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679)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1장 물만골의 농부, 서유럽에 가다⑮

11. 물만골의 농부, 서유럽에 가다⑮

인저리타임 승인 2024.01.09 14:02 의견 0

꾸뻑 인사를 하고는 뒷좌석부터 한 사람 한 사람씩 악수를 하다 열찬씨 차례가 되자

“아펜니노 산맥과 에루투리아인, 로렌초 메디치와 마키아벨리에 대해서 미리 공부하고 아라베스크와 오벨리스크에 대해 질문하는 여행객을 만나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시원소주 정말 감사하고요.”

눈을 들여다보며 한참이나 손을 흔드는데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열심히 하시고 나중 바리톤 박성광부산공연에서 만나도록 합시다.”

“예. 감사합니다.”

버스가 출발하자 손을 흔들어주고 돌아서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이상하네. 친하기는 영감하고 친한데 가슴은 왜 내 가슴이 찡한지...”

영순씨의 말에

“참 재미있는 친구야. 아는 것도 많고.”

최현조씨도 한 마디 거들었다.

이정표의 표시에 제노아와 토리노, 특히 동계올림픽이 열려 주로 설원으로만 보았던 토리노가 지나가고 마침내 한국이라면 울진의 불영계곡 같은 오밀조밀하면서도 사방이 푸른 산길과 계곡을 한참이나 지나는데

“야, 석남재 너머 얼음골 가는 길 같네!”

열찬씨가 탄성을 지르자

“이 양반아, 알프스까지 와서 석남재가 뭐고, 얼음골이 다 뭐요?”

“알프스가 뭐 별건가? 신불산, 가지산이 얼마나 대단하면 영남알프스라고 부를까? 그러니까 영남알프스가 아니라 한국알프스인 거지.”

“고만 하소. 이러다가 또 언양촌놈 본전이 나오겠다.”

“...”

코모라는 국경도시를 지나는데 호숫가에 자리 잡아 물에 뜬 형형색색의 뾰족지붕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조금만 더 지나면 이발소의 사진에서나 보던 멀리 만년설을 인 산봉우리 아래로 넓게 펼쳐진 초원과 호수가의 오두막과 양떼, 요들송을 부르는 목동과 알프스의 소녀가 나타날 것만 같은데

“여러분은 보통 알프스라면 스위스를 연상하시겠지만 사실 유럽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알프스산맥은 지구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히말라야산맥과 더불어 각각 여러 개의 작은 지맥과 수많은 나라를 아우르는 거대산맥이지요. 우리는 이미 오스트리아와 지금 지나가는 이탈이아의 알프스를 보았지만 곧 스위스의 알프스를 직면하게 되고 그 밖에도 프랑스와 독일, 또 슬로베니아라는 아드리아해 연안의 작은 나라에도 알프스가 뻗어 있는 것입니다. 또 알프스산중의 소국 리히텐슈타인까지 합하면 무려 7개국에 걸쳐있는 셈이지요.

또 알프스의 주요 산봉우리를 들자면 우리가 가는 융프라우를 비롯해 몽블랑, 마터호른, 로테로지, 피라미드 빈센트 등 수많은 봉우리가 각기 그 소재한 나라를 대표하는데 호른이 소의 뿔, 피라미드가 삼각뿔이라는 뜻이니 얼마나 높고 험한지를 알 수 있겠지요. 말하자면 가장 잘 알려진 몽블랑은 프랑스를 대표하고 융프라우는 스위스를 대표하는 준봉인데 우리가 바로 그 융프라우로 가는 것이지요.”

