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3호-문옥영 자선시 풀이】 웃음과 욕망으로 생동하는 시 - 최영호

장소시학 승인 2023.11.12 17:03 | 최종 수정 2023.11.16 11:08 의견 0

풀이

웃음과 욕망으로 생동하는 시   
- 문옥영의 ‘자선 대표시’ 

                                  최 영 호

 

성장은 크는 거라고,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마치 우리가 나무인 것처럼, 높이를 키우면 다 되는 것처럼. 하지만 성장이란 작은 조각들을 모으고 그것들이 그리는 그림을 읽어냄으로써 차츰 완전해지는 과정일 때가 많다. -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

문옥영 시인의 ‘자선 대표시’ 10편은 각각 7년에서 10년 터울로 발표되었다. ‘해적이’를 보면 알겠지만, 시인은 1994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한 뒤 2022년 『가톨릭문학』에 수록한 신작까지 26년간 창작해왔다. 지금까지 발표한 시의 숫자로 작품의 수준이나 완성도를 평가하기란 무모하지만, 26년간 지은 시작詩作 농사치고 추수한 작품의 수는 많지 않다. 

과연 한 편의 시와 다른 한 편의 시 사이에 놓인 시간적 층위를 어떻게 하면 적절히 평가할 수 있을까? 깊이 고심해 볼 문제다. 다만, 그 다층적 의미망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는 작품의 맥락을 통해 확인될 테지만, 치밀한 작품 읽기에 굼뜬 필자로선 딱히 내놓을 묘안은 없다. 따로 믿는 구석은 하나 있으나 그것 역시 많은 분들의 공감을 얻을지 모르겠다. 적어도 그 의미망은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 위에 연대순으로 차곡차곡 쌓이는 지층 구조와는 다르다는 믿음이다. 이런 생뚱맞은 믿음을 혹자는 나이 들면 으레 생기는 꼰대 기질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다른 분야와 달리 문학의 경우 간주체적(inter-subjectivity)으로 축적된 시간적 층위는 작가들마다 현재적 삶에 한꺼번에 분출되거나 순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가. 이는 최근에 쓴 시와 오래전에 발표한 시 사이에는 축약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시간적 층위가 있음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 응축된 그 시간들이 새로운 시가 창작될 때마다 동일한 무게로 작용하거나 차등 없이 적용되기 힘들다는 얘기다. 자신의 대표시를 고르기 위해 지난 26년간 쓴 시를 뒤척였을 문옥영 시인 또한 실감했으리라. 이에 더해 각각의 대표시가 세상에 발표될 때 필자로선 시인이 처한 구체적인 현실을 정확히 알 수 없고,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이 짧은 단평으로 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힌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문옥영의 시에 대한 나의 반응을 해명하는 기회가 아니라 오히려 시에 내재된 시적 진실을 소략하게나마 표현하는 자리이길 바라며, 그 반응을 조금이나마 실감나게 표현하는 기회였으면 한다. 

일반적으로 옷은 사람을 위해 제작된다. 그러나 선사시대라면 모를까 옷은 사람의 몸을 위해서만 제작되지 않는다. 의복의 역사를 조금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옷도 시대마다 달랐다. 계층과 신분을 구분하기 위해서도 만들어지고, 권위와 통치의 수단을 위해서도 제작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최근에는 신체의 주요 부분만 가리도록 디자인된 옷도 넘쳐나며, 심지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벌거벗은 모델을 세워 두고 분무기에 담긴 특수색채를 뿌려 현장에서 곧장 기상천외한 옷을 만드는 첨단과학 옷까지 나왔다. 세계 갑부들은 이런 진풍경을 보려고 야단법석이었다. 이제 옷은 옷 자체에 머물지 않는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roudieu)가 말하듯, 옷은 인간의 무의식적 행위를 상징하는 하나의 사회적 아비투스(habitus)다.

