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43)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6장 수남댁, 돈을 들고 튀어라(3)

이득수 승인 2024.05.10 07:00 의견 0

“아무래도 심상치 않지만 용우 지가 알아서 할 일이고 우리는 뭐라 할 일도 없겠다. 그건 그렇고 아까 하다만 가야 이야기 좀 해봐라.”

“아이구, 골치야! 가야이야기를 하라고?”

시동을 걸던 백찬씨가 다시 열쇠를 빼면서

“큰 형님 동수형님 막내딸 가야가 아마 정석이 하고 동갑이니 지도 인자 서른이 넘었을 겁니다.”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16. 수남댁, 돈을 들고튀어라(3)

사촌형님 동찬씨가 다리를 절고 몸도 약한 데다 어떤 기술이나 사내다운 용기도 없이 그냥저냥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벌써 수십 년째 집을 나가 소식이 없던 동생 정찬씨가 문득 나타나 장가를 가고 살림을 차려 안방을 차지하고 제수씨가 아이를 둘이나 낳은 것이었다. 그 때까지 무위도식하며 동생 집에 얹혀 지내던 동찬씨가 우연한 기회로 언양장터의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로 취직하여 돈을 벌자 귀신처럼 중매가 들어왔다. 상북면 거리동 출신의 덩치는 멀쩡하지만 눈빛과 표정이 어딘가 불안하고 만사에 더듬거리고 덜렁거리는 좀 부족한 여자였다.

저러다 제 형이 평생 몽달이귀신으로 죽을까 봐 걱정하던 상찬씨가 덜렁 결혼을 시켜 언양 소전끌에 셋방을 얻어 살았는데 그 모자라는 여자가 밭은 걸어 연방 한 해 걸러 하나씩 용선이, 철우, 가야라는 1남 2녀를 낳았다.

첫아이 용선이는 덩치나 인물이 다 그럴듯한데 지능이 좀 부족해 말귀를 못 알아들어 국민학교에도 못 보냈지만 다행히 장남 철우는 말수가 좀 적은 것을 빼면 모든 점에서 정상이었다. 그리고 동찬씨가 이미 병이 들어 자리보전을 하고 누웠을 때 이제 돌잡이 슬비를 업은 영순씨와 열찬씨가 소고기를 두 근(斤) 사서 문병을 간적이 있었는데 숨도 옳게 못 쉬는 중환자가 그 와중에 아내의 배를 수북하게 불려놓은 것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셋 중에서 가장 못한 아이, 말을 못 하거나 걸음걸이가 비틀거리는 것은 물론 검고 넓은 얼굴이 한쪽으로 기운 전형적인 저능아로 태어난 것이었다.

문제는 그 아이가 돌이 채 되기도 전에 아비 동찬씨가 죽었고 초상을 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겨우 젖을 뗄 무렵에 희한하게도 그 복(卜)씨 성을 가진 좀 모자라는 아이엄마가 두서면 어딘가로 팔자를 고쳐갔는데 기가 막힌 건 이번에도 노총각에게 간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모에게서 떨어진 아이 셋은 자연스럽게 정찬씨 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집이 좁기도 했지만 진작부터 어둡고 추운 큰 채가 못 마땅하던 수남댁이 상찬씨, 종찬씨의 도움을 받아 능산댁과 경계를 이루는 담 앞에 남향으로 방 두 칸짜리 슬레이트집을 길쭉하게 지어 하나는 새로 들어온 아이 셋을 쓰게 하고 하나는 자신과 정찬씨가 기거했다.

사리분별이 분명하고 칼 같은 성격의 수남댁이 아무 까탈을 부리지 않고 세 아이를 받아들인 것에 대해 마을사람들은 보기보다 속이 넓고 착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집 앞의 조상 답 네 마지기가 있으니 그럭저럭 양식은 되겠지만 어쨌든 상찬씨, 종찬씨, 서울의 귀찬씨가 우려하던 것 보다는 너무나 수월하게 조카들을 받아들여 그 난감한 상황이 쉽게 수습이 된 것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사리판단이나 말하는 것이 좀 모자라기는 해도 덩치가 크고 인물이 훤한 큰 딸 용선이에게 수남의 역시 조금 모자라는 총각집에서 중매가 들어와 스무 살도 채 안 된 것을 시집을 보냈다. 이쪽 사정을 다 아는 형편이라 모든 절차를 다 생략하고 신부의 녹의홍상(綠衣紅裳) 한 벌에 그야말로 찬물 한 그릇 떠 놓고 식을 올리는 작수성례(酌水成禮)를 마치고 바로 택시를 잡아 시집을 보냈다. 피차가 조금 모자라는 부부였지만 시부모의 보살핌으로 그럭저럭 부부생활을 이어가며 아이도 잇달아 둘이나 낳았다.