이탈리아에서는 가이드라기보다는 축제나 운동 팀의 총무처럼 자잘한 잔심부름이나 하다 본업으로 돌아와 모처럼 마이크를 잡은 영미씨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이제 차창 밖의 분위기는 좁은 골짜기와 호수가 보이던 오밀조밀한 풍경이 아니라 멀리 하얗게 머리에 만년설을 쓴 알프스의 준봉들이 나타나며 시원하게 펼쳐진 초원과 함께 시원한 맛을 풍겼다. 가끔씩 경사가 심한 산언덕에서 흘러내리는 가느다란 물줄기, 어딘가 허술하고 빈약한 폭포줄기가 뉴질랜드 남섬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달랐다. 남섬의 폭포와 산허리와 초원의 풍경이 마치 이제 여드름이 피기 시작하는 소녀나 마흔이 훌쩍 넘어선 중년부인의 어딘가 허전하고 조금은 아쉬운 아름다움이라면 알프스의 풍광은 이제 열여덟이나 아홉쯤의 가장 싱그러운 처녀의 아름다움, 마치 7월의 잘 익은 복숭아 빛과 닮은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인터라켄이라는 조그만 산골마을에 도착했다. 마치 한국의 산악지대인 태백산맥언저리인 경북영양의 현동이나 석포, 태백시의 백산, 삼포같은 마을처럼 한참이나 산 구비를 돌다보면 문득 눈앞에 나타나는 손바닥처럼 조그만 평지를 가로지르는 세 갈래의 하천과 도로, 간혹 기찻길이 있는 조그만 마을, 손으로 셀 정도로 겨우 몇 십 채의 건물 중에 여관이나 식당의 간판을 건 몇 개의 상가건물과 함께 드물게 조그만 전통시장이 있어 간혹 아주 옛날의 화전민과 숯 굽는 사람들이 모이던 전통시장의 풍미를 느낄 수 있는 마을로 융프라우로 출발하는 인터라켄 동역이 있는 곳이라고 했다.

좁은 시가지를 한참 지나 융프라우로 올라가는 기찻길이 보이는 언덕위의 작은 호텔에 짐을 풀었는데 눈앞에 알프스의 넓은 초원과 계곡, 목동과 양떼, 삼각형의 빨간 지붕들이 한껏 알프스의 기분이 났다. 그러나 이발소 그림에서 보던 눈부신 태양이 내려쬐는 싱그러운 초원의 한 가운데에 잔잔하게 고여 있는 새파란 호수가 있고 그 너머로 목장과 언덕이 있고 문득 만년설을 인 높디높은 산봉우리가 있는 그런 풍경은 없었다. 그런데 짐을 풀고 창문을 여는 순간 열찬씨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 했다. 이제 열대여섯이나 되는 소녀가 러시아의 농부가 밀을 벨 때나 쓰는 자루가 긴 낫을 들고 선채로 바닥의 목초를 베어 넘기는데 그 모습 어디에서도 알프스소녀 하이디나 에델바이스의 청순한 분위기를 느낄 수 없는 그냥 풀베기에 열중하는 시골소녀일 뿐이었다. 몸매가 멋지거나 얼굴이 예뻐 보이지도 않는 그녀는 아마도 주로 목장 일에 종사하고 가끔 여행객을 받아 부수입을 올리는 평범한 집안의 딸인지도 몰랐다. 이방인들이 바라는 낭만적 풍경과 목장 집 딸의 현실적 일과(日課)는 아무래도 상충되기 마련인 모양이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인터라켄 동역에서 융프라우행 산악열차를 탔다. 한 칸에 겨우 여남은 명이 탈 수 있는 작은 기차에 타자 모두들 처음 수학여행에 나서는 초등학생처럼 탄성을 질렀고 영순씨, 애순씨의 눈에도 기대와 호기심이 가득했다. 열차가 조금씩 고도를 높이자 지금까지 아래쪽에서 보지 못 했던 숨겨진 골짜기가 속살을 드러내며 새파란 초원과 물줄기의 언덕위로 하얗게 눈이 덮인 산봉우리사이의 가파르고 험한 바위와 빙벽을 드러냈다. 또 철길 옆의 밋밋한 산등성이를 타고 키가 큰 이국의 사내들이 등산스틱 두 개를 양손에 하나씩 쥐고 휘적휘적 걷고 있었는데 그 트레킹 족 중에 키가 작고 오동통한 동양인 몇몇은 아마도 한국인일 것이며 세계의 어떤 관광지나 체험 장에 한국인이 끼지 않는 경우는 결코 없다고 했다.

맞은편에서 내려오는 열차를 보고 손을 흔들며 환호성을 지르던 사람들이 그 대부분이 같은 한국인임을 알고 실소를 금치 못 하며

“이재매, 어데서 왔소?”