같은 옷도 누가 입고, 언제 어디서 입느냐에 따라 무한 변주된다. 남성복이 기능성과 사회성을 강조하는 데 반해 여성복은 인간의 존재적 욕망을 창출한다. 단지 몸만 가리거나 감싸는 데 치중하지 않는, 여성들의 옷은 자기 몸을 감춤과 동시에 과감히 노출하는, 숨겨진 욕망의 상징적 표현으로 여긴다. 옷에 관한 수많은 특징들은 세상에 차고 넘치는 패션, 철따라 바뀌는 유행, 시대를 앞지른 브랜드라는 명칭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문옥영 시인에게 문단의 문을 열어준 시 중 「바람 부는 날」은 옷과 욕망의 길항관계를 다룬다. 옷은 색상이나 형태뿐 아니라 맵시와 나이로 입는다는 말이 있듯, 이 시의 ‘짧은 플레어스커트’는 시기를 놓치면 여성들조차 입기 힘든 옷이다. 등단 시를 발표할 무렵, 아마 시인도 이 옷을 입은 경험이 있을 법하다. 그 경험을 토대로 시인은 ‘속살’, ‘천의 눈길’, ‘길’과 감추고 싶은 욕망을 한자리에 불러냈다. 그러나 서로 별개로 존재하는 것들이지만 주된 구심점을 이루는 것은 플레어스커트가 아닌 ‘바람’이란 사실에 주목해 봐야 한다. 다시 말해 바람 때문에 앞서 말한 것들이 낯선 결합을 하고, 그 이질적인 조합으로 말미암아 존재 속에 깃든 은밀한 욕망이 노출되기 때문이다.

나의 짧은 플레어스커트는 갈 수가 없어
은밀한 곳까지 들추는 손 때문만은 아니야
속살에 숨어 
펄럭이는 천의 눈길
한 번은 접어 조용히 쉬고 싶은 거야
언제나 나의 중간서 
양다리를 꼬고 
엉거주춤 서 있는 길들 
엉덩이 아래 깊숙이 감춰 두고 싶은 거야 
- 「바람 부는 날」 전문 

 

바람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불지 알 수 없다. 한껏 차려 입은 사람도 난데없이 부는 바람 때문에 옷맵시가 엉클어진다. 아랫단이 넓고 주름 잡혀 엉덩이만 살짝 가린 ‘짧은 플레어스커트’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원래 디자이너의 속셈인지는 모르나 이 옷의 주요 특징은 평소 걸을 때마다 엉덩이 부분이 팔랑팔랑 나부끼게 만들어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매혹시키려는 데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성적 외피도 바람이 불면 확 바뀐다. 걸을 때마다 팔랑거리며 보일 듯 말 듯한 속살을 바람이 들춰버린다. 마를린 먼로가 지하철 환풍구 위에서 부풀어 오르는 치맛자락을 애살스럽게 짓누르는 장면을 연상하면 된다. 그러나 마를린 먼로의 에로틱한 행위가 배우로서 지극히 계산된 행동이자 노골적인 자기 욕망의 표출인데 반해, 작은 바람결에 플레어스커트 자락이 들춰지는 광경은 그와는 성격이 다르다. 옷을 입은 사람이나 보는 사람 모두 피식피식 웃게 할 뿐 더 이상 관심을 확산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당사자다. 당사자로선 이런 상황이 무척 당혹스럽다. 「바람 부는 날」은 이 부분을 놓치지 않는다. 여기엔 시인이 꿈꾸는 욕망이라는 길이 있어서다. 시인 앞엔 가야 할 길이 전제되어 있다. 하지만 예상치 않게 바람이 발목을 잡는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몸은 요지부동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부풀어 오른 스커트 가운데를 꽉 누르고 양다리를 꼬아서 나부끼는 옷자락을 잠재워야 하기 때문이다. 바람 부는 날 짧은 스커트를 앞과 뒤 양손으로 누르며 길을 걸어본 사람이면 익히 알 것이다. 이 광경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를.

