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지리산 산책 <1>묘봉치 눈꽃

조해훈 시인의 지리산 산책 <1>묘봉치 눈꽃

조해훈 승인 2018.01.20 00:00 의견 0

지리산 묘봉치에서 전남 구례군 산동면 온천지구 쪽으로 본 전경. 사진: 조해훈

어제 눈이 많이 내렸다. 필자가 사는 목압마을 어르신은 “화개골에 눈이 이만큼 많이 온 것은 6, 7년 만이다”고 말씀하셨다. 마을의 벗들과 눈꽃을 보러 가기로 했다. 모두 다섯 명이었다. 목압마을회관 옆쪽에 살고 있는 이기송 ‘비박 아침을 여는 사람들’ 동호회 대장이 가이드를 했다.

행선지는 지리산 서북능선 중 하나인 묘봉치였다. 구례 산동면 온천지구에서 조금 더 들어가 산수유로 유명한 상위마을에서 바로 묘봉치를 향해 치고 오르기로 했다. 마을이 끝나고 산자락으로 접어드는 척박한 계곡 가에 산수유나무가 촘촘하게 심겨 있었다. 발이 눈에 푹푹 빠졌다. 돌길이 미끄러워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이처럼 눈이 많이 쌓인 산길을 걷는 게 얼마만인가? 예전에 백두대간 산행을 할 때, 그리고 국제신문 근교산 산행담당 기자 시절 가끔 눈 쌓인 산을 취재하기도 했다. 벗들을 앞세우고 맨 뒤에서 천천히 걸었다. 눈 덮인 산길을 걷고, 눈꽃만 보는 게 다가 아니었다. 나의 무딘 감성으로 이 아름다운 풍광을 가능하면 모두 다 느끼고 싶었다. 꼭 누구에게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 내 마음 속에 담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내 기억의 창고에 저장해 혼자서 두고두고 꺼내보고 싶어서였다. 오르막길이 구불구불해 구절양장은 저리가라다. 그러다보니 한참을 헉헉대며 올라왔는데, 표지판을 보니 겨우 500m 올랐을 정도이다. 고로쇠나무가 계곡 높은 곳까지 즐비하다. 얼마 안 있으면 고로쇠 물 받는다고 사람들은 바빠진다. 곳곳에 검정색 호스가 쭈욱 연결되어 있다. 나무에 도끼로 찍어 깡통이나 비닐봉지를 설치해 고로쇠 물을 받던 이전과는 달리 요즘은 이처럼 호스를 통해 집에서 받는다. 그러다보니 물맛이 예전에 비해 떨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산행기점인 마을에서 묘봉치까지는 3km다. 반 정도 오르니 나무 가지에 눈이 뭉텅뭉텅 쌓인 게 보이지만 그다지 예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냥 가지마다 눈을 툭툭 던져 놓은 것 같다. 갈수록 가파르다. 산 아래에서는 나지 않던 온갖 잡념들이 떠오른다. 산꾼들은 산행을 하면서 여러 생각들을 정리한다고 했다. 나무에 얹힌 눈이 흩날리는 건지, 눈이 내리는지 가끔씩 눈발이 바람에 흩어진다. 드디어 능선이 가파르게 보인다. 정상의 나무들이 삐쭉하게 늘어선 흰 머리카락처럼 허옇다. 직벽으로 보인다. 그 순간 좌우가 눈꽃밭으로 변했다. 나뭇가지에, 산죽잎에 어쩌면 이리도 아름답게 눈이 꽃으로 필 수 있을까. 나무들의 어깨가 저리도 황홀하게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저것들의 신비로움이 내 속으로 다 들어오는 느낌을 받는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한발 한 발 내디딜수록 더 황홀경이다. 그동안 서럽다고 여기던 필자의 생애가 드디어 빛을 발하는 것 같다.

거센 바람을 피해 묘봉치 정상 부근 길목에 퍼질러 앉아 간식을 먹는다. 사진: 조해훈

산은 마지막이 더 오르기 힘들다고 했다. 느릿느릿 오르기는 했지만 호흡은 가빴다. 먼저 올라간 벗들이 정상 부근에서 간식거리를 펼쳐놓고 있다. 막상 정상은 능선이어서 눈꽃을 볼 수 없다. 저 아래 산동 온천지구가 내려다보인다. 묘봉치에 정상 표지석은 없지만 해발 1,000m는 넘을 것 같다. 여기서 만복대까지는 2.2km, 성삼재까지는 3.1km이다. 만복대(1,438m)는 서북능선 가운데 최고봉이다.

정상아래 벗들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마치 눈밭을 뒹굴고 있는 듯하다. 다들 얼굴이 벌겋다. 오랜만에 슬픔이 아닌 즐거움을 맛본다. 묘봉치에서

아, 내가 여기 오도록 산들이 얼마나 기다렸을까 속상함 그리움을 밤낮으로 주고받았을 게다 지리산에 들어온 지 근 일 년 만에 찾았으니 저 시리도록 파란 하늘빛에게 미안하다 내 몸이 물에 젖었던 것인가 좀처럼 수면 위로 오르지 못할 만큼 난들 어쩌지 못할 만큼 무거웠으니 그래도 역시 지리산은 어머니의 산 몸 푼 산모의 웃음으로 나를 맞아주고 밤새 내린 눈으로 꽃밭을 만들어주었으니 내가 어찌 이 꽃들을 무심코 만질 수 있으랴 이제는 아름다운 것 몸 언어로도 말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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