“인천이요. 아저씨는 요?”

“부산하고도 연산동이요.”

하며 손을 흔드는데 한참이나 잘 달리던 열차가 문득 산중턱에 멈췄다. 어릴 적 외갓집이 있는 남창에 가기위해 남창역에서 내려 동동거리며 철길을 건너 듯 얼크러진 선로를 건너 조그만 건물에서 다시 표를 끊었다. 비슷해 보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는 산악열차였지만 이젠 급경사의 빙벽을 통과해야하는 만큼 지금껏 느긋한 열차형태가 아닌 엘리베이터나 케이블카 형태로 바뀌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시야가 차단되고 깜깜한 어둠이 엄습하는데 아마도 암벽 속을 통과하는 모양이었다. 이 험준한 암벽을 어떻게 뚫고 철길을 열고 융프라우를 다 정복했을까 싶은데 산악국가인 스위스는 일씩부터 삭도(索道)사업, 즉 케이블카사업을 선도해 시계산업 이상으로 지구상의 거의 모든 산악개발과 암벽굴착, 케이블카사업의 선도적 역할을 한다고 영미씨가 설명하는 순간 문득 환하게 불빛이 들어왔다.

“여기가 그 유명한 융프라우의 얼음궁전입니다. 한 바퀴 비잉 돌며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의 극치인 얼음조각들을 구경하고 통로를 따라 나오시면 곧바로 융프라우의 위용을 최단거리에서 구경할 수가 있는 전망대와 매점, 특히 화장실이 있는 알프스의 지붕 융프라우요흐에 도착합니다. 전망도 즐기고 사진도 찍되 매점에서는 되도록 지갑을 열지말기 바랍니다.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이 우리나라의 컵라면 농심 신라면인데 그 하찮은 라면하나가 생으로는 5유로, 물을 부어 끓이면 3유로를 더 받아 컵라면 하나 먹는데 우리 돈 만 원 이상이 드는 겁입니다.”

영미씨의 말이 끝나자 일행은 싸늘한 얼음벽이 희게 빛나는 얼음동굴을 돌아다니며 각종 보석과, 항아리, 새와 동물을 새긴 조각품을 보며

“아이, 예뻐!”

“베네치아의 크리스털보다도 더 예뻐!”

탄성을 지르는데

“황금, 다이아몬드, 비취, 호박, 크리스털, 아이보리니 뭐니 해도 보석이라면 역시 대한민국 언양 옥산의 자수정(紫水晶)이 으뜸이 아닌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열찬씨를 보며

“아이구, 저 양반은 오나가나 그저 언양타령이야!”

영순씨가 눈을 흘기며 통로를 나오니 순간적으로 엄습하는 햇빛이 눈에 부셔 한참 눈을 비비다 뜨는 순간

“아!”

넷이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젖소의 등처럼 하얗게 펼쳐진 장엄한 산줄기위에 쇠뿔처럼 왼쪽으로 약간 휜 산꼭대기가 바로 알프스의 지붕 융프라우인 것이었다. 높이가 무려 4,158미터나 되어 만약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펼쳐놓는다면 4킬로미터 즉 10리가 훨씬 넘는 융프라우와 묀히, 두 봉우리 사이의 움푹 들어간 곳에 위치한 융프라우요흐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해발 3,454m의 기차역이 있는 곳이라서 ‘유럽의 지붕(Top of Europe)’이라 불리며, 용프라우를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곳, 그러니까 자신들이 서있는 곳이 바로 융프라우요흐인 것이었다.

전망대 옆으로 펼쳐진 평평한 설원에는 더 이상 올라가지 말라는 빨간 깃발이 꽂혀 있고 그 깃발아래서 사람들은 발을 구르며 탄성을 지르거나 사진을 찍는다고 법석을 떨고 있었다. 열찬씨네도 빨간 깃발을 향해 걸어가는데 몇 걸음을 못 가

“아이구, 숨 차!”

벌써부터 두 뺨에 발갛게 홍조를 띠던 영순씨의 입술이 새파래지며 주저앉았다.
“여보, 많이 아파? 혹시 고산병인가?”