국민학교에 다니던 장손 철우는 중학교에 갈 생각도 보내줄 생각도 없이 외톨이로 들과 산, 장터를 돌아다니다 조금 더 자라자 인근의 공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답답한 것도 급한 일도 없이 무슨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주 퇴사와 입사를 반복하며 월급을 수남댁에게 갖다 액수도 적고 회수도 일정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한번은 작업 중에 허리를 다쳐 산재로 병원에 입원한 후로는 퇴원을 해서도 다시 일할 생각을 않아 수남댁이 나무라자 전에 없는 행동으로 눈을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튿날 옷가지를 챙겨 방을 얻어 나갔다. 수남댁이 개나 고양이는 길러주면 은덕을 아는데 머리 검은 짐승 사람은 아무리 애를 써 길러도 은공을 모르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정찬씨를 몰아붙이거나 빨래터에서 신세타령을 했지만 그렇다고 나아질 것도 없었다.

병원에서 나이롱환자들과 부대끼면서 못된 것만 배운 건지 아니면 비로소 내 것, 네 것에 대한 분별과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본 것인지 이젠 아예 일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몇 푼 되지도 않은 산재보험금으로 생활한다고 했다. 명색 장손이었지만 설 추석과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제사에도 제 기분에 따라 오기도 하고 말기도 하여 열찬씨와 한 해 한 번 만나기도 힘이 들었다.

그 사이 완전한 저능아인 막내 가야도 무럭무럭 자랐는데 너덧 살이 되어 똥오줌을 가릴 때까지 배운 말이 딱 하나 <엄마>뿐이라 자나 깨나 수남댁에게 “엄마아, 엄마!”를 불러대니 “아이구, 내 팔자야!”를 연발하며 거둘 수밖에 없었다. 말 못하는 짐승이나 어린애도 나름대로 눈치가 있어 절로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간다더니 저능아 가야도 그렇게 수남댁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명절 같은 때 열찬씨나 영순씨가 보면 가끔 “아이구, 내 새끼!”를 연발하며 가야를 끌어안고 엉덩이를 툭툭 치면 가화는 또 “엄마아, 엄마!”를 외치며 수남댁의 뺨을 비비거나 귀를 빠는 것이 여느 부모자식과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자란 가화가 스무 살이 넘어 몸무게가 수남댁의 두 배는 될 정도로 덩치가 커버렸다. 모자라는 사람이 늘 먹는 것만 밝히는 데다 달리 고민할 것도 없으니 자꾸만 살이 찔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덩치가 처녀답게 맵시 있게 균형이 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절구통처럼 두루뭉술한 체격에 안반만한 엉덩이가 씰룩거리고 뒤에서 보면 마치 선풍기처럼 크고 둥근 머리를 돌려 얼굴을 보면 불룩 솟은 이마와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 유독 흰 창이 큰 눈과 약간 비뚤어진 느낌의 입과 전체적으로 검고 울룩불룩한 얼굴이 도무지 처녀의 맛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명절에 그 아이를 보고 돌아올 때마다 열찬씨가 안반처럼 넓은 엉덩이라는 말을 하자 한번은 영순씨가 도대체 안반이 뭐냐고 물어봐 옛날 시골에서 떡을 치던 가로세로가 근 1미터가 되는 넓적한 돌이라고 하자

“아, 내가 처음 시집갔을 때 마당귀퉁이에 놓여있던 엄청나게 넓은 돌, 아마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짤 때 짚을 찧는 돌이라고 했지.”

하고 금방 알아들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스무 살이 좀 넘었을 때였다. 50호가 조금 넘는 버든마을에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 세상물정을 모르기보다는 아예 똥오줌도 못 가린다고 해야 할 아이의 배가 불러온 것이었다. 아무리 깊은 산속의 산중과일도 누군가가 따가듯이 외진 곳에 홀로 자라는 계집애라도 처녀꼴이 나면 반드시 사내가 나타난다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 뜻밖의 사건이었다. 도대체 어떤 사내가 도무지 여성스런 꼴이라곤 조금도 없는 이 괴물 같은 아이를 여자로 보고 아이까지 배게 했는지 참으로 궁금하기가 짝이 없는 일이었다.

처음 아이가 밥을 먹다 자꾸 구역질을 해도 무얼 잘못 먹었나보다 하던 수남댁이 아이의 배가 조금씩 불러오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가야를 살살 꼬드겨 어렵지 않게 범인을 잡아내었다. 그 범인역시 천만 뜻밖의 인물이었다.

열찬씨가 어린 시절 농사를 짓지 않은 겨울철에는 제사를 지내러 큰집에 가려면 집 앞을 나와 좁은 밭 언덕을 따라 접동댁과 옴말댁의 담을 타고 능산댁과 상투영감 집 사이로 빠져나가 큰 집에 이르는 샛길이 있었다.

