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66 가을의 노래 - 무화과에 빠지다

이득수 승인 2021.09.25 17:05 | 최종 수정 2021.09.25 17:11 의견 0
무화과
무화과

추석 전날 한참 음식준비를 하던 아내가 무엇이 빠졌는지 황급히 언양장에(명절안날은 2, 7 5일장과 관계없이 장을 여는 데 그걸 <작은 장(場)>이라고 함.) 갔다 와

“당신 좋아하는 메밀묵 사왔어. 점심 잡수소.”

해서 마주 앉는데

“아, 저 무화과 익은 것 좀 봐!”

하며 창밖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무화과를 무척 좋아하지만 나무아래나 풀 섶에 가면 모기로 부터 집중포화를 맞아 갈 수가 없으니 따다 달라는 이야기라 얼른 나가서 열 개도 넘게 양푼에 가득 따오자

“난 밥 안 먹고 무화과 먹을래.”

하고 밥그릇을 밀어내고 무화과를 까기 하더니

“아이구, 이 개미 좀 봐!”

연애하던 시절처럼 어리광을 부려 다디단 과즙에 달라붙은 새까만 개미를 일일이 잡아주니

“고마워. 당신은 메밀묵하고 잡수소.”

하며 너무나 신이 났습니다.

우리 어릴 적 언양지방에는 무화과 자체가 없었고 어른이 되어 무화과를 알게 되었지만 열매나 나뭇잎에서 손에 쩍쩍 들어붙은 진액이 나오는 것도 그렇고 특별한 맛도 없어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아내가 하도 좋아해 시골로 이사 오면서 뒤쪽 울타리에 몇 그루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무화과는 추위에 약해 겨울을 넘기며 거의 다 얼어 죽고 뿌리부분만 살아남아 봄에 다시 움이 터 한참 자라다 또 얼어 죽기를 반복하던 나무에서 무려 5년 만에 처음 결실을 본 것입니다.

무화과 점심으로 기분이 좋아진 아내가 그중 잘 익은 놈 하나를 남겨 메밀묵을 먹고 난 제게 후식으로 주었습니다. 달달 뜨는 목소리 김지애의 노래에 무화과그늘에 앉아 지난날을 생각하며 운운 <몰래한 사랑>이 있는데 오늘 44년차 우리부부에게 꽃도 없는 열매 무화과가 <다 늙은 사랑>이 피어난 멋진 추석선물이 되었습니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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