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보어-아인슈타인 논쟁 ... (라운드 1) '변형 이중슬릿 사고실험'

세기의 보어-아인슈타인 논쟁 ... <라운드 1> '변형 이중슬릿 사고실험'

조송현 승인 2017.09.12 00:00 | 최종 수정 2022.08.18 09:47 의견 0
토론하는 보어와 아인슈타인. 1925년 12월 스위스 라이덴의 폴 에렌페스트 집. /Wikipedia
토론하는 보어와 아인슈타인. 1925년 12월 스위스 라이덴의 폴 에렌페스트 집. /Wikipedia

우주관 오디세이 - 세기의 보어-아인슈타인 논쟁 라운드 1

닐스 보어는 1927년 9월 이탈리아 코모호수가에서 열린 코모회의에서 코펜하겐 해석을 공식 제안한 데 이어 한 달 뒤 당대 최고의 물리학술대회인 솔베이회의의 제5차 대회에서 코펜하겐 해석을 받아들이도록 물리학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는 물리학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코펜하겐 해석의 논리를 끈질기게 설명하고 납득시켰습니다. 보어는 물리학자들을 붙잡고 ‘한 마디만 하자’며 새벽까지 열변을 토하는 게 보통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양자론의 기초를 다졌던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 등 일부 물리학자들은 양자론을 강력하면서도 끈질기게 비판했습니다. 양자론 공격의 선봉장은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 그는 타계할 때까지 양자론을 부정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양자론의 부정’이라기보다 ‘양자론의 불완정성’을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1905년 광양자 가설을 발표해 양자역학의 태동에 기여한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인슈타인은 그토록 양자역학을 반대했을까요?

그것은 아인슈타인이 양자론의 철학적 의미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양자역학이 내포하고 있는 비결정론(확률해석)과 비실재성 그리고 특수상대성이론의 기본 원리와 상충하는 듯 보이는 비국소성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은 1927년 제5차 솔베이회의와 30년 제6차 솔베이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을 지적하는 사고실험을 제기해 보어를 곤경에 빠뜨리는 듯 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1935년 아인슈타인은 포돌스키, 로젠과 함께 쓴 논문 「물리적 실재에 대한 양자역학적 기술은 완전한가?(Can Quantum Mechanical Description of Physical Reality be Considered Complete?)」란 논문을 권위 있는 물리학 잡지 ‘Physical Review’ 47호에 게재했습니다. 이것이 아인슈타인 팀과 양자론 학자들과의 반세기 동안 논쟁을 야기한 그 유명한 ‘EPR 논증’입니다.

이 논증은 공동발표자인 Einstein과 그의 공동연구자 및 제자인 Boris Podolsky, Nathan Rosen의 이름 첫 글자를 따 EPR 논증이라고 불립니다.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을 공격한 이 논증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양자역학을 확증해주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제부터 세기의 천재인 아인슈타인이 양자론을 놓고 보어와 벌인 50년에 걸친 논쟁을 차례로 알아보겠습니다.

라운드 1 ... 변형 이중슬릿 사고실험을 통한 불확정성 원리 공격

양자역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아인슈타인도 확률파동이 미시세계의 실험결과를 정확하게 설명한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양자역학의 오류를 찾아내는 대신 양자역학은 우주를 설명하는 궁극적인 이론이 될 수 없음을 입증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정말로 궁극적인 이론이 무엇인지는 아인슈타인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양자역학보다 더 심오한 이론이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믿음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몇 년에 걸친 노력 끝에 양자역학의 구조적 결함을 지적하는 매우 정교한 논리를 완성시켰습니다. 직접적인 공격 대상은 불확정성 원리였습니다. 1927년 브뤼셀에서 개최된 제5차 솔베이회의에서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이중슬릿 사고실험(thought-experiment)을 제시하였습니다. 보어는 이 사고실험을 비롯해 아인슈타인과의 논쟁들을 ‘아인슈타인과 토론’이란 제목으로 정리해 1948년 출간한 논문 모음집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철학자-과학자』에 실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공격

아인슈타인은 상보적인 두 물리량을 동시에 관측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들 입자가 이들 물리량을 확정적인 속성으로 갖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보어의 주장을 반박하고자 했습니다.

이를테면 이중슬릿 실험의 경우 간섭무늬를 볼 수 있다면 그 상보적인 양인 입자의 경로를 입자의 속성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보어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그 주장을 근본적으로 뒤엎으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의 목표는 서로 상보적인 두 양을 관찰하는 실험이 가능함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추상적인 방식으로 목표에 접근한 것이 아니라 매우 기발한 사고실험을 고안하였습니다.

스프링이 달린 입구 판을 추가한 변형 이중슬릿 사고실험 개요도. 1927년 아인슈타인이 제기한 문제를 풀기 위해 보어가 그렸다.
스프링이 달린 입구 판을 추가한 변형 이중슬릿 사고실험 개요도. 1927년 아인슈타인이 제기한 문제를 풀기 위해 보어가 그렸다.

