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자 이성희의 미술 이야기 : 꿈 - (1)꿈꾸는 자

이성희 승인 2020.12.09 11:00 | 최종 수정 2020.12.09 11:33 의견 0

‘고망’이라는 나라가 있다. 그곳은 해와 달이 비추지 않는 곳이라 밤과 낮의 구별이 없었다. 사람들은 잠을 자다가 50일에 한 번씩 깨어났다. 그들은 꿈속의 일을 사실로 여기고 깨어나서 본 것들은 허망한 것으로 여겼다. ‘중앙’이라는 나라는 밤과 낮이 교차하여 구별이 뚜렷했다. 사람들은 한 번은 깨었다 한 번은 잠을 자는데, 깨어서 행동한 것은 사실이고, 꿈속에서 본 것을 허망한 것으로 여겼다. ‘부락’이라는 나라는 늘 해와 달이 비추어 사람들이 잠을 자지 않고 항상 깨어 있었다. 신기로운 판타지를 보여주는 『열자』 「주목왕」 편의 이야기다.

당신은 어느 나라에 사는가? 무엇이 허망하고 무엇이 사실인가? 잠깐,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 어떤 판단이든 지금 당신의 판단이 속단이 아닐 가능성은 수십억 분의 일이다. 빌어먹을, 테슬러의 CEO, 아이언맨 엘론 머스크가 말하지 않던가, “우리 세계가 시뮬레이션이 아닐 확률은 수십억 분의 일이다”고. 옛 인도인들은 우리의 세계가 비슈누 신의 꿈이라고 믿었다. 우주의 우유바다에 떠 있는 거대한 뱀의 배 위에서 비슈누 신은 꿈을 꾼다. 비슈누 신이 눈을 뜨는 순간 우리는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우리들의 세상도 그리고 우리들의 꿈도…

(그림1) 장 레옹 제롬 「내시의 꿈」
장 레옹 제롬 「내시의 꿈」

꽤 맞을 확률이 높은 것 중의 하나는 우리 대부분이 꿈꾸는 자들이란 사실이다. 보르헤스의 소설 『원형의 폐허들』에서는 한 꿈꾸는 자가 나온다. 늪지 속의 폐허가 된 신전에 어느 날 한 사나이가 대나무 배를 타고 온다. 그가 하는 유일한 일은 신전에서 잠을 자고 꿈을 꾸는 것이었다. 그는 꿈을 통해서 살과 피를 가진 살아 있는 자식을 낳고 싶어 한다. 셰익스피어의 메아리가 어디선가 들려오지 않는가? “우리는 꿈과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져 있다.”(『태풍』) 꿈으로의 먼 여행 중 언젠가에서 다시 이 꿈꾸는 자가 낳을 살과 피를 가진 황홀한 악몽을 만날 것이지만, 오리엔트의 풍물을 탁월하게 그렸던 프랑스 화가 장 레옹 제롬(1842-1923)의 「내시의 꿈」에서 꿈의 영상은 무척이나 아련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내시는 하렘의 여인을 꿈꾼다. 내시의 머리 위에 옛 이집트 달의 신 토트의 화신인 따오기가 꿈의 세계로 인도하는 사자처럼 한 다리로 서서 잠들어 있다. 꿈의 영상은 별들이 내리는 도시 위로 아편의 연기가 되어 피어오른다. 꿈의 영상은 연기나 공기의 방울 같은 것인가. 붙잡으면 사라진다. 여인의 옆에 동자가 든 피 묻은 칼은 내시가 여인을 품을 수 있는 남성을 이미 잃어버렸음을 알려주고 있지만 또한 그것은 꿈에 대한 집착이 가지는 위험을 경고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련한 내시는 보르헤스의 꿈꾸는 자처럼 꿈의 영상에 살과 피를 불어넣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쓰는 듯 손가락과 발가락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허망하여라, 꿈이여.

