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42)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6장 수남댁, 돈을 들고 튀어라(2)

이득수 승인 2024.05.09 07:00 | 최종 수정 2024.05.10 18:04 의견 0

혀를 끌끌 차던 열찬씨가

“억지로 편해도 편하면 그뿐이라고 다 지 복인 걸 우짜겠노? 그런데 보자아, 그라고 보니 또 가야가 있네? 참 가야는 어데 갔지?”

하는 순간 용우, 순우, 홍근씨의 얼굴이 사색이 되자 백찬씨가

“형님, 가야는 시설인가 어데 보냈으니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말을 돌렸다.

16. 수남댁, 돈을 들고튀어라(2)

할머니산소가 있는 큰 공동묘지에서 큰어머니와 어머니를 보고 다시 차를 타고 한참을 돌아 친구 종석씨 우사(牛舍)너머 큰아버지의 산소를 보고 마지막으로 본부격인 순우네 집앞 아버지의 산소까지 보고 나서

“올해 추석이 버든마을에 찾아가는 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네. 보상 받고 집 뜯기면 다시는 가 볼 수도 없을 텐데.”

하며 백찬씨 가족과 버든의 큰집에 들어가며

“형님, 팔월 잘 싰능교?”

마당을 들어서는데

“대름 오는가 베.”

형수 수남댁의 얼굴이 전에 없이 싸늘했다.

“형님, 기골을 좀 어떵교? 머리는 맑고요?”

“내사 뭐 장 그렇지.”

예나 지금이나 자기의사를 분명히 표현하지 않고 어떤 일에도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 오래 된 습관처럼 그냥 애매하게 넘어가려다 문득

“저거 삼촌들 왔는데 와 술상은 안 내 오노?”

부엌 쪽을 보고 한마디 하는데

“제사도 안 지내는 집에서 술상은 무슨 술상이고? 다 늙은 내가 이적지 동동주나 담고 앉았으란 말이가?”

낮고 약간 들리기는 해도 단정하고 확고한 콧방울처럼 성격이나 말투가 다 똑 부러진 형수수남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죄송합니다.”

퉁퉁한 몸매에 후덕한 표정의 용우댁이 커피 다섯 잔을 끓여 들고 오는데

“아들딸 낳고 사는 저거 조상 제사도 안 모실라는 판에 내가 뭐 이 집구석에 와서 아들을 낳았나, 딸로 낳았나?”

수남댁의 심사가 영 불편한 것 같았다.

“그래 인자 보상받고 집 뜯기면 형님형수는 어데로 갈라카능교?”

열찬씨의 물음에 정찬씨는 말이 없고 수남댁의 얼굴이 새파라동동해지는데

힐끗 아우 백찬씨를 바라보며 용기를 내어

“물론 형님,형수께서 알아서 하겠지만 목돈 만질 때 용우 니가 자리도 못 잡고 마음이 허랑해서 갈피도 못 잡는 찬우도 작은 집이라도 한 칸 마련해서 장개도 보내고.”

형수 작동댁이 죽고 수남댁이 들어왔을 때 겨우 네 살인가 되어 수남댁이 거의 다 키우다시피 한 막내 찬우가 수남댁에게도 마음에 걸릴 것이었다. 그 애는 조용하게 회사를 잘 다니다 문득 어떤 아가씨와 살림을 차리고 살았는데 어느 날 아침 자고 일어나니 문득 또 아가씨가 도망을 가는 바람에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살고 있었다. 만사 의욕이 없고 명절이나 집안행사에 나타나지도 않고 벌써 쉰이 다 되어간다 열찬씨가 챙기자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수남댁의 눈치를 살피는 용우내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공부 잘 해서 서울서 시집 잘 가고 잘 사는 용화는 두고라도 못 배우고 시집도 못 가서 묵고살기 힘든 용자는 이 판에 한 푼이라도 쪼깨 띠 조야 안 되겠나?”

이번엔 2남2녀 중에 제일 순하고 다부지지 못 한 데다 인물이나 몸매도 그냥 두루뭉술한 용자를 들먹였다. 한동안 보이지 않아도 제 아버지 정찬씨를 비롯한 가족들이 그냥 막연히 잘 지내겠지 하고 그 애가 서른이 가까웠을 한 20년 전이었다.

“아재!”

대신동에 있는 서구청문화관광과에 웬 젊은 여자 하나가 나타나 쑥스러워 고개를 못 들고 두리번거리는 지라

“보자아, 이기 누고? 니 용자 아이가?”

하고 열찬씨가 자리에 앉혀 차를 내오게 하니 이번에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며 버든 큰집에 연락을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스무 살이 넘어 객지로 나와 부산의 공장을 전전했다는데 이미 서른이 넘는 지금까지 어디서 무얼 했는지 알 수도 없지만 굳이 물어봤자 골치만 아플 것 같아

“그래 신랑은 뭐 하는 사람이고? 지금 거처는 어데고?”

물어보니 작년에 만난 사람인데 공사장에서 미장을 하는 사람이라 술을 좀 많이 마시지만 사람이 순하고 착해 작년부터 개금에 방을 얻고 같이 사는데 아이가 생긴 것 같아 식을 올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언양에 연락을 하니

“지 알아서 집 나갔으니 지 알아서 시집가라고 해라.”

