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시대11-포구를 찾아서】 터의 무늬를 새기다 포구에서 어항으로 - 기장 구포九浦, 해안 백리길

박정애 시인

시민시대1 승인 2022.11.28 10:30 | 최종 수정 2022.11.30 19:51 의견 0
부산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두호마을 전경 [출처 : 부산역사대전, ⓒ기장군] 

한반도 동남단을 감싼 부산은 남해안과 동해안에 접해있어 해안선을 따라 일찍부터 포구가 발달해 왔다. 어항법에 의해 지정된 부산의 어항으로는 강서구의 대항항, 눌차항과 기장군의 칠암항, 학리항, 동백항, 이동항, 월내항, 신암항, 두호항이 있고, 해운대구의 송정항, 우동항, 청사포항, 남구의 민락항 등이다.

부산 13개의 어항에서 기장군의 아홉 개의 어항은 포구에서 어항으로 발달된 것들인데, 유독 기장군에 어항이 많은 것은 일찍부터 해안을 중심으로 한 포구생활을 꾸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월래포 동백포 무지포 이을포 가을포 공수포 기포 독이포 화사을포 등 구九포가 도시형 반농반어로 살림을 꾸리고 있었던 것이다.

두모포 역시 포구에서 어항으로 발전한 곳으로 옛날에 둠뫼, 두매, 두모라 불리던 두호마을에는 수군만호가 주둔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기장현이 패현이 되고 만호진영을 부산으로 옮기면서 별칭으로 불리던 두호가 마을이름이 된 것이다.

죽성리 일대는 문화유적지가 가장 많이 밀집된 곳이다. 1510년 삼포왜란 때 조성한 조선시대 수군기지였던 두모포진성과 임진왜란 때 쌓은 죽성리 왜성의 본성과 지성이 있는 수군기지였다. 유배 온 고산 윤선도가 지낸 적거지로 알려진 두모포와 황학대, 그리고 어사암과 거북바위가 있다. 그 밖에 죽성리 곰솔과 남산봉수대가 있고, 동해별신굿 풍어제가 열리는 국수당과 영화촬영지 드림세트장이 있다.

부산 갈맷길 칠 백리에서 기장의 해안길만 백리 길이다. 해운대구의 미포와 구덕포, 청사포를 지나 송정[가을포]에서 부터 공수포 동암, 아난티코브, 오랑대, 서암마을, 연화리, 대변항 시랑대 월전, 두모포, 학리 항곶포, 칠암리 칠암포 임랑리 임을랑포, 월래포, 고리 화사을포 까지 갯가 40.7km, 모두가 끝임 없이 아름다움을 방출해내는 살아 숨 쉬는 포구해안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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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대에서 뒤쪽으로 두호마을 언덕에 선 다섯 그루의 소나무는 멀리서 보면 거대한 한 그루 소나무로 보인다. 본래 여섯 그루였었는데 태풍으로 하나가 죽고 남은 다섯 그루가 온전히 한 그루인 것처럼 보인다. 노거수는 각기 다르지만 빼어난 수형을 가지고 있다. 그중 한 그루는 오랜 세월을 지탱해온 자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땅바닥을 기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모양은 하동군 노전리 마을뒷산에 열한 그루 소나무가 각기 다른 형태와 크기로 한데 어울려 마치 한 그루의 큰 나무로 보이는 ‘십일 천송’이 있다. 열한 그루의 소나무가 자연발생적인 전체반구형의 삿갓모양으로 서로 상생하는 모양을 갖췄지만 사실은 햇볕을 받기위한 저들 나름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루에는 나룻배가 없고 포구에는 포구나무가 없다. 포구에는 팽나무, 폭나무, 물포구나무라 불리기도 하는 포구나무가 있었다. 동해안 쪽에선 팽나무보다 검은 소나무로 불리기도 하는 해송이 많다. 고산 윤선도 유거지로 알려진 이곳 죽성리의 다섯 그루의 소나무도 그와 같은 형태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루터기 속에는 작은 서낭당을 품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특별히 신성하게 여기는 곳이다. 실제 이곳은 국가 기원제를 지내는 국수대란 곳이었는데, 국수대는 서해안 어느 곳과 이곳에만 있는 것으로 국가를 위한 기원제를 올리던 곳이다.

국수대는 처음에는 돌무덤을 쌓고 그 위에 여섯 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돌무덤도 사라졌고 나무 한 그루도 사라졌지만 음력 정월 대보름날 풍어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국수당은 하늘에서 신이 땅에 내려올 때 제일 먼저 첫발을 디딘 곳으로 믿었다. 일제강점기 이전, 구한말까지 이곳에서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던 국수대가 어느 때부턴가 마을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고 풍어제를 올리는 장소가 되면서 국수당으로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그 마저도 도시화 현상으로 고령화된 어른들이 사라지고 외부에서 유입된 인가들로 하여 전례의 공동체가 사라져가고 제의형식도 간소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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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는 항일운동가 최상림 목사가 세운 죽성교회가 있다. 최상림 목사는 과거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줄기차게 거부하여 경남도 경찰부 유치장을 49번이나 구금이 되는 고초를 당했다. 최상림 목사는 옥고로 인한 병환으로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옥사하였다.