이 시의 진짜 눈詩眼은 마지막 두 구절이다. “엉거주춤 서 있는 길들/엉덩이 아래 깊숙이 감춰 두고 싶은 거야” 한껏 뽐내기 위해 입은 옷이 바람에 휘날려 가던 걸음은 멈추지만 자기 앞의 길까지 멈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시인은 자각한다. 이런 판단 하에 시인은 그 길을 지금 당장 그대로 걷기보다 잠시 자기 몸에 새기겠노라 다짐한다. 한 존재가 자기 몸에 ‘길’을 체화体化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언제든 마음이 동動하면 다시 끄집어내겠다는 것이고, 그 길을 다시 갈 수 있다는 잠재적 유보 아닌가. 체화된 길은 곧 욕망의 다른 표현이다. 그러나 그 욕망의 길이 우리로선 ‘어떤 길’인지 이 시만으로는 알기 어렵다.            

세상에 상처받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바느질」은 아픈 상처 서로 기대며 질긴 사랑을 잊지 말자는, 순정파 사랑을 순박하게 적은 시다. 연인 간의 극심한 불화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버리고 떠나라’고 권고하지만 각별한 사랑을 했기에 누가 누구를 버릴 수 없는 처지다. 실은 버리고 헤어진 이후의 삶이 더 쓰리다는 걸 익히 알 정도로, 시쳇말로 ‘미운 정 고운 정’ 다 버무려진 생生을 살고 있다. 헤어져 살자니 사랑하며 살아온 지난날이 눈에 밟힐 정도로 상대방의 삶에 서로 깊이 물든 상태다. 내가 너고, 네가 곧 나인 것이다. 그런즉 잘잘못을 따진다 하더라도 “밖이 보이지 않는 안이 쓰러질 때까지” 절하고 또 절하며 동체적 질서가 회복되길 바란다. 하지만 문제는 이미 다툼과 질타가 너무 오래되어 사랑을 회복하기엔 “만성 소화불량의 몸/너덜너덜 상처투성이 아픈 몸”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인다. 낡은 곳을 바느질해서 새 옷을 만들 듯 몸과 몸을 서로 품어줘야 하는데 머리로는 알아도 실행이 쉽지 않다. 그래서 시인은 온당한 해법이 있는지 묻고 있다.   

버리고 떠나라
사람들은
쉽게 말하지만
버려지고 남겨진 남루의 
그 쓰라림을 어쩌랴
넌, 아니 난
밖이 보이지 않는 안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엎드려 절하길 수만 배
결국
찢어져 슬펐던 마음 불손한 그리움 모두
한 솔기로 통하는 
질긴 사랑이 되어야 하는 걸
지상에 마지막 순정파일지도 모를
너와 나
만성 소화불량의 몸
너덜너덜 상처투성이 아픈 몸
서로 받아 주어야 하는 걸 
- 「바느질」 전문 

 

「바느질」은 우리가 사랑하며 사는 것은 간단하지만 그 사랑에 금이 가는 순간 이후의 삶이 겪는 내면적 풍경을 들춘다. 숱한 감정들은 밖이 아닌 우리의 몸과 마음, 삶 속에서 일어난다. 서로의 만남에서 동일시했던 것과 예기치 않은 것이 한꺼번에 포함되고, 서로의 진정성이 몸과 마음을 거쳐 공유됨으로써 선명하게 자리 잡은 것 같지만 불연속성의 편린들도 병치된 것이 우리의 실제적 삶이다. 진짜 문제는 이렇게 뒤엉킨 심리상태들의 강도를 어떻게 조절하느냐다. 그런 점에서 「바느질」의 문제 제기는 명료하다. 그러나 그 답변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감각과 감정, 열정과 노력과 같은 의식 상태들의 증감만으로 소화불량으로 만연된 사랑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헐어빠진 천을 겹쳐 새 옷을 만드는 ‘바느질’처럼, 평지풍파 다 겪은 사랑도 그렇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지를 시인은 우리에게 함께 고심해보자고 한다.

