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내는 사람 이야기 (12)매월당 김시습㊥

조해훈 승인 2018.07.05 14:32 | 최종 수정 2019.08.12 16:13 의견 0
1. 김시습이 관서‧관동‧호남지역을 유람한 후 경주 금오산(남산)에 안착하여 햇수로 10년간 그 용장사와 부근에 살았다. 사진은 폐사돼 터만 남은 용장사지의 삼층석탑.
김시습이 관서‧관동‧호남지역을 유람한 후 경주 금오산(남산)에 안착하여 햇수로 10년간 용장사와 부근에 살았다. 사진은 폐사돼 터만 남은 용장사지의 삼층석탑. 사진=조해훈

평생 방랑하며 세상을 조롱한 김시습 – 관서‧관동‧호남 유람 후 경주 안착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의 위협을 견디지 못해 그에게 왕위를 물려준 시기가 1455년 윤6월 11일이었다. 오늘날 북한산인 삼각산에 있는 중흥사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김시습은 그 소식을 전해 듣고는 왕도의 정치가 무너지고 패도의 세상이 되었음을 느꼈다. 그가 방랑의 길로 나선 것은 패도, 즉 부조리한 현실 때문이었다.

중흥사에서 나와 떠돌던 그가 발걸음을 한 곳은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잠곡리였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이듬해인 1456년 8월에는 성상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 여섯 신하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이들이 사육신이다. 그 무렵 김시습은 공주 동학사에 있다가 여섯 신하가 체포되었다는 말을 듣고 서울로 달려갔다. 이듬해 6월에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넉 달 뒤인 10월 24일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 이듬해인 1458년 봄에 세조가 동학사에 초혼각을 세워 단종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이 제사에 전 부제학 조상치, 전 참판 이축, 전 정랑 정지산, 전 동지중추부사 송간, 진사 조려 등이 모여 제사를 지냈다. 이때 김시습도 단종 제사에 침여하였다.

동학사에서 단종에게 제를 올리고 난 24세의 김시습은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평양에 들러 대동강을 건너고, 묘향산에 이르렀다. 그의 본격적인 ‘탕유’(?)가 이 관서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차림은 승려의 복색이었다. 김시습은 머리를 깎고 중의 옷을 걸쳤지만 수염만은 그대로 두었다. 그는 그해 가을에 관서 지방을 유람하면서 지은 시를 평양에서 『유관서록』(遊關西錄)으로 엮었다. 그는 그 책의 후지(後志)에서 방랑의 길에 나선 까닭을 설명해놓았다. 그 내용을 간략하면 “불의한 세상을 차마 볼 수 없어 승려의 행각으로 현실계를 벗어나 산수 간을 방랑한다”는 것이다.

2.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인정받고 있는 김시습의 소설집인 『금오신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그가 경주에 있을 때 지었으며, 다섯 편의 단편소설이 들어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인정받고 있는 김시습의 소설집인 『금오신화』. 그가 경주에 있을 때 지었으며, 다섯 편의 단편소설이 들어있다.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그해 겨울 김시습은 개성에 있었다. 송도에서 겨울을 나고, 새해인 1459년 그의 나이 25세였다. 이제 관동으로 다시 방랑길에 오르려고 결심하고, 내금강으로 향하였다. 그의 내금강 유람은 장안사에서 시작하여 표훈사, 만폭동, 원통암, 진불암, 보덕굴, 망고대, 원적암, 국망봉, 송라암 등지를 두루 찾아보고, 가을에 단발령을 넘어 철원으로 나왔다. 철원을 거쳐 경기도로 들어와 겨울을 서울 부근에서 났다.

겨울을 난 김시습은 26세인 1460년(세조 6) 봄에 왕심역, 양평, 여주, 원주를 거쳐 관동으로 들어갔다. 대관령을 넘어 다시 오대산으로 들어가 관동의 명산들을 편력한 그는 그해 9월에 관동을 유람하면서 지은 시들로 『유관동록』을 지었다. 그해 10월 김시습은 이번에는 호서 지역으로 향하였다.

그는 청주를 거쳐 은진에서 서거정과 함께 세조‧성종 연간의 고위 관료였던 노사신을 만나고 익산‧전주‧변산 등지를 지나 가을에 천원역에 이르렀다. 김시습은 이듬해인 1461년 봄을 산역에서 더부살이를 하였다. 병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그해 겨울을 진원현에 있는 인월정사에서 났다. 충청도 청주를 거쳐 호남 지방을 떠도는 여행은 이듬해인 1462년까지 계속 되었다. 영광을 거쳐 송광사를 지나 남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지리산을 넘어 함양, 거창을 거쳐 합천 해인사로 향하였다.

김시습은 호남 지방을 유람하면서 지은 시들을 그해에 바로 엮지 못하고 경주 금오산의 용장사 부근에 거처하던 1463년 가을에 『유호남록』을 엮었다. 그는 호남 지방 여행이 끝나가던 1462년 늦가을에 해인사로 들어갔다. 28세의 해가 저물어가던 무렵 그는 경주로 발걸음을 옮겨 정착할 곳을 찾기로 했던 것이다. 경주 남산인 금오산 중턱에 있는 용장사에서 경실(經室) 하나를 얻어 머물렀다. 그는 용장사 경실에 머물던 1463년, 29세 가을에 호남 지방을 유람하면서 지은 시들을 정리하여 유호남록을 엮었던 것이다.

경주에 정착한 김시습은 경주의 여러 유적을 둘러보며 인간의 역사와 삶의 문제에 대해 사색하였다. 용장사에 거처하면서 차나무를 심는 등 마음의 평정을 찾아나갔다. 유호남록을 엮은 이후 서울로 가 효령대군을 만나 그의 추천으로 간경도감의 『묘법연화경』 언해 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그 일을 마친 후 용장사로 돌아와 생활하다가, 1465년 봄에 금오산실을 지어 생활하였다. 그러다 1465년 4월에 지금의 서울 탑골공원에 원각사가 낙성되어 김시습이 참석하였다. 이 무렵 세조로부터 도첩을 받아 정식 승려로서 신분을 보장받았다.

낙성식 이후 서울에 머물면서 서거정을 찾아가기도 하고 여러 사대부들의 연석에 참여하여 그들의 생활과 예술세계를 접하면서 만족하기도 했지만, 서울 근교에 안주하지 못하고 가을에 경주 남산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후 37세인 1471년에 변신, 출세(?)를 결심하여 서울로 향하기까지 그는 용장사 부근의 금오산실에서 주로 생활하였다. 그는 경주에서 햇수로 10년을 살았다.

김시습은 금오산실에서 생활하는 동안 단편소설집인 『금오신화』를 엮었다. 이 책에는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의 다섯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금오신화에는 김시습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겨 있다도 하며, 책 속의 고독한 인물들은 자신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평을 받는다.

그는 39세인 1473년 봄에 금오산에 은거하면서 서울을 오가거나 경상도와 관동 남부를 오가면서 지은 시들로 서울 수락산 폭천정사에 있으면서 『유금오록』으로 묶었다. 그래서 유관서록, 유관동록, 유호남록, 유금오록을 ‘사유록’(四遊錄)이라고 한다. 이 네 권의 시집에는 그의 전체 시 가운데 1/4 분량에 해당하는 450여 수의 작품이 들어있다.

<시인ㆍ한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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