(그림2) 팔대산인 「팔팔조도」
팔대산인 「팔팔조도」

허망하여라. 『원형의 폐허들』의 꿈꾸는 자는 꿈의 환영에 피와 살을 부여하기 위해 시도하지만 실패를 거듭한다. 그래도 우리는 꿈을 꾸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고단한 낮의 삶이 있고 또 견뎌야 할 어두운 밤이 있다. 17세기, 명말청초, 명나라 황실 후손으로 태어나 나라가 망하는 것을 지켜보며 미쳐갔던 한 승려 화가가 있다. 팔대산인(八大山人)이라는 호로 잘 알려진 속명 주탑(1626?-1705?)이다. 팔대산인이야말로 꿈꾸지 않고 어떻게 삶을 견딜 수 있었겠는가. 그의 그림 「팔팔조도(叭叭鳥圖)」에는 새 한 마리가 졸고 있다. 이 새는 지금 분명 꿈을 꾸고 있다. 보라, 한 다리로 서 있지 않은가. 한 다리로 엄혹한 현실을 디디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다른 한 다리로는 꿈의 세계를 헤매고 있음에 틀림없다. 팔대산인의 새는 늘 그렇다. 신화나 민담에서 외발이, 혹은 신발 한 짝은 흔히 두 세계에 걸쳐있는 있음을 가리키는 상징이다.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오르내리는 샤먼 같은 존재 말이다. 그러나 뭐 굳이 굿을 하려고 무당을 불러낼 필요가 있겠는가. 사실 우리 모두가 외발이며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존재다. 우리의 한 다리와 신발 한 짝은 매일 이곳을 떠나 꿈의 강변에 발자국을 찍고 있다. 팔대산인의 새처럼.

(그림3) 윤인걸 「어가한면도」
윤인걸 「어가한면도」

조선 중기 윤인걸의 작품으로 전해오는 「어가한면도(漁暇閑眠圖)」 속으로 들어가 보자. 바람이 서걱거리며 강변 갈대숲을 서성이는 가을 밤, 낚시를 하던 어부는 수파에 조용히 흔들리는 요람 같은 배안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꾼다. 배는 꿈과 몽상을 위한 모종의 낡은 기관 같다. 주전자의 주둥이에서 흘러나오는 증기는 이 꿈의 기관이 작동 중임을 알려준다. 「어가한면도」에는 두 계열의 선이 있다. 한 계열은 화면 중앙 수면으로 드리운 갈대의 선과 드리운 낚싯줄, 잠에 빠져든 어부의 시선 방향인 수면 아래로 흐르는 수직 계열의 선이다. 다른 한 계열은 왼쪽 갈대들과 뱃머리의 선, 그리고 주전자에서 나오는 수증기와 그 연장선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한 쌍의 기러기가 그리는 사선의 계열이다. 이 두 계열은 꿈의 기관의 동역학을 잘 보여준다. 잠이란 수심 깊이 잠기는 안식이다. 아련히 하염없이 자맥질 치면서. 그 물의 심연에서 우리는 문득 꿈의 불을 만난다. 주전자의 증기는 하강하는 물을 끌어 올려 상승시킨다. 그리하여 물의 잠은 가을밤의 공기의 꿈으로 상승하며, 새가 되어 먼 하늘로 날아간다. 근원의 심연으로 깊이 잠길수록 자유롭게 아득히 먼 곳으로 날아간다. 저 세상의 끝까지. 그 먼 여행의 체험을 춘추시대 초나라 시인 굴원은 〈원유(遠遊)〉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經營四荒兮, 사방의 황무지를 돌아다니고
周流六漠, 천지 사방을 두루 돌아다녔어라.
上至列缺兮, 위로는 하늘의 틈에까지 가고
降望大壑. 아래로는 큰 골짜기 밑까지 내려와서 보노라.
下崢巆而無地兮, 아래는 깊고 멀어 땅이 없고
上廖廓而無天. 위로는 넓고 커서 하늘이 없도다.
視儵忽而無見兮, 시야가 갑자기 흐려져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聽惝怳而無聞. 귀는 멍멍하여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超無爲以至淸兮, 초연히 하릴없이 지극한 청정의 경지에 이르러
與泰初而爲鄰. 태초와 이웃하리라.

굴원의 여행은 하늘과 땅이라는 코스모스(질서)의 경계를 넘어서 눈과 귀가 먹는 시공(혼돈)까지 가는 먼 여행이다. 아마 굴원의 심연이 깊기 때문일 것이다. ‘원유’는 넋의 여행이며, 꿈과 몽상의 여행이며, 또한 상상력의 여행이다. 꿈으로 가는 우리의 여행이 굴원이 갔던 곳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꿈은 상상력의 근원이다. 꿈이 만들어내는 상상력의 끝에서 우리는 우리 삶의 감추어진 모습을 문득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예술의 상상력과 과학의 수식이 만나는 특이 지대에서 가상과 실재 사이의 미궁 속으로 오랜 시간 떠돌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기이한 다중 우주로 빨려 들어간다면 굴원이 보았던 그 ‘태초’를 어쩌다 훔쳐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성희
이성희

◇미학자 이성희는
▷1989년 《문예중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
▷부산대(철학과 졸업)에서 노자 연구로 석사, 장자 연구로 박사 학위
▷시집 《겨울 산야에서 올리는 기도》 등
▷미학·미술 서적  『무의 미학』 『빈 중심의 아름다움-장자의 심미적 실재관』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 등
▷현재 인문고전마을 「시루」에서 시민 대상 장자와 미술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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