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지리산 산책(142) 부산 중앙동에서 9년 만에 회동한 ‘시와 인간’ 동인

12월 26일 오후 1시 화국반점에서 동인 6명 만남
류명선·허철주·이창희·최영철·박병출·조해훈 참석
중앙동 옛 주점 '강나루' 앞 골목서 함께 기념사진

인저리타임 승인 2023.12.30 04:54 의견 0
9년 만에 부산 중구 중앙동 화국반점에서 만난 '시와 인간' 동인들. 왼쪽에서 시계방향으로 박병출 류명선 허철주 조해훈 최학림(부산일보 선임기자) 이창희 최영철. 사진= 조해훈 제공

필자가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시인(詩人)’들은 일반인들과 피가 다른 사람들이다. 모든 분야의 예술가들치고 개성이 없는 이들이 없겠지만, 특히 시인들은 생각이 더 독특하고 뚜렷하다. 얼핏 사유가 고요하게 침잠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내면은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격렬하게 흐른다. 흐르다 못해 화산의 마그마처럼 펄펄 끓는다. 그렇지만 그 피는 순수하고 지성적이다. 그리고 언제나 대상이 무엇이든 ‘그리움’이란 감정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다.

일반인들이 쉽게 인지하지 못하는 시인들의 그런 의식을 잘 보여주는 시인들이 부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시와 인간’ 동인들이다. 이 동인들은 1980년대 초부터 부산을 배경으로 지금까지 시작 활동을 하고 있다. ‘시로’ 동인에서 출발한 류명선을 비롯하여 허철주·이창희·최영철·박병출·조해훈·동길산 등이다.

이들 동인은 세기가 바뀌는 1999년 말에 마지막 통합 동인지를 내곤 스스로 해체해버렸다. 그렇다고 시를 버린 것은 아니다. 이들 시인은 개별적인 시작 활동을 끊임없이 해왔다. 동인들의 연대감 내지는 동질 의식도 여전히 갖고 있다.

'시와 인간' 동인들이 옛 주점 '강나루' 앞 골목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조해훈, 이창희, 최영철, 박병출, 류명선, 허철주 시인. 사진= 최학림 부산일보 선임기자

이런 ‘시와 인간’ 동인들이 9년 만인 2023년 12월 26일 회동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는 동길산 시인만 불참하고 이날 오후 1시 부산 중구 백산길3 소재 화국반점에서 류명선·허철주·이창희·최영철·박병출·조해훈이 만났다.

필자는 화개 목압마을에서 오전 8시에 농어촌버스를 타고 화개터미널로 가 오전 9시 45분에 출발하는 부산행 첫차인 영화여객 시외버스를 탔다. 부산사상터미널에 도착하니 낮 12시 25분이었다. 거기서 15번 버스를 타고 화국반점으로 갔다.

2014년 10월에 주점 '강나루' 앞에서 기념 촬영한 '시와 인간' 동인들. 왼쪽부터 이창희, 박병출, 최영철, 허철주, 류명선, 조해훈 시인. 사진= 조해훈 제공

이날 모임은 최근에 이창희 시인이 시집 『어제 나는 죽었다』(작가마을)를 발간한 걸 축하하기 위해 마련됐다. 시와 인간 동인들이 공식적으로 2014년 10월 26일 낮 12시에 화국반점 옆의 한정식 식당에서 만난 이후 9년 만이다. 그때도 이 멤버 그대로였다.

동인 중 가장 맏형인 류명선 시인은 51년생이니 올해 74세다. 담배를 많이 피우는 골초였는데 담배를 끊었다고 했다. 이전에는 얼굴이 검었는데 담배를 끊어서인지 얼굴이 맑아보였다. 오랜 기간 살던 중구 영주동에서 최근 서면 쪽으로 이사를 했다. 여전히 소주는 마셨다. 그는 “오늘 ‘시와 인간’인지, ‘시와 짐승’인지 오랜만에 보니 반갑고 기분이 좋다. 자주 만나자.”라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는 이전에 동인들과 술을 마시다 헤어질 때 동인들에게 일일이 택시를 태워주고 자신은 정작 차비가 없어 집까지 걸어가곤 했다. 의리가 있고, 특히 후배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컸다.