손 닿지 않는 
깊은 우체통에 
소리 내어 읽고 싶은 
편지가 있다 
한 밤의 편지와 
첫 새벽의 편지가 있다 
비오는 날의 편지 
눈 오는 날의 
편지가 있다
- 「우물」 전문 

 

한편, 「우물」은 마음 속 그리움을 ‘편지’ 형태로 노래한다. 여기서의 그리움은 심적 욕망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절대적인 것이 없는 한, 그리움의 대상이 시시각각 바뀌듯 욕망 또한 변주된다. 한 밤에, 첫 새벽에, 비오는 날과 눈 오는 날에도 변주는 계속된다. 그런데 이 시는 그런 욕망을 자기처럼 받아줄 대상이 없다. 그것을 “손 닿지 않는/깊은 우체통”에 비유한다. 이런 욕망에 답신의 ‘편지’는 도대체 누가 어디서 보낸 것일까? 그것도 묻지 않은 채 허공에 대고 편지를 읽겠다고 소리치는 것은 유아적 발상이다. 하지만 시인의 이런 외침은 시인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소리 내어 읽고 싶은”이란 구절 때문이다. 시인은 자기 욕망에 응해준 편지를 이미 받은 상태지만, 그 편지를 마음껏 읽지 못했다. 이 말은 우리에겐 시도 때도 없이 변주되는 욕망의 밑자리가 있음을 환기시킨다. 문옥영의 시 「우물」은 시인이 특별한 시간과 장소에서 편지를 읽겠다고 외치고 싶은 욕망처럼 우리에겐 ‘우물’처럼 아무리 퍼 올려도 계속해 가득 차오르는 막연한 예감, 더 강하고 큰 진동을 느끼게 하는 심적 욕망이 없지 않다. 눈 쌓인 들판에서 하늘을 향해 죽은 연인의 안부를 소리쳐 묻는, 이와이 슌지의 영화 「러브레터」에서 외치는 ‘오캥끼 데스까(잘 지내죠)’처럼?

짧은 단평이라 대표시 모두 다루지 못한 점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그러나 꼭 짚어봐야 할 부분이 있어 여기에 집중하는 것으로 두서없는 단평을 마무리할까 한다. 문옥영의 대표시에서 발견되는 두드러진 특징은 ‘웃음’이다. 10편 중 등단작 「바람 부는 날」도 그렇지만, 「웃음이라는 상처」, 「레그혼의 일기예보」, 「현수막」 모두 웃음이 지배하는 시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나머지 6편에도 간간이 웃음이 섞였지만, 분량상 대표시 10편 중의 4편이 웃음을 다룬 시라면 그냥 넘길 수 없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웃을 수 있다고 했다. 이유는 인간은 살면서 극심한 고통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고난에 맞서는 필사적인 임시방편으로 인간이 그런 것이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라 했다. 웃음은 남녀노소 누구나 간직한 보편적 감정행위다. 갓 태어날 울음으로 웃던 웃음이 죽을 때까지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고령화 사회가 되자 노인회관마다 ‘웃음치료’가 한창이고, 입담 좋은 여성강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웃음은 노화라는 우리의 보편적 결함과 더불어 인간 삶의 유한성에 대해서도 조금 보상하고 있다. 유명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우디 앨런(Woody Allen)의 조부가 죽음에 맞서 상징적 승리를 거뒀다는 것도 웃음 때문이다. 수다쟁이 우디 앨런의 말을 직접 들어야 제 맛일 텐데, 그의 조부가 임종 순간에 손자인 자신에게 시계를 ‘팔았다’는 얘기다. 죽음까지 막지 못하는 웃음의 행보는 그 자체로 통제 불가능한 것일까? 

고통과 두려움, 그리고 불안을 이기기 위해 웃는 웃음은 어떠할까? 문옥영의 시의 ‘웃음’이지만 이 웃음은 우리를 포복절도하게 만드는 웃음과는 다르다. 웃는다는 행위가 늘 웃을 만한 일은 아니지만, 「웃음이라는 상처」에선 상처 입을 때의 순간적 불쾌함을 뒤집는 데서 유쾌한 웃음이 나온다. 수박, 고등어, 감자, 토마토를 자르려던 칼이 자기 손가락을 잘랐을 때, 시인은 통증으로 울음이 터지는 데 바로 그 순간 상대방이 떠오른다. 어처구니없는 행위는 자신의 부주의한 행동의 결과지만, 이를 지켜보는 상대방의 입장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 상대방이 사람이 아닌 칼, 수박, 고등어, 감자, 토마토이면 어떨까? 시인은 자기처럼 웃을 수 없는 비언어적 사물들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상상한다.         