형수 수남댁이 펄쩍 뛰고 정찬씨 역시 말 한 마디 않고 숨을 죽였다. 그러나 며칠 뒤 제 오빠인 울산의 용우가 내려와 남자를 만나고 결혼날짜를 잡자 열찬씨가 보수동의 청소년시설인 유스호스텔에 식장을 얻어 결혼식을 치렀는데 다행히 정찬씨와 수남댁이 참석해 신부의 혼주노릇을 해주었다.

그러고 나서 딱 한 번 신랑과 함께 열찬씨를 찾아와서 영순씨가 더운밥을 해먹인 일이 있었다. 이제 챙길 사람에 대한 할 말은 다 했다 싶어 비로소 커피를 마시는데

“대름!”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수남댁이

“대름 니가 부산에서 동장도 하고 높은 사람 되었다 카디마는 조선천지 일을 니가 다 처리하나?”

“...”

“내 집 일 내가 처리하지. 대름 니가 와 설치는데 싱겁은 동네 구장도 아이고?”

“...”

“명절에 한 번씩 저거 형님 용돈이나 준다고 이 집이 니 집구석인줄 아나?”

“...”

“이까짓 몇 푼 되도 안 하는 봉투도 다 필요 없다. 씰데 없는 소리 할라카면 다시 오지도 마라!”

명절마다 열찬씨가 정찬씨에게 5만 원씩 넣어주는 용돈봉투를 방바닥에 팽개치는데

“보소! 형수!”

평소 말이라고 없는 백찬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니 수남댁의 기세가 멈칫했다. 처음 시집왔을 때 국민학생 코흘리개였지만 같은 이웃에서 쭈욱 살며 달기 없는 상남댁, 질정 없는 명촌댁의 큰어머니와 어머니 두 시어른에게 뭔가 공손하지 못 하고 제멋대로 대하는 것이 눈에 거슬렸던 백찬씨가 서른 살이 넘은 가장이 되어 진장공동묘지에 어머니명촌댁의 초상을 치르고 뒷정리를 할 때 술을 잔뜩 먹고

“형수는 울엄마 살았을 때 잘 하지 죽고 나서 울기는 말라꼬 우노?”

아직도 밑바닥에 찌꺼기가 남은 국솥을 사정없이 집어 던지며 길길이 뛰며 분을 푼 것이었다. 그 때 숨도 못 쉬고 도망을 간 후로 만날 때마다 만만하지가 않고 거북했는데 이번에도 고함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니 그만 숨이 턱 막힌 모양이었다.

“내가 뭐 그린 말 하나? 대름 지가 무슨 권리로 우리 집 일에 배 놔라, 감 놔라 카노?”

한풀 꺾인 목소리로 더듬거리는데

“무슨 소리? 우리가 어데 넘이요? 그라고 가만있으면 형수가 어데 법대로 할 사람이요?”

“...”

말없는 사람의 말이 더 무서운지 수남댁이 숨을 죽이는데

“형님이 어데 째끄린 말을 했나? 이 판에 불쌍한 찬우, 용자 좀 챙기면 안 되나? 가들은 어데 형님 자식이 아이가?”

하는 순간

“아이구, 내가 미쳤제? 논이 많나, 땟거리가 넉넉하나, 남자 덩치가 크나, 인물이 존나, 네 살짜리 코흘리개부터 네 자식을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삼십 년을 길러 인자 돈 몇 푼 나온다 카이 공은 없고 욕만 남네. 아이구, 서러버라.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파이 할 낀데 그것도 한두 달 정이 드니 저 용맹 없는 인간에 세상물정 모르는 시어마시를 두고 내가 가면 아이 넷이 다 굶어죽을 것 같아서 차마 보따리도 못 산 것이 인지 이 대접을 받는구나. 아이구...”

방바닥에 주저앉아 울먹거리자 용우내외가

“엄마!”

“어머니!”

기겁을 하고 달려가고 정찬씨도

“종제!”

낮은 목소리와 함께 단호한 눈빛으로 열찬씨, 백찬씨형제를 바라보았다. 순간 정찬씨 입에서 종제소리가 나온다는 것은 엄청 많이 화가 난 것이라는 것이 떠오른 열찬씨가

“가자! 우리는.”

하고 일어서며

“형님, 우짜든동 잘 처리하고 건강하십시오.”

하고 일어섰다. 친구들의 걱정처럼 수남댁이 뭔가 일을 꾸미고 세상물정을 좀 아는 열찬씨가 끼어드는 것이 성가시다 못 해 겁을 내는 것 같아 아무래도 무슨 사달이 날 것만 같았다. 마당을 가로 질러 집 앞의 차에 오르다

“민우, 성우는 정석이 형님 차 타거라. 내가 너거 아부지 차 탈란다.”

하고 백찬씨 옆에 앉아

“아무래도 심상치 않지만 용우 지가 알아서 할 일이고 우리는 뭐라 할 일도 없겠다. 그건 그렇고 아까 하다만 가야 이야기 좀 해봐라.”

“아이구, 골치야! 가야이야기를 하라고?”

시동을 걸던 백찬씨가 다시 열쇠를 빼면서

“큰 형님 동수형님 막내딸 가야가 아마 정석이 하고 동갑이니 지도 인자 서른이 넘었을 겁니다.”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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