그 큰집 대문 앞의 조그만 논도가리에 상북면 어디엔가 사는 설씨네가 집을 지어 이사를 왔는데 얼마 되지 않아 할멈이 죽고 환갑이 지난 영감이 혼자 끓여먹고 명절이 되어야 가끔 출가한 아들딸이 찾아왔는데 그 영감이 바로 가야를 집적거린 모양이었다. 간혹 수남댁이 장에 가거나 연당에서 오래 빨래를 하면 아직도 큰 채의 안방에 거처하는 정찬씨는 늘 낮잠에 빠지는 데다 잠귀마저 어두워 밖에 천둥벼락이 쳐도 모르는 지경이라 그 철없는 아이에게 그럭저럭 접근은 하였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가 사내를 받아들이고 그 늙은 사내가 어떻게 수태까지 시켰는지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다.

행적이 들통 난 영감은 어디론가 36계 줄행랑을 치고 진장에서 배밭을 하는 사촌동생이 정찬씨를 찾아와 어찌어찌 수습을 했다. 마을사람들이 무어라고 수군대기는 했지만 정찬씨나 장본인의 사촌이나 달리 방법이 있을 수가 없었다. 몇 푼의 돈을 받았는지 아닌지 마을사람 누구도 알 수는 없었지만 수남댁이 그 철없는 아이를 데리고 울산의 병원으로 가서 아이를 떼고 이어 불임수술까지 시켰다.

그리고는 본토박이들이 자꾸 외지로 나가고 외지사람들이 들어와 가뜩이나 인심도 사나워지는 판에 그대로 두면 풍기가 문란해진다고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야한다는 이장의 의견을 들어 군청을 통해 다시는 찾지 않는 다는 조건으로 어디론가 복지시설로 보내버렸다는 것이었다.

“아아, 그렇구나! 그렇게 우리 핏줄 하나가 또 떨어져나갔구나!”

열찬씨의 뇌리에 서기 2000년 기준 새 족보를 만들 때 동찬씨의 이름 뒤에 <처 복미대자 개가(改嫁)> 라고 적고 그 아래로 용선이, 가야 두 딸의 이름을 적어 넣은 기억이 났지만 그 역시 가문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었다.

언양의 상찬씨집에 들러 인사를 하고 점심을 겸한 술상을 받는데

“우리 정석이 왔네. 아아들은 잘 커제?”

형수 용미엄마가 아직 낳지도 않은 아이의 안부를 묻자

“아, 예에.”

하며 올려다보자

“아이구, 착하고도 똑똑한 우리 정석이!”

하면서 서른이 넘은 건장한 사내를 마치 갓난애 다루듯 손을 잡고 어깨를 토닥이는 것이었다. 버든의 상찬씨에게 시집을 오고 보니 사촌시동생이 국민학교동창생인 일찬씨라 기분이 미묘한 데다 하나는 몸이 아프고 하나는 너무 말이 없이 눈만 번뜩이는 두 시숙과 큰소리를 탕탕 치며 덜렁거리는 시동생 종찬씨가 다 편안하지 않은 판에 비록 사촌이기는 하지만 자기보다 열 살이나 적어 진짜 시동생 맛이 나는 열찬씨가 더없이 살가웠다. 거기다 성격이나 의논도 남편 상찬씨와 잘 맞아 명절 때 만나면 친동생이상으로 챙겼는데 사촌동서 영순씨 역시 잘 따라 주어 명절마다 열찬씨네 몫으로 송편도 더 하고 떡국도 더 빼고 참기름도 짜서 한 병씩 주면서 마치 친동생처럼 챙기다 슬비, 정석이가 태어나자 친자식처럼 귀여워하며 정을 붙이고 용돈도 아낌없이 주는 것이었다. 그런 정석이가 오랜만에 왔으니 반갑기야 여북하랴만 안 낳은 아이가 잘 크느냐고 두 번 세 번 물어보니 방안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거북해 숨을 죽이는데

“큰일이다. 너거 형수 정신이 왔다 갔다 한다. 우째야 될지 모리겠다.”

한숨을 쉬던 상찬씨가

“버든형님네 일은 내나 동생들이나 우째 할 재간이 없다. 우야엄마가 어데 보통사람이가? 형님은 숨만 붙어있지 날 잡아잡수소 하고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형수만 악을 쓸 테니 그저 용우가 알아서 잘 해야 될 건데.”

못내 아쉬운지 입맛을 쩍쩍 다시다가

“그놈의 돈이 무엇인지 버든에 벌써 두 집이 절단이 났다 아이가? 돈만 챙기고 부모를 내팽개치거나 형제간에 원수가 지거나...”

또 한숨을 쉬는데

“와요? 누가 또 그래 시끄럽능교?”

“멀리 갈 것도 없다. 진외가 6촌인 화옥이형님이 그렇고 또 앞새매 주택씨집안도 말이 아니라 카더라.”

“예에?”

“옴말댁 일은 울산동생 니도 들었제?”

“예. 화옥이형님 일도 그 형님 둘째아들 진철이가 내하고 동갑이라서 잘 압니더.”

“그래 나중에 대동댁이야기는 울산동생 니가 부산동생한테 해주고 술이나 한 잔 하면서 옴말댁 이야기나 한번 해 볼까?”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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