되는 E.F.슈마허의 저작을 꼼꼼히 읽으면서 매주 해설을 정리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한편 잔잔한 기쁨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덧 이 글을 마무리를 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

E.F.슈마허라는 멋진 인생멘토를 만나 50대 후반 내 삶을 다시 돌아볼 기회가 됐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가? 도대체 경제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슈마허는 공유와 행복을 말하고 있다. 가진 것 자체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한지를 역설했다.

오는 6월 12일 북미정상회담 개최 여부를 놓고 급변하는 뉴스를 접하면서 마음조리면서도 가슴벅찬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특히 지난 5월 26일 남북정상의 전격적인 2차 통일각회담은 남북이 진작 저렇게 만나면 되는 걸 왜 지금까지는 저러지 못했는가 하는 회환과 감격을 동시에 주었다. 지금까지 냉전체제에 익숙한 우리의 삶, 끝없는 군비경쟁, 분열과 적대감, 불안과 분노만 표출하고, 우리가 한겨레라는 사실을 잊고 살았지 않나? 이 세상을 살면서 평화가 무엇인지, 전쟁의 위협이 어떤 것인지를 최근 몇 년간 이처럼 절실하게 느낀 적이 없다.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바로 평화와 생명에 관한 강력한 메시지이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생각해온 경제의 실상이 무엇인지, GDP로 드러내는 경제학의 허구를 지적했다. 경제학이라는 것이 진정 우리 사회문제를 푸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그런 경제, 그런 경제학에선 탈피해야 한다는 슈마허의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과연 우리에게 경제지표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지금 일부 대기업 총수 일가의 갑질로 온 국민이 분노를 사고 있지만 이런 갑질은 우리사회 곳곳에 ‘차별’과 ‘무관심’ 이면에 숨어있다. 나도 상황에 따라 갑질의 피해자이면서도 다른 누구에게는 갑질을 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E.F.슈마허 톺아보기를 통해 그의 삶과 철학을 재조명한 김해창(왼쪽) 교수와 슈마허(출처 : 새로운 경제학을 위한 슈마허센터).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어떤 마인드에서 나온 것일까? 슈마허를 톺아보면서 무엇보다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그동안 우리는 존재가치보다 교환가치, 이용가치에만 너무 익숙했던 것은 아닐까?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자 ‘너와 내가 연결돼 있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열린마음을 가지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인간이 자신과 공동체,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이 위대하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나쁘진 않지만 종교적 또는 철학적으로 신 앞에, 자연 앞에 ‘겸손한 인간’이 돼야 한다.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 최선을 다하되 하늘에 맡기는 마음이 필요하다. 지난해부터 이달 들어서까지 주위 친구 지인 몇 사람이 갑작스레 운명을 달리하는 걸보고 더욱 그런 마음을 갖게 됐다. 이제 인생공부 제대로 해야 겠다고.

슈마허의 가치는 ‘단순소박함’에 있다. 그것은 ‘분수를 아는 것’, ‘안분지족(安分知足)’을 의미한다. 가능한 한 스스로 노동하는 삶을 중시하는 것이다. 자그마한 텃밭이라도 가꾸는 마음, 간디의 물레처럼 지역에서 나는 것을 중시하고, 낡고 오래된 것도 수선해 쓰는 그런 마음가짐을 가질 필요가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처럼 스스로 집을 짓고 자족하는 삶, 그런 자세를 배워야겠다 생각한다.

단순소박함은 관계를 새로 보는 것이기도 하다. 나 자신에서부터 가족 친지 이웃, 그리고 지역사회, 우리나라, 아시아, 지구, 우주적으로 공간 범위를 확대해가면서 그것이 나의 확장이자 하나의 그물망으로 얽혀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본다.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과거 빅뱅에서부터 오늘 현재, 그리고 미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 세대에서 우리 아이들, 미래세대로 줄곧 이어지는 시간의 지속성에 대해서도 이해한다면 현재 주어진 ‘지금, 여기’가 얼마나 소중한 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단순소박함은 또한 우리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새로 설정하는 일이다. 자연은 먹고 먹히고, 돌고 도는 것. 그러한 그물망에 내가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되겠다. 오늘날 우리들이 사는 이 땅이란 우리 선조의 무덤이자 자연의 한 부분 아닌가? 자연에서는 결코 영원히 잘난 존재나 미물이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작은 것도 아름다운 것 아닐까?

5세 때 경북 청도 초가집에서 김해창 교수.

단순소박함을 일하는 방식에 적용해보면 어떻게 될까? ‘다운시프트(Downshift)족이나 ‘슬로비(Slobbie)라는 말이 생각난다. ‘다운시프트’는 자동차 기어를 저속으로 바꾼다 뜻으로 빡빡한 근무시간과 고소득보다는 저소득일지라도 자신의 마음에 맞는 일을 느긋하게 즐기려는 사람의 사고방식이다. ‘슬로비(Slow But Better Working People)’는 천천히 일하지만 더 일을 잘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로 물질보다는 마음을, 출세보다는 자녀나 자원봉사 등을 중시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제는 ’회사인간‘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이제 일상생활의 변화를 꾀해야 할 때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되짚어보고 다짐하면서 작은 것이라도 생활양식으로 행동화하고, 나아가 이러한 가치를 제도화해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우선 가까운 곳은 걸어가고, 필요 없는 것은 가능한 한 버리고, 하루하루 순간순간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그런 마음으로 가족부터, 이웃을 대하는 훈련을 하려고 한다. 다람쥐 쳇바퀴의 삶에서 벗어나기 훈련이다.

