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65 가을의 노래 - 깨가 쏟아지다

이득수 승인 2021.09.25 16:57 | 최종 수정 2021.09.25 17:19 의견 0
명촌별서의 참깨 타작

작년에 날씨가 좋아 참깨농사를 지은 등말리할매 몇이 톡톡하게 재매를 보자 우리집 못 말리는 두 욕심쟁이 아내와 누님이 덩달아 참깨농사에 도전했습니다.

그러나 무슨 봄 날씨가 그리 경망스러운지 비에 녹고 볕에 말라 절반쯤 죽고 뿌리를 찍어 넘기는 대두충이라는 벌레가지 설쳐 겨우 살아남은 놈들이 제가 무슨 참깨나무나 된 듯이 사람 키보다도 더 자라더니 마침내 두 번이나 밀어닥친 태풍에 큰 대(大)자로 뻗어버리고...

그 참깨농사의 가장 고비는 언제 쯤 깨를 베느냐의 문제입니다. 너무 일찍 베면 수확량이 적고 조금이라도 늦으면 씨방속의 씨앗이 주르르 흘러버리기 때문에 빈 쭉정이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동종업자이자 최측근인 이웃의 셋째누님에게 물어보니

“아직 깜깜 멀었다.”

했지만 아무리 동생이지만 무엇 하나 절대로 질 수 없다는 귀여운 심술할미의 말을 다 믿을 수가 없어 아내가 슬며시 살펴보니 누님은 벌써 며칠 전에 베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베어야하나 마나 고심하는데 문득 나타나

“이적지 깨도 안 비고 뭐 하노? 저래 세워놓고 새도 주고 태풍도 주고 농사 피농할 거가?”

시침을 뚝 떼며 화를 내어 우리내외가 황급히 베는데 이미 깨알이 땅에 줄줄 흐르는 데다 비바람이 몰아쳐 마당에 널어보지도 못 하고 비닐하우스에 세웠지만 근 일주일 가을장마가 닥쳐 밑에 깔린 놈은 뜨기도 하고 썩기도 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처럼 장마가 끝난 날 황급히 볕에 말렸지만 오후에 또 비가 질금거려 갑바를 덮었다 열었다 이틀을 꼬빡 고생한 끝에 참깨를 터너 한 너덧 되가 나왔습니다. 값으로 치면 겨우 7만, 8만 원이나 될까 말까한데 모종 값에 벌레 잡는 농약 값을 들이며 봄부터 그렇게 굿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에 절대로 못 믿을 것이 참기름이라 하는데 우리 내외와 아들, 딸에 장모님까지 열한 식구가 진짜배기 참기름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어디입니까? 또 부산과 서울의 두 사돈도 맛을 볼 수가 있고.

소전의 소장수는 삼촌이나 장인도 속이고 참기름집에서는 친정엄마의 깨에도 무언가 섞어 모녀간도 서로 믿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답니다. 그래서 자기 참기름이 진짜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진짜배기 순100% 국산 참기름>으로 이름만 점점 길어져도 그 질을 믿을 수 없는 시대에 말입니다.

그 참깨농사의 가장 큰 재미는 그야말로 <깨가 쏟아지는> 깨 타작의 재미입니다. 한 손으로 깨를 세우고 한손에 든 방망이로 내려치면 좔좔좔좔 쏟아지는 참깨의 소낙비, 오죽하면 그걸 신혼재미에 비교했을까요? 가난하고 고된 농사꾼들에게 참깨농사는 최고의 재미이자 삶의 쉼표(,)가 되었을 것입니다.

저 같이 세상사에 두루 관심이 많고 별별 취미에 다 빠져본 사람도 재미하나는 참깨타작만 한 것이 없었습니다. 좔좔좔 깨가 쏟아지는 모습과 소리에 고소한 참기름에 밥을 비벼먹을 기대감, 그러니까 시각과, 청각과 미각을 다 자극하는 것이지요.

비싼 돈 들여 해외여행이니 골프를 즐기면서도 늘 지겹고 심심한 분들, 또 살아도, 살아도 너무나 팍팍한 삶에 지쳐 늘 우울한 분들도 저처럼 참깨를 한번 틀어보시면 반 분(憤)이 풀리며 속이 시원해질 것도 같습니다. ㅎㅎㅎ...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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