아인슈타인은 보통 이중슬릿 실험 장치를 정교하게 변형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입자들의 경로를 결정할 수 있으면서 간섭무늬도 만드는 장치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입구 슬릿이 고정되지 않도록 고안했습니다. 입구 슬릿 판을 나머지 부분에 나사로 조이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든 설계한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단 한 개의 입자가 장치를 통과하도록 제어하면서 개별 입자로 이 실험을 수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한 입자를 보내기 전에 입구 판이 흔들리지 않도록 만듭니다. 이어서 입자를 보내고, 스크린의 어느 위치에 입자가 도착하는지 기록합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입구 판의 슬릿을 통과한 입자가 이중슬릿 판의 다른 두 슬릿을 항상 통과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스크린까지 도달한 입자들만 관찰합니다.

관찰 영역에서 입자가 기록되었다면 그 입자는, 아인슈타인의 견해에 따르면, 두 슬릿 중 하나를 거쳤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입자가 처음에 전체 장치의 기판에 평행하게 들어왔다면 그 입자는 입구 판의 슬릿에서 위로 혹은 아래로 굴절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입자의 운동량은 변해야 하며 입구 판은 충격을 받고 움직여야 합니다.

입자가 위 슬릿을 통과한다면 입구 판은 아래로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첫 번째 입자가 입구 슬릿을 통과하고 스크린에 기록된 후에 입구 판이 위로 움직였는지, 혹은 아래로 움직였는지 관찰합니다. 따라서 이를 통해 우리는 입자가 어느 경로를 택했는지 확실히 할 수 있다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주장입니다.

우리는 입자가 도달한 스크린 상의 위치를 이미 측정하였습니다. 이어서 입구 판을 다시 처음대로 흔들리지 않게 놓고 다른 입자로 실험을 반복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점차 많은 입자들이 스크린에 도달할 것이고,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스크린에는 점차 간섭무늬가 형성될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모든 각각의 입자가 어느 경로를 거쳤는지 말해주는 목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 사고실험을 통해 아인슈타인은 ‘입자의 경로를 파악하면 간섭무늬가 생기지 않고, 입자의 경로를 모르면 간섭무늬가 생긴다’는 불확정성 원리가 오류임을 간단명료하게 논증했다고 자신했습니다.

언뜻 보기에 이 논증은 전적으로 합리적이고 적합해 보입니다. 만일 이 논증이 옳다면 양자역학의 토대인 불확정성 원리는 오류임이 판명되는 것이며, 나아가 그 토대 위에 세워진 양자역학과 코펜하겐해석은 폐기되어야 할 운명에 처해진 것입니다.

보어의 방어

보어는 아인슈타인의 논증을 면밀히 분석한 끝에 결정적인 오류를 발견하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사고실험 장치에서 스프링이 달린 입구 판을 정확히 멈추어 있도록 만들 수 있다고 전제한 바로 그 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양자역학, 구체적으로 불확정성 원리가 불허하는 두 가지 상태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즉, 아인슈타인은 입구 판이 멈추어 있으면서, 즉 속도가 0이면서 동시에 정확히 고정된 위치에 있을 수 있다고 전제한 것입니다. 이는 위치 불확정성과 운동량 불확정성이 동시에 0일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주장하듯이 양자역학에 따르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아인슈타인이 범한, 또한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매우 흔히 범하는 오류는 양자역학의 법칙들이 입구 판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간과한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사고실험의 목표는 입구 판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입자가 위로, 혹은 아래로 굴절되었다는 것을 추론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입구 판이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완전히 정지’ 상태에 있게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입구 판의 흔들림으로부터 입자의 굴절된 방향의 추론은 타당성을 담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실험에서 상보성은 어떤 역할을 할까요? 실험자가 입구 판의 위치를 잘 확정하면 그 판의 운동량 불확정성은 커집니다. 이 경우, 우리는 간섭무늬를 얻지만 개별 입자가 어느 경로를 택했는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입구 판의 운동량 불확정성을 충분히 작게 설정하여 모든 개별 입자들의 경로를 파악할 수 있게 하면 입구 판의 위치 불확정성이 커집니다. 판의 위치 불확정성이 커졌다는 것은 개별 입자가 장치에 들어오는 위치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흥미롭게도 보어는 아인슈타인이 불확정성을 공격한 이 사고실험에서 상보성 원리가 정확하게 성립한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입자가 택하는 경로를 우리가 정확히 알면 간섭무늬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우리가 선명한 간섭무늬를 얻으면, 입자의 경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보어의 논증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어는 아인슈타인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내며 이 논쟁에서 확실히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을 확신하고 있던 아인슈타인은 완전히 승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차전 패배가 확실해진 그 순간부터 2차 전투를 준비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논증을 더욱 개량하여 더 복잡하고 정교한 사고실험 고안에 착수하였습니다.

# 더 읽기 : 세기의 보어-아인슈타인 논쟁 ... '상자 안의 시계' 사고실험
<'우주관 오디세이' 저자·인저리타임 편집위원장>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