경제라고 하는 것도 지금까지 경쟁위주로 가던 것을 이제는 공유로 가고, 공동체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고품질의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 수출만이 능사가 아니다. 지역에서 생산하고 소비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요즘 대기업이 고가의 제품을 만드는 것 이상으로 값싸지만 어려운 사람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빈곤층 비즈니스’도 중요하다. 모든 게 시장구조로만 풀 수 있는 게 아니다. 돈을 넘어서 지역화폐의 새물결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일이 전부가 아니다. 물건을 만드는 게 다가 아니다. 어떤 물건 어떤 서비스가 정말 사회에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적게 일하고 더 행복하기』의 저자인 후지무라 야스유키 비전력공방 대표는 단순히 돈만 벌자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좋은 일을 발굴해 경쟁이 아닌 상생하고 나누며 살자고 제안한다. “한달에 이틀 일하는 ‘3만엔 비즈니스’를 세 가지 하면 월 6일 일하면서 9만엔을 벌 수 있다. 남는 시간은 텃밭을 일구거나, 집을 짓거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더 행복하게 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전기를 쓰지 않고 냉장고나 화장실을 만드는 방법을 보급하는 후지무라 박사는 슈마허와 마찬가지로 ‘적정기술’의 중요성을 실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기술’을 보는 시각도 새롭게 해야 할 것 같다. 슈마허가 40여년 전에 원자력발전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기술맹신론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업에 대해서도 다시 보아야 겠다. 슈마허는 영국 스코트바더사에 경영고문으로 참여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실천했다. 종업원지주제와 종신고용제 또는 사내임금격차 해소 등 오늘날에도 시도하기 어려운 진보적인 경영실험을 실천했고, 성공했다. 지금도 소기업이면서 ‘100년 기업’인 스코트바더사는 기업의 존재 이유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마인드와 생활양식을 마음껏, 지속적으로 펼칠 수 있도록 이를 제도화하는 일이다. 그것은 자유, 평화, 평등, 정의를 사회적으로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 정책을 제대로 펴야 한다. 정책의 핵심은 인센티브(incentive)와 패널티(penalty)이다. 잘 하는 기업이나 개인에게는 이익이 주어지도록 하고, 법을 지키지 않거나 반사회적인 일을 하는 자에게는 규제와 벌을 내려야 한다. 즉 신상필벌이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 그게 원래의 법이고 제도이다.

그런데 그간 우리사회는 벌주어야 할 자에게 상주고, 상주어야 할 사람에게 벌주는 ‘거꾸로 가는 사회’였지 않은가? 그런 사회적 구조가 바로 ‘적폐’이며 ‘적폐청산’을 해야 제대로 된 사회시스템이 가동된다는 말이다.

나는 슈마허를 접하면서 몇 년전부터 ‘대안경제론’을 생각하게 됐다. 자동차와 원자력발전의 편리함 이면에 숨어있는 갖가지 문제점, 그리고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의 환경파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마을주민이나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회적 기업, 마을기업, 협동조합이 지속가능성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사회에 희망을 주는 ‘윤리은행’ ‘사회적 금융’은 불가능한가? 지역재단, 공정무역과 생태관광, 도농상생을 위한 여러 가지 방안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했고 그걸 『저탄소 대안경제론』이란 책으로 정리해보았다.

나는 슈마허를 읽으면서 슈마허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많은 스승을 알게 됐고, 고전의 힘을 믿게 됐다. 슈마허의 사상적 맥과 이어진 소로, 간디, 크로포트킨, 헨리 포드 등의 수많은 ‘시대의 지성인’의 저작도 다시 읽어보아야겠다. 슈마허를 읽으면서 종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젊은 시절 마르크스주의자였다 말년에 가톨릭에 귀의한 슈마허는 미얀마에서 불교를 접하고 그들의 삶 속에서 진정한 불교경제학을 뽑아냈다. 그 뒤 기독교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를 다시 돌아보고 예수의 산상수훈을 경제학에 되살리려는 노력했다. 종교라는 것은 사람마다 달라도 본질은 구원의 힘, 삶의 힘을 어디에서 얻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제 나도 슈마허의 ‘단순소박한 삶’을 살아보고자 마음 속으로 여러 번 다짐한다. 많은 고민을 하고, 조금씩 실천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도시생활에 너무 익숙한 나는 아직도 도시적 삶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얻는 노력보다는 버리는 노력을 더 많이 해야 한다. 익숙한 것과 결별하고 낯선 것과 친구가 돼야 한다. 어렵고, 경우에 따라서는 불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그길로 가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 길이야말로 진정한 삶과 평화의 길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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