칼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은 온통
배꼽 빠져 죽을 지경이다  

내 마음이 칼을 꺼내어 
당신의 웃음을 스윽 베어버렸다 

철철 흐르는 웃음이 나를 뜨겁게 만든다

웃음이라는 상처가 삼중바닥에서 
바글바글 끓는다                     
- 「웃음이라는 상처」 부분

 

그런데 정말로 아파서 눈물이 나오고 응당 울음이 터질 거라 여겼는데, 오히려 그 순간 피식 웃음이 튀어나오는 것에 시인 스스로도 놀란다. 생각하니 두 가지 서로 다른 감정이 뒤집어진 것이지만 이를 착각으로 보지 않는다. 눈물과 웃음 모두 시인 자신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통의 눈물은 ‘철철 흐르는 웃음’이 되고, 급기야 반전되어 시인 자신을 ‘뜨겁게 만든다’는 것은 여기서 비롯된다.

문옥영의 시에서 ‘웃음’이 터지는 장면에선 좋으면서도 뭔가 모를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새벽마다 소리치는 레그혼 닭을 소재로 한 경우도 그러하다. 레그혼의 성생활은 자유롭다. 사생활의 비밀도 없이 꼬박꼬박 알을 깐다. 그에 비해 나이 든 시인의 성생활은 레그혼처럼 자유롭지 못하고 ‘더 이상 알을 까지도 않는다.’ 사랑싸움이든 부부싸움이든 웃으면서 묘한 비명을 지르거나 숨을 헐떡이며 혈압까지 높일 정도의 열렬한 사랑의 밤은 지난 지 오래다. 그런 부부의 새벽잠이 레그혼의 외침으로 흔들리지만 완경을 지난 시인의 몸은 달아오르지 않는다.    

기껏 
저들의 목소리를 듣고 이불 속에서 날씨를 짐작한다
저들은 나 들으라고 새벽부터 확성기를 켠다
꺼끼이요! 꺼끼이요! 꺼어어! 거기이요!
왜요? 
크게 외치려다 참는다
속으로 얼마나 벼르다가 내지르는지 
오늘따라 더 쉰 목소리가 몇 번 힘이 가다 끊긴다
강추위가 오려나보다          
- 「레그혼의 일기예보」 부분

 

물리적 나이는 한계가 있다. 아직은 신체적 변화가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가속화된 상태까지 다다른 게 아닌 시인은 레그혼의 외침에서 발작적인 유쾌함(convulsive merriment)을 느끼나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웃음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웃기게 하는가? 레그혼이 알을 깠다는 소리에 맞장구치며 시인도 “크게 외치려다 참는다”고 한 바로 그 대목이다. 이 부분에서 소리의 영역은 붕괴되고 의미의 영역으로 전환된다. 아마도 외부의 자극에 달아오를 몸보다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될 생활 영역, ‘강추위’에 대비해야 할 일들이 먼저 개입되는 탓이다. 

‘웃다가 죽는다’는 말이 있다. 문옥영의 「현수막」은 무엇 때문에 웃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웃고 웃다가 스스로 웃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포복절도하는 시다. “난방유 팔아요!”라고 적힌 현수막 하나가 바람에 휘날리며 촉발하는 웃음 상황을 시화화한 것이다.   

길 건너 주유소 앞
갑자기 불어 닥친 찬바람에
젊은 여자 얼굴이 웃다 일그러졌다 웃는다

난 유 방 팔 아 요

젖소 젖꼭지처럼 늘어난 주유기가 
빵빵 우는 차들에게 젖을 물린다
굶주린 차들 뱃가죽이 빵빵하도록 젖을 빨아대고
젊은 여자는 바람 앞에서
웃다 일그러졌다 멍이 들도록 웃는다

유 방 난 팔 아 요

희고 풍만한 젖가슴을 떠올린다
내게도 사고 팔 무엇이 있던가……
상상을 빵빵하게 부풀리자
후끈 웃음이 터진다 
따끈한 상상 속에 펄럭이는 내 얼굴