열찬씨가 손을 잡고 들여다보는데

“뭐 고산병까지는 아니고 우리집안사람들이 심장이 좀 약해서...”

아직도 숨결이 가쁜 영순씨를 부축해 전망대로 데려와 나란히 난간을 잡고

“융프라우 꼭대기도 좋지만 저게 아래쪽의 만년설이 덮인 골짜기를 좀 보아. 어딘지 한국의 겨울산과 닮지 않았나?”

“와, 또 융프라우까지 와서 신불산 생각나능교?”

“아니 융프라우는 융프라우대로 에레베스트는 에레베스트대로 특징과 멋이 있지만 한국의 산으로서는 신불산을 덮을 것이 없지.”

하는데 한결 숨결이 편해진 영순씨가

“당신은 나 때문에 융프라우꼭대기도 못 밟고. 혼자라도 갔다 오소!”

하는데 저 위의 깃발아래서 최현조씨가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열찬씨와 영순씨가 왜 안 오는지는 모르지만 같이 사진을 찍자는 모양이었다.

“그럼 내 잠깐 갔다 오꾸마. 사진도 찍어주어야 되지만 그래도 맨 꼭대기까지 갔다는 와야지.”

부지런히 올라가 사진을 찍어주고 매점에서 박카스라도 사려고 들어가는데 눈이 새파란 금발의 아가씨와 머리가 라면처럼 돌돌말린 검둥이처녀들이 하나같이 김이 무럭무럭 나는 컵라면, 매울 신(辛)자가 선명한 라면 하나씩을 들고 너무 매워 입을 호호 불며 땀을 뻘뻘 흘리는데

“어!”

가운데의 눈에 익은 검은 머리, 바로 가이드영미씨였다.

“아니, 영미씨!”

“아이구, 또 들켰네. 선생님 한 뚝배기가 아닌 한 젓가락 하실래요?”

“아니.”

“사실 전 융프라우에 와서 컵라면을 먹지 않으면 융프라우는 물론 유럽자체에 오지 않은 것처럼 허전하고 섭섭해요. 그래도 간식이 만원이 넘는 게 너무 비싸다 싶어 서울에서 미리 컵라면을 끓여먹으면 그 맛이 안나 반도 못 먹고 버리지요.”

하며 민망하게 웃더니

“이렇게 한국 상품을 세계 모든 인종들이 먹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자부심도 느껴지고.”

“하긴 한국이 제패를 못 하는 운동종목이나 상품이 어디 흔하나? 여자골프와 양궁은 물론 오리온제과의 초코파이와 믹스커피와 김치, 언젠가 우리의 소주가 온 세계 술꾼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지도 모르고.”

하는데 최현조씨 내외가 들어오며

“아이스크림이나 하나씩 먹을까? 이열치열이라고 만년설 속에서 아이스크림 말이야.”

하고 다섯 개를 사서 전망대의 영순씨와 합류했다.

다시 케이블카와 산악열차를 타고 내려오는데

“당신, 안내팸플릿하고 티켓은 제대로 모으고 있능교?”

“응, 대강.”

“단디 좀 모으소. 나는 기억력이 없어 아무것도 못 외우는데다 당신은 앞으로 글을 써야 되니 말이요.”

“그렇제? 중요한 핵심은 대충 외우고 나머지는 나중 인터넷검색하면 되지.”

“그런가?”

마침내 융프라우여행을 마치고 다시 대륙열차를 타고 바야흐로 유행과 감성, 연애의 도시 파리로 향하게 되었다.

“여러분의 파리입성을 환영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바야흐로 세계 최고의 패션과 유행, 예술과 자유연애를 선도하고 만민평등의 인권과 평화를 쟁취하기 위하여 프랑스대혁명과 레지스탕스를 성공시킨 성스러운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현지가이드 김삼철입니다. 서울토박이로 아르누보라는 사조의 현대미술을 공부하러 이곳에 온지 10년이 넘은 절반의 파리지앵입니다. 지금부터 1박2일 여러분을 파리의 정취에 흠뻑 젖도록 할 것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이 대하소설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