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래 시인이 읽어주는 좋은 시 (27)】 날마다 밤은 굴렁쇠를 굴리고 - 아 은

조승래 승인 2024.02.22 07:00 | 최종 수정 2024.03.06 16:35 의견 0

날마다 밤은 굴렁쇠를 굴리고

아 은

이미 너는 밤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했어 밤, 밤, 밤이 사라졌다고

밤이 있었니?
흰 나무 아래 밤의 흰 그림자가 있었어

선인장 가시에 찔린 손수건의 안부를 묻는 거라면서 우리의 낮은 먼 데 햇빛에 갇혀 졸고 있는 거라면서 밤, 밤, 밤을 이야기했지 긴…밤, 긴…밤 끝 상자에 담겨 어디론가 배달되었을지도 모를 밤

날마다 밤은 굴렁쇠를 굴리고 누군가 꺼내 빨랫줄에 널었을지도 모를 밤이었네
축축한 밤 곧 녹아내릴 눈사람 같은 밤

여름인데?
응 여름인데도

너는 공중식물에 매달려 점점 자라던 밤이 그립다고 했지, 짧은…여름 밤, 밤, 밤, 개어져 바구니에 담긴 밤이 아무렇지 않을 밤이었다고도 했지 너는 어디에 있을까 개미처럼 바닥을 기다가 유리컵 안에 발을 담그고 물고기처럼 살,고,싶,다, 밤은 꼬리가 긴 가오리였다가 장난감을 좋아하는 앵무새가 되기도 했잖아 밤, 밤, 밤이 사라졌다고

너는 말하면서 사라지고
나의 밤은 날마다 굴렁쇠를 굴리고
앵무앵무 우는 너에게 나는
밤이 아직인 거라고,

- 『화요문학』, 2023 vol. 27

밤은 존재하는가, 언제? 밤이 뭔데? 촉촉이 녹는 눈사람 같은 밤이 있다고? 여름인데도? 그렇다고? 짧은 여름 점점 자라는 밤이 그립다고 했지, 마치 사람인 양 우는 앵무새 같은 너는 나의 밤이 날마다 굴렁쇠처럼 굴러가는 거 알아? 그래서 나의 밤은 진행형이야. 밤은 시계태엽 풀리듯이 굴렁쇠 굴리며 날마다 돌고 있는거야.

밤은 시인에게 다정한 마음이고 사랑이다. 생각들로 어둑해지는 밤을 사랑하는 시인은 어느 날 산책하던 중, 갑자기 쓸쓸했다. 슬픔도 아닌 것이 빈곤함에 사로잡혀 마음 둘 곳 찾지 못해 계속 서성거렸고, 불확실한 당신의 시간이 흘렀다. 어쨌든 밤은 또 올 것인데 누구의 밤인지 아직 불확실해도 그 공허함은 걷힐 것임을 믿고 있다.

아 은 시인은 이렇게 밤과 외로움이 함께 굴러감을 본다. 밤은끊임없이 순환하겠지만, 굴렁쇠는 그 어느 그늘에서 차분히 쉴 때도 있을 것이다.

조승래 시인

◇ 조승래 시인 : ▷경남 함안 출생, 2010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 시집: 《칭다오 잔교 위》, 《뼈가 눕다》, 《어느 봄바다 활동서 어류에 대한 보고서》, 《적막이 오는 순서》 외 ▷계간문예 문학상(2020), 조지훈 문학상(2021) 수상 ▷단국대 겸임교수, 한국타이어 상무이사 역임(경영학 박사) ▷한국시인협회, 문학의 집 서울, 한국문인협회 이사, 시향문학회 회장, 가락문학회, 시와시학, 함안문인회 동인으로 활동 중 ▷취미생활로 검도를 하고 있다(4단. 대한검도회 영무검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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