난 한 눈 팔 아 요

누군가 뒤에서 또 빵빵거린다  
- 「현수막」 전문 

 

여러 말 할 필요도 없이 읽으면 읽을수록 웃음을 유발하는 시다. 시쳇말로 하는 ‘안 봐도 비디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난방유 팔아요!”라는 문구의 현수막과 젊은 여성, 그리고 바람이 의기투합하며 만들어낸 잠시 잠깐의 순간적 상황에 기댄 시다. 바람에 이리저리 뒤집히는 현수막의 속살은 속절없이 드러난다. 그러자 웃음 자체가 해체되고 현수막이 전하려는 의미는 일시적으로 교란된다. 빨리 가라고 빵빵거리는 뒤차의 경고에도 시인은 차 속에서 속절없이 웃고 가빠지는 호흡을 조절하지 못한 채 웃고 또 웃는다. 야한 상상까지 하며 파한대소 한다. 따로 체계적인 설명이나 논리 정연한 풀이조차 필요 없는 시지만 시적 효과는 희극 상황으로 우리를 몰고 간다. 야한 성적 농담도 야하게 느껴지지 않게 하며 모종의 즐거움을 주는 시다. 음탕한 웃음이라 하기엔 다 안다는 웃음이고, 창피해 하는 웃음이라고 하기엔 다정한 웃음을 유발하는 시다. 

문옥영 시인이 웃음과 성적 욕망이 뒤엉킨 시를 자선 대표시로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 아무리 용을 써도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 이길 수 없는 마당에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할지라도 웃음과 성적 욕망은 우리를 늘 인간적으로 만드는 매우 일반적인 것이고, 희노애락의 과정을 거치며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라는 걸 상기시키고 싶어서인지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웃음과 망각의 책(The Book of Laughter and Forgetting)』을 쓴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가 프랑스 출신 페미니스트 안니 르클레르(Annie Leclerc)의 말을 대신 전했다는 다음 말도 함께 음미해 봤으면 한다.  

반복적으로, 맹렬히 돌진하듯, 고삐가 풀린 듯 터져 나오는 웃음, 장엄한 웃음, 화려하고 미친 듯한 …(줄임)… 관능적인 쾌락의 웃음, 웃음의 관능적인 쾌락, 웃음은 온전히 살아 있음을 뜻한다.  - 밀란 쿤데라, 『웃음과 망각의 책』 부분

 

문옥영의 자선 대표시들은 자기 욕망을 성적 외피와 웃음을 기제機制로 활용한다. 자기 행동 하나하나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적 작용이나 삶의 원리를 스스로 평가하며 우리의 사유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말한다. 크든 작든, 무겁든 가볍든, 그 욕망들은 그것 자체로 독립되어 있지 않고 연민의 본질을 저버리지 않는다. 겸손한 욕망인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열망이다. 비록 물리적 나이에 따라 변주되고 각종 재난에 노출된 욕망이지만 시인은 이를 부정하거나 두렵다거나 고통스럽게 보지 않는다. 게다가 약삭빠른 예견도 하지 않는다. 세월을 비껴갈 수 없는 우리 몸과 성적 욕망, 웃음 속에 스며들 수밖에 없는 각종 연민이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면 우리의 삶과 현실은 물리적 나이에 갇혀 비참함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옥영의 시는 우리의 보이지 않는 심적 상태들이 외부적인 요인들과 전혀 무관하게 생겨나지 않는다고 본다. 

다만, 그것이 신체적 징후로 나타날 때 함께 수반되는 열정이나 욕구, 기쁨과 슬픔에 대해서도 깊이 주목해 볼 것을 권한다. 그럴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웃음과 자기 욕망임도 강조한다. 한마디로 문옥영 시인의 26년 시작詩作 농사의 결실은 웃음과 성적 욕망의 늙지 않는 살아 있음일 것이다. 이런 살아 있음의 편린을 모아 꾸러미로 엮는 일은 또 다른 장을 필요로 한다.

 

최영호 문학평론가

◇ 최영호

| 문학평론가, 해사 명예교수. 『세계의문학』 평론으로 문학사회 나섬.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 자문위원,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
sealiter5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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