허철주(73) 시인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고등학교 국어교사를 하던 그는 예전 동인들이 백수일 때 소위 ‘물주’(?)였다. 가난한 동인들이 술을 마시다 술값이 없으면 그를 불렀다. 그럴 때마다 한 번도 거절하거나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지금도 동인들이 허 시인에게 보내는 존경과 신뢰는 변함이 없다. 박병출 시인은 이날 “내가 시내에서 ‘다선방’이라는 전통찻집을 운영할 때 어려워 여러 사람에게 돈을 꾸었다. 그러다 막걸리집으로 바꾸고 나서 돈이 좀 벌려 빌린 돈들을 다 갚아주었다. 그런데 철주 형님은 ‘내가 니한테 돈 받으려고 준 게 아니다.’라며 결코 받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창희 시인의 시집 '나는 죽었다'. 사진= 조해훈

이창희(69) 시인은 울산에서 개척교회 목사로 오랫동안 성직생활을 하다 그만두고 기장군 일광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품이 넉넉하다. 아무리 모난 사람도 다 품어준다. 그렇다고 성직자의 티를 전혀 내지 않는다. 항상 동네 형님 같다. 하지만 누가 봐도 타고난 성직자라는 걸 느낀다. 그래서인지 감히 범인(凡人)들이 생각할 수 없는 깊은 영혼을 지녔다. 동인 누구도 그의 입에서 누굴 탓한다거나 원망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시도 그만큼 깊고 너르다.

최영철(68) 시인은 요즘 몸이 썩 좋은 편이 아니다. 눈이 잘 보이지 않고 젊은 시절 교통사고 탓인지 걸음걸이도 시원찮다. 외손주들 돌본다고 부인 조명숙(66) 소설가와 서울에서 생활하다 지금은 일광에 내려와 이창희 시인과 가까이서 지낸다. 이날도 류명선 시인은 “영철아. 그래도 니가 부산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아이가. 건강해라. 아직 나도 술 잘 먹고 사는데 니가 벌써 몸이 안 좋으면 우짜노!”라고 걱정하는 말을 했다. 박병출 시인도 화국반점에서 “최영철 형은 삶의 95%쯤이 시 쓰는 것인데, 시 못 쓰면 안 되지!”라고 역시 염려를 했다.

부산 중앙동 백산기념관 앞의 한 식당에서 '시와 인간' 동인들이 2차 모임을 하고 있다. 사진= 조해훈 제공

고향이 경남 김해인 박병출(66) 시인은 김해 한림면 쇠골(금곡)에 산다. 야무지고 아주 똑똑하다. 기억력도 뛰어나다. 그는 동인들의 옛 이야기는 물론 언제쯤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모두 기억했다. 그는 “우리 동인들 중 민병태는 우울증이 심했다. 결혼을 시키면 나을까 싶어 류명선 형 사모님이 중매를 서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았지만 결국 행불되었다. 그가 발표한 마지막 시가 「옹알이」였다. 미대를 나와 그림도 그리던 이갑재는 어느 날 빌딩에서 뛰어내렸다. 여하튼 동인들 중 세 명이 행불되거나 이승을 떴다.”라고 말했다.

조해훈(64) 시인은 2017년 봄에 모든 걸 내려놓고 지리산 화개골 운수리 목압마을에 들어와 지역 주민들을 위해 무료서당인 ‘목압서사(木鴨書舍)’를 운영하면서 차(茶) 농사를 짓고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 근대까지 청학동(靑鶴洞)으로 인식되던 불일폭포(佛日瀑布)로 올라가는 초입마을이다. 그의 조부인 조차백(趙且伯·1963년 작고) 어른은 해마다 봄이면 고향인 현 대구시 달성군 논공읍 노이리에서 집안의 일꾼들을 데리고 와 이 인근에 머물면서 차(茶)를 만들어갔다. 그러면서 매일 불일폭포로 올라갔다. 조 시인의 부친인 조길남(趙吉男·1994년 작고) 시인은 아예 목압마을에 들어와 차를 만들어 마시면서 무료 서당을 운영하려고 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산에서 세상을 버렸다.

이날 동인들은 화국반점에서 제법 취기가 오르자 이상개(2022년 작고) 시인의 부인인 목 여사가 운영하던 막걸리집인 ‘강나루’가 문을 닫아 옆에 있는 ‘계림’으로 갔다. 하지만 계림은 시간이 일러 문을 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인근에 있는 다른 식당으로 가 한 잔을 더 한 후 오후 4시 반쯤 자리를 파했다. 동인들은 자주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서로 악수를 하곤 헤어졌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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