어사바위가 있는 해안가 언덕에는 드라마 촬영장으로 섰던 교회가 있다. 지금은 각종 전시회가 열리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반면에 마을 안의 오래된 죽성교회는 한산하기만 하다.

바닷가에 일출일몰 때 황금색으로 빛나는 어사암은 형상이 매를 닮았다 하여 일명 ‘매바위’라 불린다. 암행어사 이도재와 기생 월매의 사연을 ‘어사암’이란 글자와 오언절구가 새겨져 있다. 사연인 즉, 기장현 독이방 해창에서 양곡을 싣고 부산포로 가던 배가 두호마을 인근에서 풍랑을 만나 침몰하였다.

때마침 기근이 들어 어려운 시기에 이 곳 주민들이 난파선 볏섬을 건져다 먹었는데, 기장현감이 이를 잡아들여 문초하였다. 민초들에게 내려진 징벌이 어찌나 참혹했던지 조정에까지 알려져 이를 조사하기위해 파견된 암행어사가 이도재였던 것이다. 관기였던 기생 월매가 어사를 모시고 사건의 전말을 주민의 입장에서 해석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인정이 많은 월매의 정을 기려 마을주민들이 바위에다 고마운 마음을 새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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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성천 옆에 있는 원죽마을은 천변에 대나무가 많아 원죽리라 했다. 원래는 염분리로 바닷물을 끌어다 솥에다 끓여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이 있었다. 지금은 시온합섬이 있지만 조선시대 군사요충지로 군사들이 농지를 개간했던 곳이다.

원죽마을은 해안에서 죽성천 남쪽 강변을 따라 전개되는 원죽 1구와 죽성천 북쪽에 있는 원죽 2구로 구분이 된다. 원죽 1리는 반농반어의 마을로 죽성초등학교가 있는 곳이이다.

원죽 2구는 신앙 공동체인 신앙촌이 있는 곳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신앙촌은 오천여 명의 교인들이 모여 외부와 단절된 자급자족의 생활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 마을은 한국천부교전도관유지재단으로 한일물산, 시온식품, 시온합섬, 신앙촌식품, 생명의 물, 두부공장, 가구공장, 우편 취급소, 부설 시온식품과학고등학교가 있다. 이 마을은 주민 전체가 공동체내의 각종 회사에 근무하면서 주거를 함께 한다.

개신교 장로였던 박태선이 세운 반기독교 성향의 신흥종교로 박장로교 전도관으로 불리며 전성기에는 신도 수가 백만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리고 창세기의 선악과가 사실은 복숭아라며 어느 복숭아밭을 통째로 사들여서 몽땅 베어 버렸다는 설도 있다. 평안남도 출신인 박태선 장로가 1955년에 창시한 종교로 1979년까지는 정식 명칭에 기독교 색채가 있었지만, 1980년대부터는 반기독교를 선언하면서 ‘천부교’로 개칭하였다.

통일교와 함께 한국 신흥종교의 양대 산맥을 이루며 세상에 주목을 받았지만 지금은 교주 박태선의 사망으로 세력이 약화되고 교주가 없는 신앙촌은 경제적 제도로 존재감을 알리고 있다. 신천지의 이만희가 박태선을 신봉했고 천부교의 교리 일부를 차용하여 신천지를 세웠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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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죽마을에서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학리의 지명 유래에는 여러 설이 있다. 해안지형이 학과 닮았다는 풍수설에 따라 붙여진 지명이라는 것과 해송이 많아 학의 서식지였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그리고 동쪽 산마루가 잘록하여 예부터 이곳을 황새목이라 불렀던 것인데, 학리의 옛 이름이 항곶이, 항리로 부르다가 학리로 바뀌었다는 설이다.

학리마을은 일광면 동남쪽 해안가 끝에 위치해 남으로는 기장읍 죽성리와 접하고, 서로는 삼성대가 있는 삼성리와 접하며, 그 외 지역은 동해에 면해 있다. 서쪽은 기장 해안가로 지나가며, 북쪽 만 어귀에 학리 등대가 있고 그 안쪽으로 휘어진 곳에 학리가 있다. 학리항에서는 어선 어업과 광어양식장과 붕장어를 잡고 있다. 이곳의 아름다운 경관은 기장 팔경에 들어간다.

해안으로 돌출된 곶[串]은 동남 북쪽 모두가 학리항과 일광 해수욕장이 있는 만입부와 접하고, 남쪽 해안은 죽성천이 동해로 유입하는 죽성항과 접하고 있다. 암석이 발달한 해안선은 전형적인 어촌의 모습이다. 질 좋은 돌미역이 많이 생산되는 곽전藿田이 유명하다.

지금은 미역의 인공양식법이 개발되어 대량생산을 하고 있지만 과거의 자연산 미역은 그 착생지가 한정되어 있었다. 미역 채취장이 제한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연적으로 생산되었던 것이므로 곽전은 토지나 다름없이 그 경제적 가치로 평가되었다. 미역은 해조류 식자제로 대표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히 즐겨 먹는 것이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미역과 다시마의 종묘 생산과 양식에 성공한 곳이기도 하다.

 

박정애 시인

◇ 박정애 시인 : ▷기장 출생 ▷199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199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집 《개운포에서》, 《바다악사》 외 8권. ▷이주홍 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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