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 칼럼】기게스의 반지(Ring of Gyges)

조송원 승인 2024.01.20 13:03 | 최종 수정 2024.01.20 13:05 의견 0
마법의 반지를 찾는 전설의 기게스를 그린 그림. 페라라, 16세기.

기게스는 양치기로서 리디아 왕을 섬겼다. 하루는 그가 양들에게 풀을 먹이고 있는데, 폭우가 내리고 지진이 일어나, 땅이 갈라졌다. 깜짝 놀랐지만, 갈라진 구멍 속으로 들어가 봤다. 온갖 신기한 광경 가운데 거인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 시체는 금가락지를 끼고 있어서, 그걸 빼가지고 구멍에서 나왔다.

매월 양치기 모임에서 왕에게 양떼들의 현황을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기게스도 그 반지를 끼고 참석했다. 무심코 반지의 구슬을 안쪽으로 돌리니, 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옆의 친구들이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깜짝 놀라 반지의 구슬을 바깥쪽으로 돌리니 자기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반지의 마법을 몇 번이나 시험해 본 결과, 구슬을 안쪽으로 돌리면 자기 모습이 사라지고, 바깥쪽으로 돌리면 다시 나타난다는 조화를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확인한 후, 왕에게 보고 하러 가는 사자(使者)의 한 사람으로서 궁성으로 들어갔다.

궁성에서 기게스는 왕비와 정을 통한 후, 그녀와 공모하여 왕을 죽여 버리고 왕좌에 올랐다. -플라톤/『국가』-

글라우콘(플라톤의 형)이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할 예화(例話)로서, <헤로도투스의 역사서 제1권 8~13>에 나오는 ‘기게스의 반지’ 이야기를 소크라테스에게 들려준 것이다. 이어서 글라우콘의 주장은 계속된다.

이런 마법이 반지가 두 개여서, 하나는 선량한 사람이 끼고 다른 하나는 불량한 사람이 끼었다고 가정하자. 둘의 행동에 차이가 있을까? ‘전혀 없다’고 글라우콘은 주장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발적으로 선량한 사람이 될 수 없으며, 그렇게 강제될 뿐이다.

안전하게 부정을 저지를 수 있는 경우에, 사람은 누구나 불의를 행한다. 왜냐하면 불의가 정의보다 훨씬 더 자기에게 유리하다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의를 저지를 수 있는 자유가 있는 자가, 나쁜 일을 하지 않고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주위 사람들은 그를 바보 천치요 불쌍한 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여러 사람이 듣는 데서는 우직한 그를 칭찬할 테지만 말이다. 겉으로 칭찬하는 이유는, 불의를 저지를 자유를 가진 사람에게 이익을 침해 받을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글라우콘의 주장과 대척점에 선, 곧 ‘정의가 불의보다 삶에서 더 이익’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플라톤이 어떤 논변으로 글라우콘을 설득하는지는, 현재 이 글에서는 시급한 일이 아니므로 뒤로 돌린다.

‘모든 서양 철학의 전통은 플라톤의 주석달기에 불과하다’고 현대 철학자 화이트헤드(1861~1947)는 단언했다. 서구 정신사에서 플라톤의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말이다. 그러나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생활인이 플라톤의 사상에서 무슨 쓸모를 발견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통해, 현실 세계는 ‘가짜 세계’이고 이데아의 세계가 ‘진짜 세계’라는 이분법은 종교적 심성에 호소할 뿐, 실생활에는 아무짝에도 효용이 없다. 그런데도 플라톤이 서구 정신사의 지주가 된 까닭은 무엇인가?

바로 ‘실생활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상국가(Utopia)에 대한 상상력’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플라톤의 탁월한 사유(思惟) 가운데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하다. 16세기 영국의 사상가 토마스 모어는 라틴어 ‘ou’(없다)와 ‘topos’(장소)를 조합해 Utopia란 단어를 만들었는데, 그 뜻은 ‘어디에도 없는 장소’이다. 곧 유토피아는 ‘현실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인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중 하나에서 이상국가란 제목은 없다. ‘국가’ 혹은 ‘정체’(政體)이다. 후세인들이 플라톤의 『국가』와 모어의 『유토피아』를 조합해, ‘이상국가’란 개념을 만들어 내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상상력 범위 내에 드는 일일 것이다.

고전 혹은 위대한 저작을 읽을 때, ‘천재’라는 개념을 배제할 것과 그 저작의 시대적 배경과 그 저작자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고려한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위대한 저작자에게 ‘천재’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저작은 우리와 현실에서 유리(遊離)돼 버린다.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으로 서로 부대끼며 사는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극소수의 천재나 초월적인 신의 처방책은 전혀 무의미했다는 건 우리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서울의 봄’ 군부독재 혹은 권위주의 시대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해내고, 지방자치단체장을 주민들의 직접 선거로 뽑게 되는 험난한 과정에서 천재와 신이 무슨 역할을 했던가! 현 검찰독재와 싸우며 대한민국을 ‘비정상의 정상화’를 추동하는 힘은 민중인가 천재인가?

‘국민주권’이나 ‘자유’에 대한 사상적 씨앗은 있었다. 범인(凡人)보다 조금 더 뛰어난 사람들이 뿌린 그 씨앗의 발아 여부는 민중이라는 밭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씨앗도 한 사람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여건에 따라서 조금씩 발전해왔을 뿐이다.

천재나 성인이란 이름을 붙이는 순간, 더 나쁜 영향은 그들의 주장 혹은 이론이 도그마(dogma.독단적 교조)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하여 비판은 거세되고 사상의 독점 시장이 형성된다. 따라서 시대환경과 여건이 변화하는데도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규준(規準)을 고집하는, 각주구검(刻舟求劍)의 우를 범하는 것이다.

조선조 성리학이 독점적 지배이념으로 교조화한 이유는 공맹과 주희 등을 무오류의 천재, 성인으로 떠받들었기 때문이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봉건체제는 그 누적된 모순으로 사회는 피폐해졌고, 급기야 그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서 민중운동이 일어났다. 사상적 반성으로는 실학이 발흥했다. 당연한 역사의 추이이다. 이 과정에서 천재나 신이 무슨 역할을 했던가!

천재는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삶과는 전혀 무관하다. 에디슨이 말한 ‘1%의 영감과 99%의 노력’의 천재만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흔히 뛰어난 사람을 ‘천재’라고 추켜세워 준다. 선의나 정당한 평가에서일까?

이기심의 발로에서거나, ‘지적 게으름’을 합리화하는 핑계로 삼거나, 노력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자위(自慰 혹은 masturbation)일 뿐이다. ‘그는 천재이니까, 내가 그만큼 못해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사실 문화적으로 나쁜 상황에 처해 있는 뛰어난 개인보다는, 능력은 별로 없지만 좋은 상황에 처해 있는 개인이 <천재>가 될 기회가 더 많다. (…) <천재들>이 많기 때문에 <인간의 일들이 높은 파도를 형성하는 시기(문화적으로 고도의 발달이 이루어지는 시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문화과학』/제8장 천재: 그 원인과 발생-

조송원 작가

위대한 작품을 읽을 때, 그 저작자의 사회경제적 조건과 시대배경을 살핌이 반드시 필요함에 대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에서 보이는 플라톤의 탁월함에 대해서, 그리고 현 대한민국 정치현실에 대해 어떤 교훈이나 함의가 담겨 있는지에 대해서, 다음 글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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